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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Oct 20. 2016

80년대 정동길에서 보낸 학창시절

예원학교를 추억하니 내가 있더라

     

            

10대 시절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라 하는데, 나의 감성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곳은 단연 정동이다. 1985년부터 3년간 정동에 위치한 예원학교를 다녔는데 그야말로 나의 예술적 감각의 원천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는 평준화정책으로 중고교를 입시 없이 진학하던 시대고 딱히 영재교육시설도 없던 시절이었다. 거의 전국 유일하다시피 한 중학교입학시험을 치르는 예원 입시에서는 필기시험 비중이 높아서 딱히 예술을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 없이도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서울예고 출신들이 대개 예술계로 진입하나 나처럼 예원학교를 졸업한 후 인문계로 전환해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 꽤 많다. SBS 한수진 앵커는 현재 피아니스트이자 성신여대 교수인 나의 사촌언니와 함께 피아노를 전공했다고 들었다. 역시 예원학교를 나온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전 원내대표는 2015년 역사교과서 국정화저지문화제에서 피아노 연주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예원학교 미술과를 거쳐 대원외고로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딱히 미술에 대한 열정은 없었다. 당시 미술교육의 수준이라는 것이 미대입시를 위한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등 그리스로마 석고상 데생과 정물수채화로 한정돼있었기 때문에 워낙 호기심이 많아 산만한 나는 진득하게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쉬이 싫증을 냈다. 봄가을로 열리던 미술전에서 크로키나 스케치로 칭찬 받은 것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인정을 받은 일이었던 것 같다. 조립식 이젤과 화구박스를 메고 예원학교 교정, 당시 같은 재단이던 이화여교 교정, 정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야외실기수업을 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사생을 하는 것은 관찰력을 키우기에 좋은 방법이다. 지금도 그때 그렸던 풍경들이 떠오른다. 이화여고 동문 옆에 있는 낡은 한옥 대문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늙은 은행나무는 나의 첫 유화작품 소재였다. 그 앞을 지나가던 소녀시절 내 모습을 그림 속에 그렸던 것도 뚜렷이 떠오른다. 그때 당시 그냥 방치돼 닫혀있던 그 나무문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냥 그런 오래된 것들, 낡은 풍경들에 홀린 듯이 끌렸다. 지금은 그 대문이 활짝 열려있고 1999년 동문들이 세운 표지판도 서있다.      

인근 덕수궁 등지에서 매해 열리던 전국단위나 서울시주최 사생대회에서도 빠지지 않고 상을 탔으나, 상을 안타는 동기가 없었기에 별로 특별한 지도 몰랐다. 일반고로 진로를 바꾼 후 미술과 멀어졌던 나는 대학에 간 후 홀로 인사동·사간동 일대 갤러리와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이루지 못한 예술가의 꿈을 달랬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불란서문화원(프랑스문화원)’, 호암갤러리, 서울시립미술관 등이다.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설치된 망루인 ‘동십자각’ 동북쪽 길가에 있었던 하얀색 4층 건물 전체를 쓰는 불란서문화원은 70,80년대에는 선진문화의 상징 같은 거였다. 현재는 완연한 문화역사도시로 탈바꿈했지만 그때의 서울은 그렇지 못했다. 


2001년 중구 봉래동으로 이전하기 전 가끔 들러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어 영화를 영어자막으로 힘겹게 관람하던 추억이 있다. 이웃건물에는 역시 화이트 일색인 앙드레김 의상실이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같은 건물 3,4층에는 서촌에서 인연을 맺은 건축가 김원의 광장건축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사옥에 있었던 호암갤러리는 2004년 폐관됐는데 지금은 종편방송 jtbc스튜디오로 쓰인다. 한동안 jtbc ‘시청자의회’에 출연하며 옛 추억을 더듬어보기도 했었다. 서울고가 강남으로 이전해간 터에 지금은 경희궁이 복원됐는데 궁내 현 경희궁미술관에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섰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인데 어떻게 정보를 얻었었는지 이곳에서 열리는 무료미술강좌를 들으러 다녔던 기억도 난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 건물은 본래 대법원으로 쓰였다. 법원으로 이혼을 하러 오는 길에 덕수궁 돌담길이 있어 이 길을 걸으면 이별한다는 속설이 생겼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 그 길 끝에는 ‘광화문연가’ 등 이문세가 부른 주옥같은 노래들은 작사·작곡했던 고 이영훈의 추모비가 서있다. 한시대의 풍미했던 음악의 창조했던 그의 말년을 생각해보면 창작자에 대한 열악한 국내 대우가 떠올라 가슴 아프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국비유학 외에는 해외유학생이라고는 드물었고 뺑뺑이로 배정된 주변 학교에 가서 동일한 교과서로 표준화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사회에서 그같이 자유로운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큰 혜택이었다. 교육과정 중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가며 작문을 발표하는 시간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 방학에는 한국문학30권을 지정한 권독리스트를 줬는데, 본래 독서를 좋아하긴 했으나 그 방학동안 그 책을 다 읽고 문학에 빠져 결국 국문과로 진로를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됐다. 80년대만 해도 우리집에서는 부부간 성별분담이 여전하던 때라 시계 이상의 고가물은 무조건 아버지가 구입해다 줬다. 아버지가 청계천인근의 헌책방에서 30권의 책을 모두 구해줘 통독했다. 성적 향상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진 못했으니 당시 주입식교육과 사지선다형 시험방식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학습이었던 건 분명했다.   

   

개화기 외교중심지였던 정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나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그 거리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기억은 지금도 풍요롭게 남아있다. 지난해 서울 중구청에서 시작한 ‘정동야행’ 축제를 빌어 30여년 만에 예원학교 교정과 교사에 들어가 봤는데 예전의 추억의 고스란히 떠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예원 교사의 상징은 이름처럼 둥근 정원이다. 그 정원도 여전한데, 한 귀퉁이에 있는 거북모양의 큰 돌도 그대로다. 이 돌이 거기 놓이게 된 연유를 모르는 동문들이 대부분일 테다. 내가 재학할 당시 우리학년으로 편입한 어느 부잣집 여식의 부모가 기증한 정원석이다. 이 학교는 학부모들의 기부금을 많이 받는데, 해외유학을 떠난 빈자리에 편입하면서 당시 돈 3000만원과 이 돌을 기증했다고 들었다. 시청과 정동 일대를 지나다보면 교복을 입은 후배들과 종종 마주치는데 그 시절이 떠올라 꽤 반갑다. 나는 교복자율화세대라 사촌언니 교복을 입어봤던 경험밖에 없다. 지금도 하복 교복은 과거와 똑같은데, 선생님들 말로는 프랑스에 있는 어느 예술학교 교복을 본 따 온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봐도 세련미가 넘친다.       

지금은 공원화되고 역사적 설명을 담은 표지를 세워 근대문화유산 1번지라 할 수 있는 정동의 역사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개발독재의 연장선에서 국정교과서로 일괄 교육을 받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그런 생생한 역사를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나보니 학창시절을 보낸 그 거리가 엄청난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 땅위에 서있으면서도 그 땅이 역사책에 나오는 현장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책상머리에서 이뤄지는 우리 교육의 한계가 이런 것일 테다. 지금은 예원에 구교사 남쪽 사이드에 있던 베란다가 사라지고, 새 교사로 이어지는 복도가 됐다. 당시 그 베란다를 통해 내다보면 미대사관저 안에서 경작하는 밭에 스프링클러가 돌아가곤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밭은 여전했다. 당시 그 위치에서 이국적 형식이 흰 탑이 보이는 것을 난 항상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국사교과서를 보니 그 탑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어서 깜짝 놀랐다. 고종이 아관파천시 피신한 구 러시아공사관이라는 것이다. 당시는 냉전시대라 적대국가인 소련, 중공, 북한 등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러한 역사적 유적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도 아무도 없었고 그 자리도 그저 방치돼있었다. 지금은 깔끔하게 공원화된 것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은 초고층빌딩이 많이 들어섰지만 80년대에는 정동아파트만 해도 상당히 눈에 띄는 건축물이었다. MBC가 정동사옥에 경향신문사와 함께 있었고, 문화방송체육관이 지금의 정동공원 맞은편에 있었었다. 공개방송이 있는 날이면 ‘날날이’ 중고생들이 입장을 위해 한없이 줄을 이루고 있다가 연예인이 지나가면 소리를 질러댔  다. 그 언덕 일대는 대개 게딱지같은 집들이 들어찬 산동네였던 기억이 난다. JTBC 보도담당 사장인 손석희 옹이 꽃미남 라디오DJ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구가하던 때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남자 키 178cm는 상당히 늘씬한 키여서 여학생들이 보던 잡지에 전신사진이 실리곤 했다. 손석희 앵커와는 그가 MBC에 재직하던 시절 방송담당기자로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기사에 그가 인기 DJ였던 점을 상기시킨 것이 인상 깊었는지 손석희 앵커가 감사하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지금은 평창동에 살며 우리 집 맞은편 길에 있는 세검정성당에 다닌다는 얘기를 동네 소식통에게 들었다.      

정동답사를 하다가 들은 얘긴데, 구 소련과 수교한 후 구 러시아공사관 자리에 대사관을 짓겠다는 것을 미국 측이 반대해 현재의 위치(구 배재고 터)에 들어섰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사적지로 지정된 곳이라 반환할 수 없다고 했지만, 담장을 맞대고 있는 미국대사관저에서 도청 등 보안상의 문제를 들어 결사반대했다고 전해진단다. 분명히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이 언덕이 지금은 상당히 깎여져나갔지만 상당히 가파른 고갯길이었다는 것이다. 옛 신문을 찾아보니 한양은 본래 평지가 아니라 산으로 둘러싸여 그 지맥들이 둔덕을 이룬 곳이 많았다고 한다.      


예원학교는 서울예고의 중학교 과정으로 1967년 개교했고, 서울예고가 76년 평창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정동교사를 함께 썼다. 내가 졸업한 직후 재단이 분리됐지만 본래 이화여고와 같은 이화학원 소속으로 이화예술고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개교 후 10년간 이화여고 내에 교사가 있어서, 미술전공 남학생이 한명 입학하자 이화여고생들까지 와서 구경을 하느라 난리였다는 어느 선생님의 추억담을 들은 적이 있다. 예원학교 부지는 워낙 좁아서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달려도 70m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풍경화 실습이 있는 날이면 학교 밖으로 사생을 나가곤 했다. 같은 재단 하에 있으므로 이화여고 교정에 가서도 이젤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던 기억이 난다. 미술을 전공하다보면 확실히 관찰력이 는다. 지금도 직접 그렸던 그 주변일대 풍경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의 첫 유화작품은 이화학당 옛 대문과 그 옆에 서있는 고목이다. 지금은 제대로 복원돼 푯말까지 세워져있지만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게 뭐라고 얘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거기 있는 한옥의 흔적이 신기해서 그렸다. 금빛액자까지 맞춰서 전시했던 그 그림은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예원학교 교정이 워낙 작다보니 주변 신세를 많이 졌다. 봄·가을로 있는 운동회와 축제 등은 서울예고로 가서 치렀고, 성가대회는 이화여고 내 유관순기념관에서 개최됐다. 매주 금요일 오전 있는 채플예배는 정동교회에 가서 드렸다. 정동제일교회가 얼마나 유서 깊은 유적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또 하나, 평창동에 있는 서울예고를 가려면 분명 지금 내가 사는 부암동을 지났을 텐데 그냥 지나가는 길이였을 뿐이어선지 기억은 전혀 없다. 하긴 신문사 시절 꼭 부암동에 있는 중국음식점 하림각(현 AW컨벤션센터)에서 밥을 먹자는 취재원이 있어 몇 번 와봤고, 예식장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찜질방으로 부서 MT를 온 적도 있는데 여기가 부암동이라는 지명을 가진 것은 전혀 몰랐으니 말 다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30년 전의 정동과 광화문 일대의 전경을 지금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린 ‘쌍8년도’ 보다 전의 일이니 말이다. 구도심도 소위 ‘정비’가 덜 돼서 허름한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 풍경이 지금도 몹시 그립다. 정규수업시간이 끝난 후 미술실기실에서 레슨을 받을 때면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가슴깊이 울림이 왔다. 지금은 이화여고 뒤쪽도 높은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차 스카이라인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멀리 언덕이 보이는 형세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큰나무가 우뚝 서있는 위로 초저녁별이 솟아오르던, 그 어스름이 깔리던 하늘은 오랜 그리움으로 남았다. 지금도 해질 무렵 소슬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쪽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던 짙은 하늘이 생각나며 쓸쓸한 감성에 젖곤 한다.     

 

당시 소위 착실한 학생들이 그렇듯 나의 생활범위는 학교와 집이 있던 반포를 오가는 것이 다였다. 미술레슨이 없는 날이면 구반포에 있는 화실에 다녀야했으므로 당시 그 일대를 더 둘러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그래도 집에서 먼거리에 있는 도심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나의 지리감각은 많이 발전한 편이다. 연년생인 남동생은 대학에 진학해 처음 강북에 와보고는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냐”며 놀라워했다. 서울은 다 강남처럼 정돈된 아파트가 들어서고 바둑판처럼 대로가 나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내 기억 속의 사대문 안은 등하굣길에 접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는 아버지가 출근길에 승용차로 데려다줬고, 하교할 때는 좌석버스를 탔다. 당시 좌석버스 요금이 350원이었는데 10장에 3300원하는 버스표를 구입해 다녔다. 차창 밖 풍경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반포대교를 건너 용산으로 들어서면 철조망이 쳐진 높은 담장이 한참 이어졌다. 미8군 기지다. 군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많이 오가는 것을 구경했다. 남산3호터널을 지나 소공로를 거치면 서울시청과 프라자호텔 사이에 만국기가 펄럭이던 동그란 교통섬이 있었다. 서울광장이 없던 시절이다. 그 옆 도로를 따라 덕수궁 옆길로 진입하면 대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오고 정동교회가 있는 길로 들어서면 학교가 나왔다. 터널이 너무 막힐 때는 경사진 남산 소월길을 통해 우회해 갔던 것도 기억이 난다. 노오란 아침햇살 속에 빛나던 그 정경이 선연하다. 당시에는 여전히 장독에 김장을 하는 집이 많아서인지, 그길 초입에는 커다란 배불뚝이 장독들을 잔뜩 쌓아놓은 독파는 가게가 있었다.      

집에 가는 좌석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동방프라자(현 삼성생명)나 광화문네거리(현 세종로사거리)까지 걸어 나와야했다. 학교에서 정거장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는데, 신문로를 쭉 따라나오거나 덕수궁 돌담길을 거치거나 혹은 MBC체육관이 있던 산길을 가로질러 나와 국제극장(현 동화면세점) 앞에서 타기도 하고, 배재학당 옛터가 있던 골목을 거쳐 서소문길로 나와 동방프라자 앞에서 타기도 했다. 여중생이 화구박스 등 미술도구들을 모두 들고 다니기에는 좀 버거웠던 거리였던 것 같긴 했지만 그 하굣길에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80년대 중반 신문로에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던 떡볶이가게가 있었고 그 일대에서 ‘십대들의 쪽지’라는 청소년계도발행물을 무료로 나눠주던 기억도 난다. 내가 주로 갔던 곳은 서점과 화방이었다. 교보빌딩에 대형서점이 생겼지만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이라 10%이상 책값을 할인해주는 중소서점을 애용했다. 모닝글로리라는 한국최초의 팬시문구업체가 교보문고에 입점했던 것도 기억한다. 당시에는 서점이름이 새겨진 종이로 책을 싸주는 것이 유행이라 그것도 참 좋았다. 학생들이 많이 찾는 큰 화방도 있었지만 나는 ‘예삐화방’이라는 작은 화방을 좋아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예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톰보이4B연필과 미술용지우개, 알파물감, 화홍수채화붓 등과 각종 미술재료를 샀다. 한국 미술용품의 품질이 좋다고 할 수 없을 때라 일제 홀바인물감을 쓰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데생용 연필과 지우개만 할 수 없이 일제를 썼다. 국산품애용 애국교육을 받은 영향이 컸다.      


신문로일대 모여 있던 책방과 작은 가게들을 재개발사업으로 모두 사라졌다. 85년 국제극장이 공사용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것을 본 것이 신문로지구 재개발의 시작이었나 보다. 얼마 전 강북삼성병원 인근에서 의수가게 하나를 발견하고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강북삼성병원은 본래 고려병원이었고, 그 주변거리에는 의수·의족가게가 유난히 많았다. 80년대만 해도 한국전쟁 참전 상이용사들이 많이 생존해있을 때라 제법 장사가 잘 됐나보다. 베트남전(월남전)에서 부상당한 군인들도 있고 지금처럼 외과수술의 수준도 높지 않았을 때라 절단 장애인의 수도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들은 대개 사대문 안에서 시작됐으므로 이 일대는 명문학교 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화여고, 창덕여중 정도만 남아있고 명문고 강남이전 정책에 따라 신축교사를 지어 옮겨간 학교들이 많았다. 미 대사관저 옆에 있던 경기여고는 내가 예원학교를 다닐 때까지 남아 있다가 88년 개포동으로 이전했다. 당시 미소년 같아서 인기가 많았던 예원 선배 하나가 경기여고로 진학했는데 “곧 강남으로 옮겨갈 예정이라 일부러 경기여고로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빈터로 남아있는 부지는 본래 덕수궁의 일부였다고 한다. 개화기 무렵 세워진 신식학교는 당시 왕실의 지원을 받아 국유지라 할 수 있는 왕실소유의 땅에 많이 지어졌다.  덕수궁의 본래 넓이는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3배가량이었다고 한다. 덕수궁 내 안내판을 보면 예원학교 터도 본디 덕수궁의 일부였다. 2010년 복원·개방된 중명전이 그 위치에 있는 지 아는 이가 없을 정도로 다들 사적은 잊다시피 하고 먹고살기 바빴으니 이 역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예원에 다닐 때는 운동장에 담이 없고 일반주택지와 터져있어 그 사잇길로 나다녔는데 그 길목에 중명전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다만 높은 철제대문이 떠오른다.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선 난 이구가 소유하고 있다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은행에 저당이 잡혔고 1977년 일반에 매각돼 사무용 건물과 주차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한때는 패션업체가 들어서 바닥에 의류원단이 가득 쌓여있었다는 증언도 들었다.      

구 경기여고 부지를 구입한 미국이 미대사관직원아파트를 짓겠다고 했었는데 서울시의회와 시민단체의 반대로 2011년 선원전 터를 되찾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덕수궁 정비사업을 벌여온 문화재청은 2039년까지 이곳에 있던 선원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 53동, 배후 숲인 상림원(상림원은 현재 정동근린공원 맞은편에 경향신문사가 세운 도심형 실버타운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등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경희궁은 본래 다리 하나를 두고 덕수궁과 붙어있었다고 한다. 경희궁 자리에 있었던 서울고는 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해, 이 자리도 공터로 비어있었던 기억이 뚜렷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 자리에 삼성에 버금가는 사옥을 지으려다가 서울시가 사적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경희궁을 복원하겠다는 것이 서울시의 계획으로 몇몇 시설이 새로 지어졌으나 현재는 재정문제로 중단됐다고 한다. 선교사가 설립한 국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고는 84년 강동구 고덕동으로 옮겨갔다.   

   

나는 ‘배재 할아버지’를 잊을 수 없다. 부잣집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예원학교 앞에서 항상 구걸하던 그 할아버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등을 배출한 명문 배재고를 나왔다고 해서 배재 할아버지라고 불렸다. 신교육을 받을 정도로 배운 사람이었지만 그가 왜 걸인이 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는 식민과 전쟁을 겪고, 독재정권을 지나며 시대에 희생된 사람들이 많던 때였다. 항상 웃는 얼굴이어서 그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다들 재밌어했다.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고 ‘미술’이라고 하면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미술 전공자들이 가장 돈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악기나 무용 전공이 돈이 훨씬 많이 든다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인 하나하나의 사연이 사무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세상에 없을 그의 얘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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