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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n Chon Aug 07. 2022

매일 : No.7

2022년 8월 7일

Day Seventy-Eight, No.7, 전이린, 종이 위에 연필, 21cm x 29.5 cm, 2022


4B라는 연필이 있다는 것을 아마도 중학교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묵직한 4B 연필의 맛을 알아서라기 보다는 어린 마음에 전문가용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는 뿌듯함 때문에 나는 4B 연필을 무척 좋아했다. 톰보우(Tombow) 4B 연필을 사러 화방이 모여있는 남대문까지 나들이 삼아 가곤 했던 일은 나뿐만 아니라 미대 입시를 준비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추억이다. 


여전히 연필을 사랑하지만 더 이상 4B를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이라는 작업의 정체성에 집착하다 보니 HB 연필을 더 많이 사용한다. 연필의 무르기 정도에 따라 6H부터 8B까지 15가지 종류가 있지만, 사실 브랜드마다 차이가 많이 나고, 또 나무 연필이냐 샤프심이냐에 따라서도 큰 차이가 있다. 또 어떤 종이 위에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도 연필은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연필은 결코 쉬운 매체가 아니다. 


내가 연필을 사랑하게 된 것은 연필만이 표현할 수 있는 광택 때문이다. 나는 연필로 무엇인가를 묘사하는 데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대신 연필만이 가지고 있는 물성이 종이와 만나 어떻게 표현되는 가에 더 관심이 있다. 6H이던 8B이던 연필을 오래 문지르듯 겹겹이 쌓아 올리면 특유의 광택이 생겨난다. 모든 광택이 그렇듯이 연필의 광택도 빛의 반사에 의해 생기므로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광택을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연필은 쌓아 올린 노동에 정직하게 비례해서 광택을 내어준다. 가는 연필선이 보이도록 얇고 세심하게 그리면 광택은 없다. 그 선들의 미세함도 사랑스럽지만, 오래된 가마솥에 엉겨붙은 검댕이처럼 시간이 축적된 까만 연필 광택은 언제 보아도 나를 설레게 한다. 


며칠 동안은 섬세하고 가는 선으로 한 겹을 슬쩍 덮듯이 흐리고 가볍게 그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고, 오랜만에 2B 연필을 골랐다. 이런 날도 있다. 종이와 연필에 화풀이하듯 사정없이 손을 움직이는. 그런데 연필은 내 사정을 아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질감과 광택을 슬쩍 보여준다. 그리고 속삭인다. 


이거 맞지?


Day Seventy-Eight, No.7, 전이린, 종이 위에 연필, 21cm x 29.5 cm, 2022



Day Seventy-Eight, No.7, 전이린, 종이 위에 연필, 21cm x 29.5 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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