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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빌레 Jun 06. 2023

남편 발이 안쓰럽다.

그래서 계속 살게 되나 봐

“아이 낳으면 남편이 안중에 없어진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출산을 서너 달 앞둔 직원이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응, 맞아. 안중에 없어져. 나중에는 숨 쉬는 것도 꼴 보기 싫어져. 그러니 지금 잘해줘.”


직원이 웃었다. 저런, 농담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깨 쏟아지는 신혼의 환상을 좀 더 지켜주고자,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같이 웃었다. 그래, 세대도 달라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이야,

아주 한참이 지나고 나면,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주름진 발등과 가늘어진 발목이 눈에 들어와 갑자기 눈물이 나고,

굽어져 가는 늙은 등판을 보면 왜 그리 처량한지.  

그래서 계속 살게 되나 봐.’  


그렇다. 요즘은 남편이 안쓰럽다. 50대가 되니, 일 순위였던 아이가 커버리니, 남편이 이제야 보인다. 나와 똑같이 늙어가는 남편이 눈에 들어온다.


단조로운 생활에 밖 활동도 거의 없는 MBTI 파워 I에게 남겨질 사람은 결국 남편 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심지어 나중에 나 혼자 남으면 혼자서 어떻게 살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아이가 생기면 남편에게서 내가 안중에 없어질까 봐, 내가 일 순위가 아닐까 봐 걱정하던 신혼 시절도 있었다.


기우였다. 내가 먼저 남편을 아웃오브 안중.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의 일 순위는 곧 아이가 되었다. 나는 이 작은 연약한 생명체를, 이 험난한 세상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고 바르게 키워낼 수 있는데 집중해야 했다. 남편에게는 또 다른 아내, 시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가정의 중심이 부부이지만, 남편에게는 가정의 중심이 시부모님이다. 시부모님 하에 아이와 내가 있다. 시부모님 중심의 가정에서는 부부의 희생, 며느리의 희생이 수반된다.
가정에 대한 전제 조건(?)부터가 다르니, 모든 논의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고 계속 어긋났고 부부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




좋아서 결혼해 놓고, 어쩌다 꼴 보기 싫어지기까지 했을까?


남편과 나는 맞지 않는 편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같이 있으면 서로 편하고 좋다. 남편은 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는 편이며, 내가 원하는 바를 지지해 준다. 물론 시어머니에 대한 것만 빼고.


좋은 것, 맛있는 것을 보면, 아들 생각도 나지만 남편 생각도 난다. 친구들이 남편 험담을 할 때도, 남편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라 (안 하기 위해 일부러 참는 것이 아닌, 그냥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인들은 내가 남편을 너무 사랑하는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남편 얼굴을 보면, 남편 얼굴에서 시어머니 얼굴이 보이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시어머니와 관련된 남편의 어긋난 말 하나, 행동 하나는 나의 발작 버튼을 눌러버린다. 옆에 있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남편이 시어머니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부부가 해결해야 할 일들을 방관하고 회피하는 상황들이 계속되다 보니 남편이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져, 서운함을 넘어 분노가 쌓여갔다. 착한 사람의 탈을 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각자 누릴 수 있는 혜택과 편리함을 위해 상황을 은근슬쩍 회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 탓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


이제 남편도 50이 넘었다. 남편도 중간에서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이 중간에서 잘했으면 하는 서운함과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지나간 옛 일들에 더 이상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싶다. 나의 마음을 챙기며 앞으로 잘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싶다.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의 아저씨 드라마 대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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