작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창문을 여니 6월의 부지런한 해가 벌써 예열 중이고 하늘의 빛깔은 선명하다. 그저께 내린 반가운 비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고 조용히 배낭을 준비했다. 준비라는 단어도 민망할 만큼 내 배낭은 소박하다. 비닐 재질의 얇은 배낭에 물 한 통, 커피 네 모금 정도 들어가는 보온병 하나, 아무 데나 주저앉을 수 있는 방수 방석 하나, 적당한 창이 있는 모자 하나,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는 엄선된 책 한 권이다. 더 추워지기 전에, 혹은 더 더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는 명목으로 봄, 가을은 언제나 마음이 산으로 향해 있다. 낡은 등산화는 차 트렁크에서 대기 중이다.
여자 혼자 산을 올라간다는 건 조금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냐 콧방귀 뀌는 이들이 있겠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내게 산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리는 일은 두렵다. 그게 곰일 리는 없겠지만, 오히려 곰이라면 신기해서 뚫어지게 바라볼 수도, 남자 사람이면 나는 고개를 푹 숙이게 된다. 내 모자챙이 큰 이유도 햇빛보다는 상대를 보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이다. 지금까지 산에 다니면서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도 아닌데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지나친 셀프 보호 본능일지도 모른다. 나는 일대 다수, 아니 일대 일에 있어서 남자들이 보내는 그 시선이 거북하다. 대개는 무표정이거나 간혹은 목례 정도로 지나가는 이도 있지만 누군가는 뚫어지게 오랫동안 응시하는 이들이 있다. 마음이 서늘해지며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면 흙바닥을 응시하고 사람이 없으면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혼자 산에 오르는 기쁨은 용기를 내도 좋을 만큼 벅찰 때가 많다. 처음엔 산의 정기에 감탄하며 걷게 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나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내 걸음과 호흡, 심장 박동을 느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골똘히 생각해 보고 싶었지만 일상에 묻혀 지워버렸던 생각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일상에서 느낀 내 감정을 떠올리며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를 고민해 보기도 하고, 기억을 더듬어 책에서 본 인물의 마음과 행동을 떠올려 보기도 하는 거다. 그 생각의 끝에는 내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마술이 숨어있다.
오늘의 숲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숲도 비가 얼마나 반가웠을지 온몸으로 그 비를 받아들였을 거다. 나뭇잎들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이들 마냥 생기가 넘친다. 먼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의 기운이 반가워 자꾸 걷고 싶어 진다. 기분이 좋을 만큼 숨이 차게 오른 후, 전망이 좋은 위치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저 멀리 바다도 보이고 지금까지 올라온 울창한 숲도 여러 개의 브로콜리 모양으로 내려다보인다.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고요가 느껴진다. 커피를 마시며 배낭에 넣어 온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타인은 나를 모른다'를 펼쳤다. 간단명료하고 지혜로운 작가의 이야기가 산에서 읽기엔 안성맞춤이다. 작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다. 고개를 들면 싱그러운 풍경도 내 마음을 감싸 안으니 더 바랄 게 없는 상쾌한 아침이다.
좀 있으니 누군가가 내가 앉은 벤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다행히 라디오 크게 틀어놓고 산행하는 이는 아닌 것 같아 그러려니 하고 계속 책을 읽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는 건 느껴지는데 너무 조용하다. 그제야 모자챙을 조금 들어 옆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도 옆 사람에겐 관심이 없어 보인다. 혼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조금 감동받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작은 보온병에 물 한 통, 책 한 권, 그리고 깊은 챙 모자. 또 다른 나에게 인사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그 마음도 알 것 같아 시선을 거두었다.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나도 책을 읽게 된다. 말없이 산을 바라보며 각자의 책에 빠져든다. 산의 수호천사가 내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기분이다. 산은 이렇게 내 마음을 또 흔들어 놓는다.
울창한 산속의 먼지 같은 내 존재가 산이 주는 에너지와 어우러져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고 서로의 책을 읽다 헤어졌다. 존중의 침묵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충만한 기분으로 하산했다. 혼자 오르는 산에는 늘 수호신이 따라온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