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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n Chon Aug 01. 2022

매일 : No. 1

2022년 8월 1일

Day Seventy-Two No. 1, 전이린, 종이 위에 연필, 21 cm x 29.5 cm, 2022


가끔, 아주 가끔, 입시 화실에 다니는 꿈을 꾼다. 화실에 얽힌 재미있는 추억도 많은데, 꿈에서는 한 가지 에피소드만 반복해서 등장한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실기 시험까지 두 달 가량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미대 지망생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훈련의 시간이었다. 출제 유형에 따른 구체적인 패턴을 주어진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도록 그리고 또 그렸다. 훈련 방법은 매일 한 장씩 그리는 것이었다. 방과 후 화실에서 4시간쯤 그리다가 다 못하면 집에 가져가서 완성했다. 2주 정도는 꼬박 밤을 새웠다. 역시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다. 실기 시험 2-3 주 전부터는 화실에서 다 완성을 하고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아직도 가끔 꾸는 꿈은 무거운 화구를 들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가 그림을 잃어버리는 꿈이다. 


On Kawara라는 미국 작가가 있다. 그는 매일 '그날'의 날짜를 캔버스에 그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캔버스와 물감을 고르고, 동일한 날짜 포맷과 글자체로 '날짜'를 그리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작은 캔버스를, 어느 날은 커다란 캔버스를 집어 든다. 그리고 당일에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폐기한다. 그림의 의미는 '그날'을 그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하루'를 그린다. 그러나 On Kawara의 하루와는 다르다. 그림을 폐기해야 하는 엄격한 마감 시간이 나의 하루에는 없다. 매우 주관적이고 경계도 모호하다. 왜냐하면 내가 설정한 나의 하루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일컫기 때문이다. 몇 년을 그렇게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하루'들을 살았다. 해가 지고 뜨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어차피 지금 하고 있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까지, 하루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충만한 '하루'들이 지속되는 동안, 나의 일상은 조금씩 무너졌다. 낮과 밤은 의미를 잃었고, 불면증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든다. 가끔은 7시가 되어야 겨우 잠이 들 때도 있다. 분 단위, 아니 초 단위로 살아야 생존이 가능한 현대인의 삶이, 하루라는 단위 조차도 무너진 내 일상에서 온전히 영위될 리가 없다. 


다른 '하루'를 찾아야 했다. 밤이 있는 하루, 충분히 잘 수 있는 하루. 마감이 있는 하루.


이제 나는, On Kawara처럼, 그리고 입시미술을 준비하던 때처럼 매일 '하루'를 그린다. A4 사이즈의 작은 종이 위에 한 장씩. 생존을 위해 하루에 이야기 하나씩 만들어 내야 했던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만큼의 절실함이 내게도 있을까.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매일'이라고 지었다. 매일은 반복되는 하루이고, 밤을 회복시켜 주는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이 첫날이다. 

Day Seventy-Two No. 1, 전이린, 종이 위에 연필, 21 cm x 29.5 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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