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師表

서세이 Vol. Extra

by 서사서기


나오며 남기다, 들어가며 내놓다.



<출사표> 라는 제목의 글을 두 번 쓴 적 있다.

대학교 학부를 졸업하며, 정규 교육과정 외 고등인문학교에 지원하며.

작성 시점으로부터 펼쳐질 삶의 역정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다짐하는 선언이었다.

미래의 변화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길에 바치는 헌사였다.


스스로 거는 최면 효과를 의도했으나 고백을 충실하게 지키기 어려워 여전히 하찮은 관성에 매여있다.


속죄는 나만 하면 충분하고, 글에는 죄가 없으니까.

사어까진 아니더라도 사용 당위성과 빈도가 한없이 떨어지는 어구들을 덕지덕지 가져다가 기워냈다.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통찰력은커녕 말의 뜻은 제대로 알고 쓰냐며 굳이 직관을 포기하고 글을 아리송하게 쓴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언명의 바는 서랍에 남기고 싶어 신상이 특정되는 내용은 제하고 일부 수정을 거쳐 옮겨온다.




우연히 이르렀던 지축의 드높은 기슭 한 자락. 꿈의 품에 덧댄 책임을 내받았습니다.


석탑 속의 굳은 지성, 포효 속의 뛰는 야성.
그대 지야의 함성 주인이여, 조국의 영원한 고동이 되어 메아리쳐라.


그로부터 7년이 흘러,


겨레의 정성과 보람이 가꾸어온 유산에 상응하는 보답을 눈부신 과실로 맺어냈는지

떳떳하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소상히 규명해내지 못한 史의 정의.

정기전과 입실렌티를 벗어나선 환히 밝히지 않은 '자유의 불, 정의의 길, 진리의 샘.'

호상을 우러러 전통 불변의 기치로 내세운 '愛國愛族'과 '公先私後'가

이 시대와 우리 세대의 개방적 지향점인지 의문이 드는 공허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공든 탑 아래 네 글자를 깊이 새겼다면 그것은 "인간다움."

설령 변화가 더뎠을지라도, 비등과 퇴행을 반복하며 정체되지는 않았던 문명의 역정을 준거로

교정 바깥에서 부르짖을 힘을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역사의 물결을 무시하는 독선을 뒷배 삼아 참으로도 비루하고 추악한 반지성이 암영을 드리웠습니다.

이 눅눅한 어둠 속 미몽을 먹고 자라난 극단의 다상은 우리네의 지금을 도탄에 빠트렸습니다.


모름지기 기억할 수 있는 국가라면.

응당 지성의 자격을 입에 올리려면.

사유의 불능에 맞서 오늘과 다른 미래를 이끌어갈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는 책무이자 부채를 포용해야 합니다.


구국의 영웅을 희구하기보단, 몰입의 방식을 올바르게 취했는지 항시 경계하겠습니다.

무력한 무지로 연명하기보단, 종착점이 없을 배움을 향한 의식과 열망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작금의 선결 과제가 통합의 신념이라 했습니까. 그렇다면,

법치를 존중하되 혼동하지 않는,

성장을 의심하되 부정하지 않는,

양심의 타락을 미학의 영속이라 크게 오인하여 훼손된

보수주의와 공화주의를 ‘공동체’라는 본령으로 복원하는 과업이 그 단초라 확신합니다.


"너의 젊음을 고대에 걸어라, 고대는 너에게 세계를 걸겠다."


민족의 요람이 제 도야에 걸었던 도박이 성공했는지 증명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아득한 두려움 너머, 오랜만에 설레기 시작합니다.



- 2025. 02. 25.






[몰입하는 아름다움으로 정체를 흩트려라]


① 사람과 세계를 이해하라.
② 그 서사를 나의 언어로 풀어내라.

기록가의 두 책무를 단련했다. 이해의 스키마는 인문학이었고, 언어는 자의식을 담아낸 말과 글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에게 책임지기 위한 역할인가. 해답은 통찰한 공동체였다. 공동체를 지키고자 역동적인 변화의 도구 ‘정치’를 목표로 삼았다. 정치 지형의 주체가 되려면 정책 설계 및 분석력이 중요하다. 이를 함양하고자 교내 지역컨설팅 그룹을 시작으로 선거캠프, 정부부처, 입법지원기관, 국제기구까지 점차 행동반경을 확장했다. 협력하는 이해관계자가 다양한 만큼 나에 대한 수요 역시 상이했다. 실전 투입 가능한 공약 자료, 청년의 시각과 창의성, 대중언어로의 정책 번역 등에 조응해 쓸모를 보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결과적으로, ‘역량=전문성+네트워크+자본+실적’이라 정립한 등식의 각 항을 채워나가는 ‘준비’를 이어왔다.


그런데 과연, ‘준비’가 아닌 ‘학문’을 지금껏 해본 적이 있는가?

학문이란 자고로 ‘과연 그런가’, ‘왜 그런가’ 질문을 던지며 삶을 꾸려갈 자유를 얻어가는 역정이다.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명문이라 합의된 대학에 가고 싶어 매진한 문제풀이 학습은 입시를 위한 ‘준비’로 귀결되었다. 학문의 전당에서도 학점과 직장을 위한 ‘준비’가 대세를 이룬다. 기록가란 강점과 정치가란 꿈이 명확했다 자부한 나조차도 공적인 일만을 해야 한다는 일차원적 강박 아래 정체되어 있었다는 잔혹한 실상을 마주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취미와 일을 결부시켜 00회사와 00법인 취업에 도전했고, 公의 족쇄를 풀고 시장 가치 배분을 경험하기 위해 창업교육을 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취·창업을 명목으로 한 활동에서도 정책동향과 산업환경을 분석하고, 지역 상생 방안을 구상하는 걸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쩌면 이 순간이 ‘학문’에 몰입했던 찰나 아닐까.


올해, 이 몰입의 찰나를 이어가고 싶다. 그간 공공선을 향한 의식을 기반으로 보고, 비판하고, 글을 쓰는 힘을 키워왔다. 자기이해와 성찰을 마친 끝에 뚜렷해진 지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불편한 현실을 소상히 설명한 후에 내가 소망하는 세상을 시민에게 납득시키겠다.

둘째로, ‘지방시대 – 기후위기 – 역사문화’를 세 축으로 삼아 현안을 공략하는 전문성을 육성하겠다.




[사유의 불능에 맞서려면]


‘반지성주의’는 작금의 현실을 꿰뚫는 요체이다.

여기서 지성이란 지식 보유 척도나 학력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을 독자적인 원리와 방식으로 설명하겠다는 욕망”이라 지성을 정의한다.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겠다는 실천적 변혁 의지타자를 사유하는 공감의 존재가 기저에 공고함이 지성인과 지식기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지성주의는 지식을 향한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을 자처하는 정보량의 과도한 증대 속에서 분출하는 극단의 다상이 우리네의 지금을 도탄에 빠트렸다. 반지성은 역사의 물결을 무시하는 독선을 뒷배 삼아 지성인에게, 더 넓게는 타자에게 적대적 모멸을 보인다. 이분법적으로 적과 동지로 세상을 구분하고 동종 세력에서 인정하지 않는 삶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약화한다.

무엇보다 세론을 합리적 담론으로 가공해 현실적 대책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공적 공간마저 점차 항간의 반지성주의에 잠식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그렇기에 흔히 최근 세태를 일컫는 ‘혐오의 시대’보다 ‘사유를 혐오하는 시대’가 보다 적합한 용어라 생각한다. 정의의 전제가 진리라는 명제를 믿어왔으나, 학문의 자리를 감정과 여론 장사꾼이 강탈해 원색적 선동으로 진리를 판정하는 시대가 두렵다.


‘인문학의 부재’라는 표피적 어구보다 현 사태의 본질은 지능과 의식의 비동조화에 있다. 이 절연은 무분별한 정보 재생산과 생성형AI 등 급속한 기술 발전에 기초한다. 혹자는 혁신 속도를 제도가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의사결정자이자 행위자 인간은 온전히 미래를 감당할 힘이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이 문명을 바꾸고,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면, 학문은 인간을 바꾼다.

이 변화는 단선적 진보만을 답습하지 않기에 모름지기 사유의 책임이란 곧 인간다움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의무를 방기하기 시작하며 옳고 그름의 판단 자체가, 아니 사고의 당위성 자체가 유보되는 형국이 관찰된다. 인식과 관념을 실재로 일치시켜 현실 속에서 현실을 극복한 근대인으로의 성장 과정이 인류 역사를 규정한 문명적 슬기일 터인데, 현대에 와 이성적인 말과 생각이 무력할 때가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궁리하는 국가]


사유의 불능에 맞서 지성인이 먼저 밥값을 해야 한다.

역사학이 연구와 서술에 그치지 않고 대중 소통과 미디어 전문가가 필요하듯, 지성인은 학구적 태도와 실천적 학문을 결합해서 사회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사회 전반에 확산해 주체적 시민의 덕성을 키우는 미래를 꿈꾼다.

관건은 공론장을 통한 궁리가 일상에 스며드는 일이다. 지역별, 계층별로 자유롭고 생산적인 숙의가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 아래 활성화되어야 한다. 관심 주제를 예로 들자면, 기후시민회의를 추진한다고 했을 때 행정 형식상으로 의견을 수렴했다는 표징이 요구되어 집단을 조직해서는 안 된다. 고도로 전문적인 분야에서 국민의 참여도는 어느 정도로 규정해야 하는지, 이를 실현하는 방안은 어떤지 등을 촘촘하게 마련해야 한다.

현실에 대입해 구체적인 분야별 개괄을 보이자면:

정치적으로, 과잉된 싸움의 기술 대신 진영의 울타리 바깥에서 어떻게 시대를 역사에 남기고, 분열의 상흔을 치유할지 고민하는 국가라면.

사회적으로, 문제를 미학화해서 표현하는 미봉에 그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 격차를 해소하려는 능력을 보여 국민통합이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는 국가라면.

경제적으로, 산업의 투입 요소와 경쟁력을 합리적으로 판단해 단기간의 성과가 아닌 제조업 이후 신성장 동력을 찾아내기 위해 민관산학이 합심하는 국가라면.

문화적으로, 박제된 의례를 벗어나 생동감을 창출한다면. <흑백요리사>가 각광받을 때 콘텐츠의 형태만 차용해서 반복하는 게 아니라 미식산업의 저변을 강화하려는 안목을 갖추는 국가라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돌보고, 미래를 책임지는 보수주의자’를 꿈꾼다]


본 보수주의는 특정 한국 정당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한국 보수주의는 이념적으로 빈곤하다. 건국과 산업화 이후 대안서사를 발굴하지 못해 극우반공이란 향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판에 박힌 표어 외에 이데올로기가 없는 실정이다.

공동체를 지키려고만 하고, 정작 가꾸는 데 실패해 국민에게 소구력을 상실한 지금의 한국 보수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 개인이 삼라만상에 통달할 수 없기에 한국에서 보수라는 이념을 혼자 정의하겠다는 오만이 아니다. 관념이나 형이상학에 매몰되어 자조만 남은 지식인, 마치 Lumpen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깨트려야 한다.

존경하는 William F. Buckley Jr가 보수의 지적 우위와 품위를 강조하며 청년 시민운동을 이끌었듯, 버클리 모델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전개해 지적공간을 확대하고 싶다.

왜 보수에는 시민단체가 없는가? 아래로부터 목소리를 모으는 경험이 없는 한국 보수세력의 퇴락은 필연적이다. 활동가는 없고, 논객만 과유불급인 이 금기를 깨고 싶다.

왜 보수는 기후위기를 말하지 않는가? 기후와 환경의 이원론적 구분에 언제까지 의제를 선점당해야 하는가?

독서와 토론, 글쓰기를 기초로 건전한 청년들과 Sharon Statement처럼 한국 보수주의의 철학적 지표를 세우고 싶다. 그리고, 기후리더십을 지니고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목소리를 내는 청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정녕 협애한 수사를 반복하며 지배수단으로의 보수의 미래만을 강구한다면,

나는 보수 바깥의 보수를 기꺼이 자처하겠다.




[무력한 무지를 벗어나고자]


빛을 세우는 000에서 추구하는 빛의 방향은 함께하는 고독이란 역설이다. 곱씹어봤을 때, 내가 주인공인 자신의 삶을 위해서 선생님들의 생각을 그대로 쫓는 절대화가 아닌 사유의 질료로 삼으라 이해했다.

글의 서두에 세상을 이해하고, 이를 언어로 풀어내 왔다고 말했다. 공동체에 있어 전자가 주인의식이라면, 후자는 책임의식이다. 두 의식을 내실화하고, 000의 끝에선 한 가지를 더 찾고 싶다.

26년 000에서 내가 성취할 비전은 ‘학문과의 지속적 대면’이다.

지난 000의 교과과정을 톺아보니 학교 수업처럼 특정 분야를 탐독하고, 지식을 늘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보다는 기초체력을 키우는 데 방점을 찍고자 한다. 경험자들의 연역과 연혁이 담긴 책이 첫 번째 동료일 테고, 다양한 철학을 공유할 00기 동지들이 두 번째 동료일 것이다. 이를 통해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현상 너머의 움직임을 보는 법을 키우고 싶다. 역사와 철학에선 인류 사조의 흐름을 체득하겠다는 야망이 있고, 문학-과학-예술 분야에서는 편식 없이 미래를 보는 나의 관점에 투자하겠다.

어쩌면 저열할 수도, 진솔할 수도 있는 근래 고민 중 하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휘발되는 수강했던 학부 강의나 읽었던 책들의 기억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이다. 나름의 방편으로 완독한 책과 논문 등에 관해 정의-질문-현실 적용 등의 구조로 비평을 남겨 나만의 모듈 도서관을 만드는 중이다. 과연 사고를 정리하는 현 방식이 체계적이고 실용적인지 이번 기회에 수업과 토론에 참여하며 점검하고자 한다. 브런치를 비롯해 SNS에 써 나가고 있는 긴 호흡의 에세이 역시 꾸준히 발전시켜 버클리 모델의 초석으로 닦아야 한다.


(중략)


-에 스스로 국민을 설득할 역량을 갖추었는지 검증 준비 여부를 되묻고자 한다. 승자독식과 적대적 공생이 계속되는 힘의 논리에 그때 회의를 느낀다면, 식량주권과 기후를 연계하는 로컬 창업 등 다른 곳에서 정치의 씨앗을 뿌려보겠다.

즉, 광의에서의 정치는 여의도 등원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회에서의 노동 없이, 가치를 생산한 경험 없이, 유력가를 쫓으며 정당에서 ‘청년’이 들어간 직함을 받는 것은 청년 정치의 본령이 아니다.

그렇기에 직업 정치인만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성장에 제약을 두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남들이 다 하니까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시작하는 일은 유년기로 족하리라.

모두 그르다고 할 때 옳은 게 없는지 살피고, 모두 옳다 할 때 그른 게 없는지 살피라 했다. 견지망월에 빠져 처세에 급급하지 않겠다.

정체를 흩트리겠다는 사람이 남이 깔아주는 레일대로만 걸어가는 건 재미없지 않은가. 아무리 돌아가더라도 결국에는 끝에서 나의 길을 찾아내리란 믿음을 증명하겠다.




우리의 ‘삶’이란 ‘앎’‘함’의 직조로 탄탄해지기에 아름답다.

무지와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앎이라면, ‘앎’이 있어야 ‘삶’이 변할 수 있다.

시간의 집적 덩어리일 뿐인 세월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역사의 매듭은 참으로도 아름다웠다.

분명 불완전한 인간의 결단을 돕는 학문에는 다른 아름다움이 더 있으리라 확신한다.

기능적인 앎의 증진을 넘어 공부하기 이전과 이후 나의 도야를 증명해 낼 실존적 혁명을 일으켜보겠다는 열의로 출사표를 던진다.



- 2026. 03. 07.

작가의 이전글그런 날 있잖아,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