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팽나무 Sep 09. 2021

9월, 바람으로 통(通)하다

  며칠 사이 하늘색이 달라졌다. 뽀득뽀득 씻겨놓은 아이의 얼굴처럼 말갛다. 훨씬 선명하고 깔끔해졌달까. 구름의 모양도 동글동글 부드럽게 변했다. 바람 한 줄기가 살짝 목덜미를 간질인다.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것일까. 선들선들한 건들바람인지 선선한 색바람인지 모르겠지만, 초가을 바람은 여낙낙한 맛이 있다.

  저 구름 속에도 바람이 살고 있을까. 조금씩 달라지는 구름의 모양을 보면 그럴 것도 같다. 하긴 바람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으랴. 허공은 물론이고 나무며 건물 틈바구니, 사람의 옷깃 사이, 바다의 물결 속에도 존재한다.

  느긋한 바람은 지금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난기 심한 바람은 벽과 벽 사이를 건너뛰고, 호기심 가득한 녀석은 커튼 뒤에 숨어서 어느 집 거실을 훔쳐볼지도. 장난기가 도지면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놓고는 줄행랑을 칠 테고 때로는 느긋하게 빨랫줄에서 그네를 타기도 할 터, 겨르로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 만물의 기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가을바람에는 유독 청량감이 스며있다. 8월이 지나고 모두 여름의 끈적끈적한 날에 지쳐 있을 즈음,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키는 것도 바람이다. 바람이라고 여름을 견디기 쉬웠으랴. 뙤약볕에서 촛농처럼 축 늘어졌으니 운신도 힘들었을 게다.

  이름값도 제대로 못 했던 지난여름, 오히려 인공바람에 밀려 천덕꾸러기였던 것에 비하면 가을바람은 주연의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산과 들이 울긋불긋 물들어가면 바람의 몸은 바빠진다. 노랗게 익은 벼들의 떼 춤을 지휘해야 하고 티격태격하는 연인들의 마음도 중재해야 한다. 발갛게 익어가는 과실의 꽃단장에도 빠질 수 없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을이 절정에 달하면 바람은 허공에 낙엽의 길을 만든다. 덩달아 사람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간 바람, 시(詩)가 되어 툭툭 터져나온다. 가을은 누구나 시인을 꿈꾸는 계절, 9월의 문턱이 벌써 부산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늙음에 관한 보고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