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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Dec 31. 2016

가는 2016년, 1916년생을 기리다

탄생100주년 맞은 예술가와 나의 조모·외조모

1916년은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해다. 나의 조모와 외조모 모두 이 해에 태어났다. 2016년은 이들의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라, 이들에 대한 추억을 조금 읊어보자 했으나 게으름을 피우다가 올해를 다 보내고서 이제야 몇 자 끄적거려 본다. 나의 할머니들과 함께 같은 해 태어난 여성 인사들에 대해서도 적어보고 싶었다.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남성 문화예술계 인사에 대한 조명은 꽤 활발했으나 여성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내가 이 해에 태어난 여성들에게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1916년이 용띠해였기 때문이다. 생존 외할머니가 “너희 할머니나 나나 여자가 용띠에 태어나서 팔자가 그렇다”고 한 말씀을 기억한다. 소위 ‘팔자가 세다’는 말일 터이다. 여자가 제 뜻을 다 펴고 살기 어려웠던 시대, 12간지 중 용, 말, 범 같은 크고 활달한 동물이 상징하는 해에 태어난 여자에게는 ‘드세다’는 속설이 따라붙으며 출생 자체를 기피하기도 했단다. 이른바 ‘용꿈’으로 표상되는 길한 동물은 남아에게나 해당되는 영광이었다. 어느 해나 인물은 태어나기 마련이니 용띠해에 유난히 유명인이 많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100이라는 숫자가 표징하는 이미지라는 것이 있어 올 한 해는 1916년생 기념행사로 문화예술계가 풍성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이 해에 태어난 미술가들인 변월룡(펜 바를렌, 1916~1990), 이중섭(1916~1956), 유영국(1916~2002) 시리즈전(‘백년의 신화:한국근대미술 거장전’)으로 한해를 채웠다. 미술관에서 마련한 특강과 큐레이터의 전시해설을 빼놓지 않고 들으며 풍요로운 한 해를 보냈다. 특히 변월룡이라는 화가의 발견은 특별했다. 냉전과 분단시대를 거치며 잃어버렸던 귀중한 동족 화가 한 명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해주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 미술학교인 레핀아카데미에 한인 최초로 입학하고 35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소련 문화성의 지시로 북한에 파견돼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을 지내며 북한 미술교육의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소련파 축출로 숙청되면서 북한에서도 잊혔다. 광복60주년을 맞은 2005년 국내 전시를 추진했으나 남북화해 모드가 오히려 북한에서 ‘민족의 배신자’로 규정된 그의 전시를 막았다. 이번 국내 첫 전시에서도 역시 분단 현실을 반영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전시연계 강의 중 ‘50~60년대 북한 화단 속 변월룡의 영향’이라는 강좌의 제목이 ‘북한’에서 ‘한국’으로 중간에 바뀐 것이다. 그의 작품 경향은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지침을 따라 도식적이라고 보여지 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다.      


우리동네 부암동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에서도 이중섭탄생100주년기념전  ‘이중섭은 죽었다’라는 전시가 있었다. 서울미술관의 대표소장품이 이중섭의  ‘황소’다. 설립자인 안병관 유니온약품 회장이 2010년 경매가 35억6000만원에 구입한 이 작품을 위해 서울미술관을 지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평생 이중섭 작품 17점을 모았다. 내친 김에 체부동에 있다는 이중섭가옥도 가보았다. 이중섭이 서울에서 전시회를 준비하며 머물렀던 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이중섭과 동갑내기 친구인 김병기 화백을 뵀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그는 홀연 귀국, 평창동에 집을 얻어 여전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사는 ‘자문밖’지역인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에서 매 가을 열리는 자문밖문화축제 기간 중 스튜디오를 겸해 쓰는 자신의 집을 공개하기도 했다. 동네에서 열리는 잔치에 아니 가볼 수 없다. 올해는 가나아트센터에서 ‘백세청풍’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파란만장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고비고비를 넘어온 산증인이라는 것뿐 아니라 ‘100세 시대’에 100살이 넘어서도 현역을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점에서 귀감이 됐다. 청력이 좀 떨어지는 듯싶었으나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손님 접대를 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도자기와 전통 목공계, 회화사 분야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와 같은 저서를 통해 한국미를 탐색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 새삼 그의 이름이 부상한 것은 그가 궁정동에서 이사, 작고할 때까지 머물던 성북동 집이 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이 관리하는 시민문화유산1호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기부로 이뤄지는 시민환경운동으로 지켜낸 한옥은 고졸하면서도 고즈넉한 멋으로 시민들의 쉼터가 돼주고 있다. 역시 게으름에 미루고 미루다 올해의 마지막 공개일이었던 11월31일 그의 미학을 삶으로 실현한 이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그의 숨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감흥이 남달랐다. 지난 6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던 ‘최순우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대회’에 다녀온 것도 소기의 성과랄까. 후학들이 그를 추억하고 추모하는 열기에 반나절을 꼬박 앉아있었는데도 지루할 줄을 몰랐다.  박물관측에서는 최순우가 아끼던 소장품들을 다른 전시물 사이사이에 전시하는 이벤트성 행사도 벌여 소소한 재미를 줬다.


한국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은 2001년부터 탄생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열고 있다. 2016년에는 시인 박두진 이영도 설창수 김종한 안룡만, 소설가 김학철 최태응, 시나리오작가 최금동 등 8명의 문인이 대상이었다. 올해는 박두진이 소속된 청록파가 ‘청록집’을 낸 지 70주년이 되는 해로 이곳저곳에서 관련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다른 글로 더 얘기하고 싶은데 새롭게 발굴·조명되는 작가들을 보면 그동안 이데올로기로 인해 한국문학의 범위가 얼마나 축소됐는지가 두드러져 새삼 속상하다. 김종한은 일제강점기 식민지에서 일본어로 쓴 시가 일본문학이 돼야 하는 것인지 질문을 남긴다. 재북시인 안룡만도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시작을 했지만 한국민중문학의 범주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평가다.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학철 역시 중국 연길에 정착하면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서 활동했지만 한글로 중국 지방에 사는 한민족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문학교육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의 좁은 지평을 한탄했던 국문학도로서 1916년생 작가들의 재발견은 사고의 외연 또한 확장해준 계기였다.    

  

여기서 걸리는 것 중 하나는 또 남녀 성비다. 여성작가는 정운 이영도(1916~1976) 한 사람뿐. 경북 청도 출신의 이영도는 무학으로, 독학으로 시조시인과 교육자가 됐다. 양가의 딸은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다는 당시 시대 분위기에 따라 집안에서 스스로 공부를 이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다만 문학사에 그의 이름이 단독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은 그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역시 시조시인이었던 친오빠 이호우와 함께 거론되거나 청마 유치환에게 5000여 통에 이르는 편지를 받은 플라토닉 러브의 대명사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여성이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해도 남성의 조력자로 머물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시기의 일이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서양화가가 된 나혜석(1896~1948)의 말로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여성이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횡행한다.      


그러니 20세기 초반 태어난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더 제한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후 혼란기, 한국전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견뎌온 내 조모와 외조모의 일생을 그려보면 당시 여성들에게 주어진 삶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조상들과 다른 후손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자세히 언급할 순 없으나 당시는 남존여비사상이 지배적이었고, 남성들의 성에 대한 모럴해저드가 일반적이었다. 이 가운데 여성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지독히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유교적 ‘삼종지도’(어려서 어버이께 순종하고 출가해서는 지아비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는 도리)가 여성이 따라야 할 규범으로 여겨지던 때라 자신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면서도 어려운 시대에 자식들의 생계는 책임져야 하는 이중고에 얽매여있었다. 두 분 모두 나이 차가 한참 나는 남편(조부, 외조부)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여의었기 때문이다.

     

60간지로 헤아려보면 1916년인 ‘병진’은 53번째 갑자다. ‘병’이 붉은색을 뜻한다고 하니 ‘적룡의 해’다. 엄마는 외할머니는 ‘여름 용’이라 ‘쌩쌩’하시지만 친할머니는 ‘겨울 용’이라 시들시들 편찮으시다고 했다. 2012년 오랜 병원생활 끝에 돌아가신 외조모는 ‘군수 부인’으로 대접받기도 했으나 과수원을 운영하고 돼지를 치며 공무원인 외조부가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도록 뒷바라지한 여장부였다. 1996년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친조모는 젊은 시절부터 ‘조개 속 게’라고 불렸다는데 ‘아주 연약하고 활동력이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란다. 유난히 하얗고 야들야들한 피부를 지녔던 할머니는 언제나 조용하고 얌전했다. 때문에 아버지가 중년나이에 해명하기 전까지 할머니를 일본인이라고 오인했었던 동창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자전거를 배워 타고 다니는 등 신문물을 접했던 할머니는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6.25동란시 인민군에게 들킬까 봐 태워버렸던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전 국민이 양반의 후손이라고 우기는 시대에 이런 구분이 가당치는 않겠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두 분 모두 시골 양반가 소생인 것이 확실한 것 같다. 반가의 규수는 집 담장 밖을 넘어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던 시대라 학교 근처도 못 가봤지만 그래도 ‘암클’이라는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교육은 받았다. 외조모는 충청도 수안보 산골 훈장의 딸이었는데, 조선시대 유명한 무신이었던 임경업 장군의 7대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외할머니는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여학생들이 그리 부러울 수 없었다”, “장터에서 빌려온 ‘장화홍련전’을 읽으며 혼자 한글을 떼었다”며 영리한데도 신교육을 받지 못했던 한을 내비치고는 하셨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여자로 태어나 포부를 펼치지 못했던 회한을 말하기도 했다. 호적에 있는 외조모의 존함은 ‘임언년’. ‘언년’은 손아래 계집아이를 귀엽게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다. 남아선호 시대의 유물 같은 실명을 마땅치 않게 여기신 외조모는 ‘임금옥’이라는 이름을 즐겨 쓰셨다. 워낙 외모가 고와 ‘금옥’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는데, 뛰어난 미모 덕에 산으로 사냥을 온 엘리트 관리인 외조부의 눈에 띄어 서울로 시집을 왔다.      

친조모는 대구 인근 경남 협천군(지금은 합천군으로 편입된 듯하다) 태생이다. 뼈대있는 양반가로 알려진 재령이씨 집안 출신이나 할머니의 아버지(나에게는 진외할아버지, 협천의 마지막 현감이었다고 한다)가 독립자금으로 가산을 탕진하면서 홀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시집을 갔다. 할머니 살아계실 때 얘기를 들어보면, 할머니의 언니가 자랄 때만 해도 짱짱한 양반가여서 이 언니는 댓돌 밖으로 나서는 일도 없이 몸종이 세숫물까지 떠다 바쳤다고 했다. 어찌나 서슬 퍼렇게 도도했는지 나중에 시집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고함 한 번에 오금이 저려 ‘얼음’이 되곤 했단다. 선교사가 찍은 구한말 사진 중 양반댁 젊은 마님이 찍힌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꼿꼿한 자태며 거만한 눈빛이 대단했다. 이모할머니는 아마도 그런 아씨였나 보다. 진외할아버지는 큰딸의 혼처를 유서 깊은 양반 집안이라며 하씨 집안으로 정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명절 때면 딸 부잣집인 아버지의 이종사촌형네 집에 놀러 가곤 했었는데, 나에게는 육촌인 그 집 딸 중 하나가 국회의원 한 모 씨와 결혼한 하 모 PD다.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는 일본에 나라를 뺏긴 지 여섯 해 지나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던 듯하다. 신을 신이 없어서 언니가 신던 고무신 끝을 접어 꿰매 신어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할머니의 성함은 ‘이필선’. 꽤 세련된 이름인 것 같으나 한자 마칠 필자를 쓴 것으로 봐서는 역시 딸을 그만 낳았으면 하는 남아선호의 함의가 있는 작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신선 선자가 든 것은 선녀같이 어여쁜 여아가 되라는 뜻이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어찌 이모할머니 일가가 일본 규슈 오이타현으로 건너갔는지는 듣지 못했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소위 ‘본토’로 불리던 일본으로의 이주가 많았다. 이모할머니는 이웃한 홀아비 의원을 아주 맘에 들어해서 여동생의 혼처로 소개했다고 한다. 스무 살 처녀였던 할머니는 혼자 대한해협을 건너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하와이 사진신부에게 비견할 만할까,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한 처자가 그 시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달리 없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사학과 교수에게 물어보니 독립자금을 댄 것만으로는 유공자가 되기 힘들다고 한다. 일제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에게 강탈당했다고 둘러대는 경우가 많아서 자발적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란다.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지는 못해도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의 마음이 “일본 밑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 아니었을까. 대구는 1907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을 갚고자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지역이다.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하고자 하는 민중의 마음이 그래도 지정학적 열세에 있는 우리나라를 지켜왔다고 믿고 싶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고 한다. 조모들이 돌아가신 후에야 그들의 얘기를 다 들어보지 못한 것이 가슴 저리도록 속상하다. 서울을 벗어나 보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할머니가 얘기하곤 했던 ‘왜관’, ‘칠곡’ 같은 지명은 너무나 낯설었고 입시공부에 치어 가까이 있는 어른에게서조차 내 뿌리와 역사를 탐구해볼 기회를 박탈당했다. 어렴풋이 들은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우리 친가의 내력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트랜스내셔널 기조를 압축해놓은 듯 스펙터클 하다. 대구 집성촌에 살던 할아버지의 형이 조선인을 못살게 구는 일본 순사를 패고 만주로 피신했다가 강화도에 자리 잡았고, 일본에 살다가 갑작스러운 해방으로 귀국선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 일가는 잠시 대구여고 옆에 살다가 강화로 올라오게 된다. 아버지는 일본땅에서 태어났지만 ‘왜놈’을 만들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뜻으로 출생신고가 강화에 돼있다. 큰할아버지에게 편지로 출생예정일을 알려 1938년7월23일에 신고됐지만 호적에 실제 출생일은 7월29일로 기록돼있다. 일제 치하에 살아남기 위해 점령인들과 어울려 살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족의식을 잃지 않았던 증거로 남아있다. 할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가는 작은아버지에게 사촌동생이 절대 혀 꼬부라진 발음을 않도록 당부했던 것은 일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한동안 혀 짧은 발음을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      


급히 짐을 싸 귀국선을 타러 가려다 길거리음식에 홀린 아버지를 잃어버렸던 이야기, 6.25동란이 터지고 할아버지는 서울로 왕진을 가있어 연락이 끊기고 할머니는 난리통에 다 죽게 생겼다며 계란을 잔뜩 사다 삶아먹였던 얘기며. 징용 가고, 위안부로 끌려가고, 전사하기도 하고, 생으로 이산가족이 되고 했던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절을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 정도 트라우마는 아마 약과일 것이다. 이 정도 사연 없는 집안을 찾기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몇 년 전 양가 집안 얘기를 추적해서 책을 써볼까 하다가 너무 자료가 없어서 포기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전 프레시안 편집국장이었던 김창희 선배가 펴낸 ‘아버지를 찾아서(통영으로 떠나는 시간여정)’이라는 책을 보고 마냥 부러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천 군수였던 외할아버지 구봉회가 제2국민병으로 전선에 나선 군민에게 보낸 위문편지가 KBS ‘TV쇼 진품명품’에 소개된 후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무더웠던 지난여름 큰외삼촌 부부, 외사촌오빠 부부와 함께 이를 확인하러 가서 외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인민군을 피해 생사를 넘나들며 임시수도 부산까지 피신할 수 있었는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      

내 할머니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들과 동갑내기 선구자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도전적이었나를 새삼 헤아려보게 된다. 이영도를 비롯, 김향안으로 더 많이 알려진 수필가·미술가·서양화가 변동림(1916~2004), 자신이 운영하던 고급 요정 대원각을 시주해 길상사를 창건한 작가 김영한(1916~1999), 한류 걸그룹 스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시스터즈를 키워낸 가수 이난영(1916~1965) 등이 그들이다. 이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을 토로하자면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유명한 남성 예술가·문학가의 그늘을 벗어나 기억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영도도 그랬지만 김향안은 소설가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반려자로, 김영한은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지칭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들이 이룬 업적을 보면 이들이 보다 여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던 시대를 살았더라면 또 다른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부암동으로 이사하며 동네에서 가장 끌렸던 곳 중 하나는 단연 환기미술관이다. 국내 최초 개인 미술관인 이곳은 방문할 때마다 철저한 관리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김향안 여사의 유지를 받든 덕분이다. 김환기 작품이 한국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꾸준히 경신중인 이유도 김향안의 꼼꼼한 작품 관리가 꼽힌다. 김향안이 설립한 환기재단이 방대한 작품데이터를 구축하고 거래기록까지 관리해온 덕에 위작 시비가 거의 없다고 한다. 두 천재 이상과 김환기의 아내로 김향안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환기미술관은 김향안에 관한 두 차례 전시를 가졌다. 환기가 세계적인 미술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했던 김향안은 틈틈이 자신도 그림을 배우고 그려왔다.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뤘다고 하기에는 무리겠지만 개인전을 가질 정도의 실력을 함양했다. 이번 전시는 환기의 뒤에 가려져있었던 그의 작품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을엔 산 하나 너머 꽃무릇을 보러 성북동 길상사에 갔었다. 김영한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릇과 여자는 내놓으면 깨지기 마련이야”라는 인용 어구가 나온다. 일제시기 3대 미남 문인으로 꼽히며(탤런트 박보검을 연상시키는 외모다) 인기가 많았던 백석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과장과 미화가 많다는 학계의 평가가 있긴 하나, 재북작가 백석의 시가 해금된 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하는 등 그의 사랑의 힘은 세월을 뛰어넘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약된 시기 1000억 원이 넘는 대원각 요정을 일궈낸 사업가라는 면만 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집안이 기울며 16세에 조선권번에 들어가게 됐지만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해 ‘인텔리 기생’으로 불렸고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로 학구파이기도 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갔던 적이 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나 개인으로는 기자 생활 중 신윤국의 친손자를 부장으로 모시게 되면서 이 얘기를 들었다. 당대 최고 시인 백석을 상대할만한 지성을 지녔던 여인이었다고 보여진다.  (내가 썼던 기사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31114580609368&outlink=1)


‘목포의 눈물’이 대표곡인 이난영의 탄신 100주기 행사는 그의 고향이자 노래의 배경인 전남 목포에 국한된 것이 다소 아쉽다. 갓바위 목포개항 100주년 기념탑광장에 이난영 탄생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진 것도 올해 말에 이르러서다. 그의 생일이 6월6일인 것을 감안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해어화’에서 당대 최고 여가수로 잠시 등장한 것이 대중문화에 비친 그의 모습의 전부다. 뮤지컬배우 차지연이 1943년 당시의 이난영으로 분했다. 지난해 케이블채널 tvN과 종편 TV조선이 광복70주년 기념으로 공동제작한 다큐드라마 시리즈 ‘위대한 이야기’의 1화 ‘김시스터즈’가 좀 더 부각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탤런트 소유진이 이난영으로 분해 딸들과 조카를 디렉팅하고 프로듀싱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다. 실제 이난영은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사망한 후 7남매를 홀몸으로 키우면서 김시스터즈를 조련해 원조 한류를 일으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두 딸 김숙자·김애자와 자신의 친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 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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