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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Aug 01. 2016

사찰과 교회가 나란한 ‘기도발’ 동네

다운시프트를 통해 건진 이야기가 있는 삶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서 북악산과 인왕산이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뛴다. 멋대가리 없이 치솟은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싸인 스카이라인만 보고 살았는데 구불구불한 산등성이가 이어지는 풍경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일상에서 이렇게 자연물을 보고 한껏 마음이 설레는 것이 얼마만인가. 기자 초년생 시절 석간신문사를 다니며 꼭두새벽 출근할 때 88올림픽대로를 달리며 보랏빛 여명과 때맞춰 피어나던 꽃봉오리들을 마주하던 때 이후로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회사인간’보다 더한 ‘기사노예’가 되면서 무언가를 향유할 짬도 없이 살았다.      


부암동은 ‘시은(市隱)’에 적절하다. 선조들 중에 세상 속에서도 은자의 즐거움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는데 나에게는 세상(앞의 세상과 한자가 다르다)을 관조하기에 딱 알맞은 거리다. 차를 없애고 이사를 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다운시프트를 하며 나는 주변을 돌아다볼 여유가 생겼다. 항상 마감에 쫓기며 앞만 보고 내달리며 메말랐던 나의 감성이 서서히 살아나는 조짐이다. 언론인들의 평균수명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항시 시간에 매여 취재할 일과 데드라인에 맞춰 써야 할 것들이 머릿속에 그득한 채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얻은 것도 많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적지 않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북악산 단봉도 잘생겼지만 인왕산을 이루는 우뚝우뚝한 바위들을 보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암석이 주는 기운이 강렬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애니미즘이 생겨났을 것이다. 나는 도심에서 부암동 집으로 향할 때마다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느꼈을, 그러한 신령한 힘을 느낀다.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을 축적하고 있는 자연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기술문화가 자연을 정복한 것이 거의 한 세기 정도, 서울 장안에서도 인왕산 호랑이가 두려워 밤 외출을 못했다니 아마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 대개의 인간이 정령신앙의 자장 안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 부암동의 이름도 소원을 빌던 부침바위에서 나왔다니 말이다. 인간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왜소했을 때는 사람들은 그렇게 만물에 기원하며 마음에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나 큰돌을 쪼아 만든 석물,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들에 마냥 끌리는 것은 이렇게 우리 의식에 이어져 내려오는, 세월을 뛰어넘은 거대한 자연물에 대한 경이와 동경이 잠재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건너 여전히 형태가 남아있는 석상, 오랜 역사의 흐름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큰나무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족된다.    

  

강남은 기독교의 세계다. 우리 고유 신앙과 섞이며 토착화된 불교는 신학문을 익힌 세대에게는 왠지 낡고 구차하게 느껴졌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는 왠지 더 합리적이고 세련되게 여겨졌고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으며 기독교 신앙은 많이 교육받은 젊은 세대들이, 불교는 낙후된 동네에서 믿는 종교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은연중에 자리 잡았다. 유서 깊은 집안들이 불교를 고수한다는 것도 잘 몰랐고, 우리 부모 또한 기독교가 유입된 지역에서 자란 데다가 강남에서는 개신교 교회를 통해서 커뮤니티가 이뤄지곤 해서 딱히 신자가 아니더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상숭배를 금기시하는 유일신 종교는 타 종교를 배척하게 했고 저속한 말로 폄훼하기도 했다. 사실 신종교는 개척교회라는 명목으로 새로 생긴 지역에 퍼지기 좋았다. 강북으로 오니 절들이 곳곳에 박혀있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오래된 절 안에는 산신당, 산령각이 있는 것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사찰들이 산으로 옮겨오게 되며 산악숭배를 하는 민간신앙을 자연스럽게 흡수한 것일 테다. 자연에서 느껴지는 영험한 기운을 의인화한 것이 산신이겠지. 절들 안에 모셔진 산신상을 구경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포크아트(민속예술)의 전통이 배어있는 그림과 장식물들의 해학미가 즐겁다.      

20160609 세검초 내에 있는 신라시대 장의사지 당간지주. 사찰입구에 세워 당(불화깃발)을 걸어두는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알고 보니 북한산 일대는 대대로 ‘기도발’이 잘 받기로 유명했단다. 세검정초등학교 안에 장의사지 당간지주(불화를 걸기 위한 기둥)가 남아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장의사는 신라 무열왕 6년(서기 659년) 백제와의 통일전쟁에서 전사한 두 화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질 불교 사찰이다.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왕실의 후원을 받던 절이라, 창의문은 장의사의 이름을 따 장의문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조선시대 한양의 4대 비보사찰로 꼽히는 승가사도 빼놓을 수 없다. 568년경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순수비 중 북한산비가 있는 비봉에서 1km쯤 떨어져 있는 비구니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의해 한양의 지기를 보완하는 사찰로 지정돼 국가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평창동 천제단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다. 조선시대 세금으로 온 곡식들을 저장하는 창고인 '평창'이 동이름의 유래가 됐다. 지금은 바위 흔적만 남아있다는데 평창고를 건립하면서 부터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보현산신각과 럭키평창빌라 인근의 부군당 신목(180년된 소나무) 등 주민들이 산신제를 지내온  마을 사당의 흔적도 남아있다. 오랜 전설과 신화가 살아 전승되는 현장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 신영동 부군당에서는 올해도 음력 8월 30일 제를 올렸다는데, 내가 사는 부암동에서는 몇 해 전 제사를 맡았던 동네 주민이 타계하며 명맥이 끊길 위기에 있다. 


그러고 보면 북한산 자락에는 온갖 종교가 몰려있다. 온라인 지도에 다 표시되지 않을 만큼 많은 절, 교회, 성당과 관련 시설인 기도원과 여러 수도회, 수녀원 등이 뒤섞여 있다. 자하문터널 남쪽 출구에 보이는 흰 건물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데, 이것이 통칭 ‘몰몬교’다. 간혹 샤먼과 신흥종교도 보인다. 부암동과 홍지동 경계에는 절과 교회가 담장을 맞대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황륜사의 범종과 창의문교회의 십자가가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면, 우리 종교계도 저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부처님오신날 다는 연등이 예전에 분홍색 일색이던 것에서 요즘은 빨강, 녹색 등 갖가지 색이 섞였다. 석가탄신일을 전후에 밤에 화사한 연등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초여름에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요즘 서울시는 ‘600년사’를 넘어 ‘2000년사’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서울600년사’를 ‘서울2천년사’로 증보·수정 중이다. 1990년대 이후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성백제(BC18년~AD475년)의 도성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2성체제로 규정한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은 아니지만 도읍지가 있던 송파구가 현재는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만큼 서울의 역사를 그만큼 올려 잡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대학 때 ‘제1회 한성백제여왕 선발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데도 이렇게 고대사에 무심했다니 반성의 여지가 크다. 2010년에는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캠퍼스에서 통일신라시대 석실분이 발견돼 화제가 됐는데 한양도성 내에서 발견된 첫 신라고분이라고 한다. 명동 땅 밑에 금광이 있다 해도 파낼 수 없다고 할 만큼 땅값이 금값보다 높은 시대에 어떤 역사적 흔적이 땅 밑에 묻혀있는지 지금에 와서는 다 파악할 순 없다. 하지만 서울시는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삼성동토성을 시굴 조사해 2000년 역사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입장이다. 역사학자들이 잃어버린 고리들을 잘 이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20150930 청운동과 부암동 경계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내 쪽 풍경. 남산을 위시한 능선이 고스란히 보인다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이 꼭 미래시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과거의 역사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됨에 따라 새롭게 쓰여질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있다. 최근에서야 용산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보고는 내가 고교를 졸업한 후에 발굴된 유물이 다수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울시내 박물관·미술관이라야 중앙청 같이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관청건물이나 용도 폐기된 기무사 건물, 덕수궁 석조전 같은 곳을 개조한 데를 주로 다녀봤던지라, 애초부터 박물관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위용과 쾌적함에 우선 감탄했다. 무엇보다 재교육, 평생교육을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흑백사진이 실리던 교과서 시대에 학교를 다닌 이들이라면 이 곳에 전시된 그 이후 출토품들을 본다면 이 땅의 역사성과 선대 문화의 위대함과 다채로움을 좀 더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의 어느 건물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역사성을 띄게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600년 조선도읍,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 그 전에도 사람이 살던 흔적과 보존된 자연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사는 곳 일대를 타박타박 걸어 다니며 과거의 지형을 상상해보곤 한다. 구불구불한 길은 예전의 물길 가는 데를 복개해 만들었고, 사람 편하라고 깎기 이전에는 높은 언덕이나 고개였거나 아예 길이 나지 않았던 곳도 많았을 터이다. 곳곳에 졸졸 소리를 내는 개천이 흐르고 그 위를 작은 다리를 세우거나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을 터이다. 지금은 모두 도로가 생기며 사라졌지만 이름만은 남아있는 곳들이 꽤 있다. 세종음식문화거리가 된 금천교시장, 통인시장 맞은편의 자교교회, 광화문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있는 종교교회 등이 그것들이다. 자교는 자수궁교, 종교는 종침교의 줄임말이다. 다리가 있던 조선시대 생긴 유구한 연원을 짐작할 수 있다. 두 교회 모두 1900년 시작된 ‘잣골교회’의 후신으로 110년 정도의 역사를 자랑한다.      

따지고 보니 우리집은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자락이 모두 만나는 곳에 있다. 자하문터널을 뚫고 2m에 달하는 부침바위를 깨버리고 널찍한 길을 내기 전에는 산 틈 사이로 난 오솔길이나 있었을 것이다. 창의문옛길 역사문화로로 조성된 창의문을 나서면 바로 나있는 가파른 고갯길을 봤을 때 사람이 많이 다니기 힘든 지역이었을 것이다. 대신 경치는 좋아 왕가나 유력 양반가의 별장지 노릇을 톡톡히 했다. 창의문밖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배경이라고 하고, 창의문 도성 안쪽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의 소재다. 그림 속 풍경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종로구에서는 벌써부터 안내판을 설치하고 탐방코스도 내놨다. 이렇게 역사공부가 재밌어질 줄은 몰랐다. 연도 숫자 맞추기에 집중된 고루한 국사 교육에 흥미를 잃을 데로 잃은 후였다. ‘살아있는 교육’, ‘죽어있는 교육’이라는 비유를 만날 쓰지만 정말 생생한 역사의 터전 위에 살면서도 교과서에 나오는 선조들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했던가. 이 땅에 이렇게 자부심과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은 진정, 처음인 듯싶다.    

   

집 밖을 나설 때면 예전에 없던 가벼운 설렘이 찾아든다. ‘빨간머리 앤’이 얘기했던 길모퉁이 뒤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희망 같은 느낌이랄까. 골목 끝에 무엇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들뜸이 내가 얼마나 삭막한 아파트촌에서 자랐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규격화된 모양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네모난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자연은 풀잎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제 향할 대로 향한 나뭇가지의 예술적 뻗침 하나하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새가 없다. 쏴하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가볍게 살랑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온이 찾아온다. 부암동에는 한국최고 낙찰액을 자랑하는 김환기 화백의 환기미술관이 있는데,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것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랐더라면 이렇게 한국 산줄기의  능선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곡선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괴감 같은 감정이다.      

자연이 주는 치유력에 반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권에 속하게 됐다. 우리 집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은 1986년 개통된 자하문터널을 지나거나 부암동주민센터를 지나 서촌을 거치는 길 뿐이다. 서촌은 나에게는 도시로 들어가는 초입처럼 옛것과 현대적인 것이 뒤엉켜있다. 강북권을 오가기 위해서는 터널이 뚫리기 이전에는 산골짜기였을 세검정로를 위시로 한 차도를 주로 이용하게 됐다. 여전히 나무가 풍부해 드라이브라도 나선 듯 상쾌하다. 다니는 이들이 제한적이라 막힐 일도 별로 없다. 영인문학관, 가나아트센터 같은 문화시설이 몰려있는 평창동도 자주 드나들게 됐고, 북악터널(1971년 개통)을 통해 정릉 쪽으로 나서거나 구기터널(1980년 개통)을 통해 은평구를 오간다. 신촌이나 마포에 갈 때도 세검정에서 버스를 타고 홍제천을 따라 생태길을 구경한다. 대학을 다닌 성북구나 대학원을 다닌 서대문구, 기자 시절 대부분을 살았던 마포구를 쉬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참 좋다. 게다가 이들 동네들은 요즘 마을만들기와 도시재생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 각종 주민참여형 문화활동이 벌어지고 있어 이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소속감을 느끼기에도 제격이다. 데이트코스로 유명한 북악스카이웨이를 타면 차로 15분 만에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 등에 갈 수 있다. 성북구는 마을여행과 스토리발굴에 선도적인 곳으로 볼거리가 많다. 사람이 오래 살았던 곳에는 곳곳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

20150829 청운초등학교 쪽에서 본 인왕산 치마바위. 일제강점기  '동아청년단결' 등의 글자를 새긴 것을 1950년 서울시에서 삭제공사를 벌여 긁은 자국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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