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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Jul 13. 2016

부암동에서 생긴 일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그러니까, 부암동주민센터가 있는 곳은 시골 동네로 치면 읍내 같은 곳이다. 동사무소라고 불려야 더 어울릴 듯한 이 아담한 건물 주변으로 이 동네 주요 시설이 몰려있다. 돈이 많이 없는 나는 부암동에서도 별 전망 없는 세검정으로 향하는 대로 주변에 세 살기에, ‘읍내’로는 정말 나들이 삼아 나가야 한다.      


지난 5월 동네 중심지를 돌아보다가 무계원 일대가 공사판이 된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익선동에 있던 유명 요정 ‘오진암’을 안평대군의 별장지 무계정사 인근으로 옮긴 것이 무계원이다. 조선말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었다는 오진암 한옥은 이곳에서 전통문화공간으로 멋들어지게 재탄생했다. 그런데 무계원 뒤쪽으로 꽤 육중해 보이는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공사 가림막이 무계원을 내려 누르듯 쳐져있는 것을 보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에 좀 짜증이 났다. 동네가 유명해지면서 개발 붐이 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인양 여기저기 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 이용이 세운 무계정사지에는 그가 직접 썼다고 달려진 ‘무계동’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와 함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터에 있는 한옥은 후대에 지어진 것이라는데 개인이 매입해 수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현진건의 집터에 세워진 표석 뒤는 수풀이 우거진 공터였는데 뭔가 공사가 이뤄지려는 듯 철판으로 둘레를 모두 감싸 놓았다. 보도를 찾아보니 현진건이 살던 고택은 서울시가 문화재 지정을 거부하면서 폐가로 방치되다가 민간 소유주에 의해 2003년 철거됐다고 한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20160630 민중화가 김봉준 화백이 부암동주민센터 앞에서 인왕산호랑이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쳐보이고 있다. 왼쪽에 서있는 이가 현경 유니온신학대학 교수다.

통인동 ‘이상의 집’만 해도 문인 이상이 살았던 집터의 일부로 알려진 곳일 뿐, 현재 있는 한옥은 이상이 떠난 후 지어진 집이다. 이상은 이 곳 본가에서 23살까지 살았다는데 그의 대표작이 쓰여진 터도 아니다. 인근 누상동 ‘윤동주 하숙집’ 역시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 하숙했던 소설가 김송의 집터라고 밝혀졌다. 하지만 본래의 집은 흔적조차 없다. 윤동주는 여기서 1941년 5~9월 4개월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방학을 제외한 실제 거주기간은 2개월 남짓이라고 파악된다. 이 집 대문 안내판에 붙어있듯이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쓰였다는 것도 고증이 틀리다. 윤동주는 자기 작품에 꼼꼼히 집필일을 적어 놓았는데, ‘자화상’은 1939년 9월, ‘별 헤는 밤’은 1941년 11월 5일 날짜가 붙어있다. ‘또 다른 고향’만이 1941년 9월이라고 기록해 이 즈음 창작했다고 볼 수 있다. 아침에 인왕산 산책을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청운동에는 ‘윤동주 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들었는데 윤동주가 하숙집에서 걸어서 이 위치까지 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유족과의 협의 없이 진행된 이 사업은 이 때문에 잡음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처럼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문인 현진건의 집은 경우가 다르다. 현진건이 1937~1943년 직접 살았던 작가의 숨결이 배인 곳이다. 건물 자체가 문화재적 가치가 없었을지는 몰라도 지켜야 할 의미는 충분했다. 같은 언론인 출신인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를 개척한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도 뚜렷하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맡았을 당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1년의 옥고를 마치고 출옥 후 그는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다. (부암동이 대학로 등 다른 동네 번화가에 분점을 낼 정도로 치킨집으로 유명해진 것과 왠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기자를 그만둔 후라 좀 여유가 생겼는지 이 집에서는 장편 ‘무영탑’과 같은 긴 호흡의 역사소설을 썼다.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일장기 말소사건’ 관련자인 데다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친일문학에 참여하지 않은 꼿꼿한 민족문학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점, 일제 하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은 작품의 의미 등을 생각해봐도 2005년에서야 광복절 서훈으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몸소 살았던 고택이 2003년까지 남아있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보전만 잘했더라면 서촌에 있는 문인 기념지와 비할 바 아닌 기념공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국문학도 출신 언론인으로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프다. 2015년 10월 기사에 따르면, 안평대군의 집터와 현진건의 집터가 포함된 4개 필지가 감정가의 81%인 34억 100만 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20160514 무계정사지에 위치한 한옥이 개인에 의해 수리중이다. 축대 아래 쪽이 현진건 집터다.

얼마 전 참다못한 부암동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슬로 타운(Slow Town)’ 부암동에 기업형 다세대·다가구주택 공사들이 시작되면서 망가질 위기에 처해있다며 주민공청회를 한다는 공지가 온·오프라인으로 퍼졌다. 6월 30일 오후 부암동주민센터 앞에 모인 이들은 ‘부암동은 살아 숨 쉬는 철학이다’라는 퍼포먼스와 시위를 벌였다. 민중화가에서 신화예술가로 변모한 김봉준 화백이 즉석에서 인왕산 호랑이를 그리고 주민들은 그 그림 주변에 자연과 이웃을 지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글귀를 각자 적었다.     

 

학자와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 줄은 들어 알았지만 현장에 가보고 ‘부암동 지킴이’의 공동대표를 맡은 이들이 저명한 이들인 것에 놀랐다. 내가 눈꼴시어했던 무계원 뒤 지어지고 있는 다가구주택의 왼쪽 집에는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최초로 뉴욕 유니온신학대학 종신교수가 된 현경(정현경) 교수가, 오른쪽 집에는 도자기 작업으로 유명한 이수경 작가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개인적 인연은 없지만 익히 알고 있었던 이들이었다. 현경 교수는 2002년 내가 존경하는 세계적 여성주의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방한 시에 초청자로서 대담할 때 본 적이 있었고, 이수경 작가의 작품은 리움미술관 등에서 접한 적이 있었다. 깨진 도자기 파편을 24K금박 등을 이용해 이어 붙인 작품 ‘달의 이면’을 보고 관람객 중 하나가 “저 금값만 해도 얼마나 비쌀 거야”해서 인상에 깊이 남았다.      


부암동에서 자그마하면서도 가장 예쁜 집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집이 현경 교수 자택인 것을 알고 ‘역시나’ 했다. 하얀 외벽에 새빨간 차양을 치고 같은 색 파라솔이 세워진 아담한 정원, 대문 옆에는 화구박스에 ‘까사 마고(Casa Mago)’라고 새긴 문패가 걸려있었다. 감각적인 외양에 ‘마고의 집’이라는 당호를 보니 뭘 좀 아는 사람이 주인인 것 같아 누군지 참 궁금했었다. 마고는 마고할미로 불리는 우리 신화의 여신이다. 천지창조신화에 나오는 마고 등 이 땅의 여신들에 대해 석사논문을 쓰려했던 것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그 논문은 아직도 쓰지 못했지만. 지나다닐 때마다 인기척이 없는 것이 의아했는데 미국에서 가르치는 현경 교수가 방학 때만 귀국해 지내는 곳이었다.      

20160630 부암동 주민들이 김봉준 화백이 써준 글이 새겨진 팻말를 들고 지신밟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사실 개개인으로 단독 거주하는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뭉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동네만들기’, ‘골목지키기’ 같은 모임에 가보면 원주민보다는 외부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들어온 활동가가 주동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부암동지킴이’는 추진력이 있는 현경 교수가 돌아오면서 주체가 된 듯싶다. 공청회에는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김병애 부암동사랑모임 회장, 박방영 부암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 대표 등을 비롯해 80여 명의 동네 사람들이 참석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부암동의 원주민들과 새 건물을 지어 들어오는 건축가들이 팽팽히 맞섰다. 분위기와 환경을 중시하는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 주축이 된 모임과 효율성을 앞세운 Y건축사 측은 애초부터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부암동지킴이 측은 기업형 다세대주택 공사를 ‘미학적, 철학적. 정신적 폭력’이자 ‘건축 테러리즘’이라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Y건축사 측은 “공동대표 2명과 이사 1명이 함께 살기 위해 짓는 집”이라고 주장하며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공사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공동주택에 세 들어 사는 나는 발언권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나도 글을 쓰는 입장이라 심정적으로는 부암동지킴이 측의 편이 됐다. 정신적인 인간들 중에는 유난히 예민한 성정을 지닌 이들이 많아서, 인근에 사는 어느 작가가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세상의 통념, 특히 개발 본위 국가 한국에서는 법만 어기지 않는다면 건축주가 짓고 싶은 대로 짓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다 보니 도시 전체의 조화는 완전히 망가졌다. 구역마다 계획적으로 전반적 경관을 고려해야 하는데 일단 최대의 이익이 나는 쪽으로 욕심을 담은 건물들이 뚝딱뚝딱 지어 올려진다. 사회주의 배경을 지닌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의 시각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을 문득 깨닫게 해준다. 건축 시 인접 건물의 양식을 고려해서 상호적 어울림을 생각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앙상블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 미관 훼손은 범죄나 마찬가지인데 한국인들은 보존가치에 완전히 무감각화됐다는 지적이다.      


신축 건축물의 바로 양 옆집에 사는 현경 교수와 이수경 작가의 호소는 거의 절규처럼 들렸다. 현경 교수의 집은 벽과 담 여기저기 금이 가고 유리문까지 깨졌다고 했다. 북한산이 바라다보이던 창은 완전히 막혔고, 심지어 건물을 딱 붙여지어서 창으로 집안이 다 들여다보인다고도 했다. 그는 “방학마다 조용히 책 쓰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며 속상해했다. 집을 작업실로도 사용하고 있는 이수경 작가는 반년 간 작업을 거의 못하는 것도 참았는데, ‘담보다 지붕이 안 올라오게 짓겠다’는 사전협의를 어겼다며 분노했다. 작품 재료인 흰색 자기와 금에도 공사장 분진이 섞여 들어 손해가 크다고 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 다리가 아파 잘 못 걸어 창으로 인왕산 보는 맛에 살았는데 그것이 막혔다는 한 노인의 푸념도 절절했다.      

20160630 오진암을 옮겨다 놓은 전통문화공간 무계원 뒤로 다가구주택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급기야는 “동네에서 그동안에 든 건축비와 매입비 등을 보상해줄 테니 이 마을에서 나가 달라”는 과격한 제안까지 나왔다. 참여 주민들은 하나같이 “이번 공사로 피해를 보는 것은 주변 몇 집들뿐이지만, 부암동이 가진 유·무형의 자산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나섰다”고 입을 모았다. 내가 기어코 부암동이라는 동네를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만큼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부암동 고유의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군사보호지역,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보존된 백사실계곡 같은 자연과 가까운 환경, 창의문과 한양도성, 홍지문과 탕춘대성, 흥선대원군 별장인 석파정, 반계 윤웅렬 별장과 같은 옛 문화재가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느낌, 갤러리와 작은 박물관이 곳곳에 위치한 문화적 여건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웃한 부촌인 평창동만 가 봐도 기기묘묘한 취향의 가지각색 대저택들이 들어차 있어 아연할 때가 있다. 부암동만의 정체성이라면 소박함이 아닐까 싶다. 돈이 있어도 유난 떨지 않고, 오래된 것들을 잘 가꾸며 살아가는 마음들 덕분에 고유한 매력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종로구청으로부터 공사중지 지시를 받은 현장은 조용했지만 양쪽에 있는 집의 불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치가 언덕 중간이라 아래쪽 집에서는 이 건축물의 위용이 더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먼지를 견딜 수가 없어 200만 원을 들여 따로 유리차양을 댔다고 했다. 위쪽 집의 축대와 담장도 훼손됐다. 애초 윗집이 필지를 넘어 담을 세워 침범한 것이라고 했다. 본래 나무와 꽃이 가득했던 정원은 완전히 사라지고 2동으로 육중하게 지어진 다세대주택은 주변 환경을 지나치게 가리고 있었다. 건축법에서 지칭하는 ‘지하’란 50%만 땅에 묻혀있으면 되므로 지하주차장의 층고도 높아 보였다. 기존 주택들과 달리 튀다 보니 새 집을 둘러싼 온갖 루머도 돌았다. “건축가들이 직접 살려는 것이 아니라 짓고 나서 팔 것 같다”, “3가구가 각각 세를 줘서 총 6가구가 들어올 예정이다” 같은 예측들이다. 건축물 자체의 예술적 풍모가 어떨 지와 상관없이 이 동네와 안 어울린다는 중론이다.      

Y건축사 대표들의 이력을 보니 아파트, 호텔 등이 대표작이다. 그들이 부동산을 보는 가치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 재산권을 행사하겠다는데 법적 보장도 되지 않는 조망권을 내세워 이웃들이 들고일어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터였다. 현경 교수는 이들에게 건축 철학이 뭐냐고 따져 물었는데, 가치관의 차이가 너무 커서 합의를 보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꼭 부암동 같은 곳에 들어와 녹지를 없애고 경관의 부조화를 야기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종로구청의 실측조사에 따르면, Y건축사가 짓는 다가구주택은 655.06㎡로 건축허가를 받았으나 연면적이 72.04㎡ 증가돼 위법이 발생한 상태다.


개발과 보존의 문제를 놓고 내내 충돌하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은 일이 서울 한가운데  ‘시골마을’, 이 작은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다. 21세기에는 지난 세기의 무조건적 개발논리는 좀 접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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