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보여행에서 얻은 깨달음
부암동으로 터전을 옮긴 지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햇수로는 3년째다. 그동안 ‘구 서울’의 참 많은 곳을 걸어 다녔다. 서울을 도보로 여행한 셈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옛골목들은 나설 때마다 설렘을 안긴다. 언제나 새로운 풍경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 밖을 보며 느낀 것들, 걸으면서 관찰하고 사유한 것들은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비례해서 나는 자본주의 생산체계 안에서는 걸맞지 않은 인간이 돼가고 있는 셈이다. 돈으로 치환되는 노동을 하면서, 아니 그전부터 우리 사회 시스템에 맞는 봉급생활자가 되기 위해 살아오면서, 나는 나의 마구 뻗쳐나가는 관심사들과 문제의식을 내내 억눌러야 했다. 생활양식을 바꾸면서 잃은 것도 많지만, 대신 나는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탐구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벌었다. 내가 새로이 알게 된 것들과 내가 보낸 흥미진진한 시간들을 기록했고, 이를 초고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앞서 ‘경고’했듯이 나의 날 선 현실인식을 거둘 수는 없었다. 학교 담을 벗어난 후로는 내내 기자로 살았고, 비판적 시선으로 모든 것을 재검토하는 버릇이 내 정체성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됐다. 북촌, 서촌 등지에서 행정편의주의에 길든 공무원들과 부딪힐 때 느끼는 답답함도 그랬고, 최근 방문한 익선동에서 목격하게 된 상업화, 젠트리피케이션,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이 결정적이었다. 이 도심 한가운데의 작은 ‘한옥섬’에서 벌어지는 변화가 나는 반갑지 않았다.
부지기수로 지나다닌 길들의 속살을 들여다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종로야 이래저래 항시 다니던 곳이지만 나름 깔끔 떨던 강남내기에게 뒷골목은 어쩐지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대로변으로는 대형건물들이 들어섰지만 바로 몇 발자국만 들어가 보면 음침하고 고인 악취가 나는 오래된 좁은 골목이 어수선하게 꼬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거주지역, 그것도 한옥지대가 있다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 주요일간지까지 이곳이 요즘 뜨고 있다며 레스토랑과 카페 지도와 함께 소개에 나섰을 때는 의아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트렌디한 상업시설이 들어설 만한 곳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원예골목 가꾸기’ 사업 주민 설명회가 있다는 소식에 마침내 익선동에 가보게 됐다.
설명회에 참석하고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나는 내가 느낀 불편함의 실체를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는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만한 이런 업소들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대응하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블루오션’이라도 발견한 듯 이곳을 ‘개척’했다고 자랑하지만, 익선동은 북촌, 서촌과는 또 달리 그대로 상업화되기에는 더 악조건을 지녔다. 지역이 작기도 작지만 시내 한가운데인 만큼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갑갑했고, 벽이 곧 담이 되는 구조라 집 밖의 소음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갈 터였다. 게다가 골목은 지나다니기에 너무 좁았다.
최근 있었던 이화마을 벽화 훼손사건이 떠올랐다. 관광객들로 인한 소음과 쓰레기, 사생활 침해를 견디다 못한 일부 주민들이 저지른 일이다. 유명했던 벽화가 지워지면서 주변 상인들은 관광객 감소로 매출이 줄었다고 아우성이지만, 솔직히 나는 원주민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개발에서 배제됐다 볼 수 있는 이런 오래된 거주지에는 평생 이곳을 떠나지 못한 노인들이 많을 터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내가 조용히 일상을 영위하던 공간에 갑자기 외부인들이 득시글거리며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거리가 된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들에게는 정든 터전에서 오랜 이웃과 함께하며 정주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소외계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마 발언권을 가져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을 노인들의 지친 모습이었다. 때 이른 이상 폭염으로 바깥문을 열고 골목에 나앉아 담배를 피우던 노파는 카메라를 목에 건 나를 적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무슨 죄라도 진 듯 재빨리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 골목은 노동계층의 것이었다. 평생을 고된 노동에 시달렸을 듯 제대로 키도 자라지 못한 채 허리가 굽은 노인이 차가 들어설 수 없는 좁은 길을 리어카를 끌며 지나갔다. 햇볕에 탈 대로 탄 초로의 노동자들은 짧은 처마 밑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허름한 간판을 건 선술집 앞에 내놓은 양철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은 무산된 재개발 계획이 언제 시행될지 몰라 수리 한번 제대로 못한 이 지대 백여 채 한옥은 지독히 낙후됐다. 더 이상 밀려날 데 없는 늙고 힘없는 사람들이 세 살이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서울시내 보이지 않는 지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나마 누리던 공간을 앗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일부 네티즌들이 “그런 동네들을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 되냐”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이런 비유가 타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신대륙을 찾아 유럽을 떠나온 프런티어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땅과 부를 일궜는지는 몰라도,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본래 살던 근거지를 잃었다. 익선동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여기서 내몰리면 더 갈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언론을 많이 탄 이곳 어느 카페의 외벽에 누군가 적어놓은 글이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았다. “돈 몇 푼 벌자고 TV 몇 번 나오고 옛날 동네 망가뜨리지 맙시다.”
나는 이곳에서 도시환경정비로 사라진 줄 알았던 ‘피맛골’을 발견하고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종로 쪽 가까운 이면도로에는 허름한 음식점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곳이 피맛골의 끝자락이라고 했다. 1920~30년대 개량 한옥 단지가 들어선 이래로 발전을 멈춘 이곳을 즐기고 싶다면, 자연스레 이곳에 사는 서민과 어울리며 융화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본다. 땀 흘린 노동 후에 값싸게 즐길 수 있는 먹을거리와 대중적 술을 파는 곳을 헤집고 들어선 젊은 취향의 음식점과 카페, 술집은 복고를 지향할 뿐이지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가게맥주집’을 재현했다며 ‘슈퍼’라는 가게명을 단 술집은 마치 아이디어 창업처럼 알려졌지만 나 같으면 하류층을 볼거리 삼아 그런 곳에 앉아 비싼 술과 안주를 먹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얼마 전 부암동의 오래된 구멍가게 앞에서 외국인 세 명이 인도에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캔맥주를 사 마시는 것을 보곤 ‘뭔가 아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독특한 이유로 유명해진 지역을 찾는다면 일단 그곳 본연의 분위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소비력이 있는 층이 멋들어진 음식을 먹고 싶다면 다른 곳에 가면 그만이다. 꼭 이런 곳에까지 비집고 들어와 위화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을까.
설명회장으로 공개된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짧게 한국을 보고 떠날 외국인들에게 이걸 ‘한옥’이라고 내세워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붕에만 기와를 얹어놓았을 뿐 그저 낡고 퇴락한 집일 뿐이었다. 집의 가치는 주인이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한옥과 같은 주택에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부지런함이다. 한국민이 아파트를 선호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단독주택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임없이 보수하고 가꿀 삶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집은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인데 도심 한복판 매캐한 매연에 둘러싸여 쾌쾌하게 찌든 냄새가 배인 오래된 개량한옥은 결코 쾌적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이웃의 페인트칠 떨어져 나간 양철지붕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빗물과 먼지에 쩌들어 개점휴업상태로 보였다. 이 동네 다른 한옥게스트하우스들을 다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하나같이 한국관광공사 인증 우수한옥체험숙박시설이라는 ‘한옥스테이’와 종로구청에서 인증한 ‘한옥체험살이’ 표지판을 대문에 내걸고 있었다. 이런 여건에서도 개인이 숙박업을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공적기관이 나서 이렇게 증명까지 해줄 상태는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100년 넘었다는 오래된 나무 소재 농가에서 자 본 적이 있다. 우리 시골집들과 똑같이 화장실이 외부에 분리돼 있는 구조였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이라는 데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주인이 바지런히 가꾸고 보살핀 덕분이라고 보인다.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자연’이 있었다. 한국의 농촌에서도 맡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구수한 퇴비 냄새마저 정겨웠다. 주변이 상쾌함을 안겨주는 산천초목이라면 숙소가 좀 허름해도 상쇄할 수 있다. 대기오염도가 높고 환경적으로도 열악한 곳에 한옥이라는 외피를 썼다는 이유로 이런 허가를 쉬이 내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모 지자체에서 쪽방촌에 생활체험관을 건립해 ‘빈민체험’을 시행하려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일이 연상되기도 했다.
한옥숙박시설을 세계적으로 내놓고 싶다면 일본의 ‘료칸’처럼 고급화해야 한다. 일본식 정원이 어우러진 전통 숙박시설에서는 1박만 해도 굉장히 기억에 남는 체험이 된다. 재개발을 기다리며 수리를 미뤄 비 새는 지붕에는 대강 방수천을 씌워놓은 곳도 많았는데, 맨 시멘트 덧바른 침침하고 케케묵은 서민개량한옥이 짧게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한옥의 전부인양 여겨지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한국을 찾는 서구 관광객은 일본이나 중국을 거친 후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같은 문화권의 인근 국가들과 비교당할 것을 생각하니 그것도 속상했다. 많은 돈을 쓸 수 없는 관광객이라면 제대로 된 한옥은 관광체험만 하고 시내에서는 버짓 호텔이나 도미터리 호스텔에서 묵도록 하면 된다. 위생적인 잠자리만 제공된다면 오히려 이런 곳을 선호하는 알뜰 여행객들도 많다.
몇몇 서촌 주민들이 귀띔해준 말이다. “몇 년 전 서촌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을 때, 많은 식자층과 외국인들이 동네사랑을 외치며 서촌에 들어와 마을 일을 했다. 학위, 명성, 금전적 욕심 등의 개인의 욕망 때문에 원주민이 이용당하는 것 같아 반발이 생기자, 분열만 조장하고 익선동으로 옮겨갔다. 아름다운 서사로 포장하며 그곳을 또 망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옥동네들도 충분히 보았지만 이곳의 ‘도시형 집장사’ 한옥들이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재건축 내지 개수, 수리, 보수가 절실해 보였다. 작은 자본들이 이렇게 방향성 없이 무분별한 개발을 한다면 이곳도 다른 한옥마을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역사성 없이 트렌드를 반영한 일시적 가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 뻔하다. 20년 전 내가 대학을 다녔던 돈암동에도 기와지붕 아래 한옥을 개조한 작은 옷가게가 흔했다. 서까래와 기와만 얹고 있다고 해서 한옥이 보존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한옥에 입주한 점포가 새로운 것도 아니다. 구제옷이나 골라다 걸어놓는 이런 식의 뻔한 가게들이 들어찬다면 좀 더 뜬 후 큰 자본에게 먹혀도 별다른 명분이 없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유행을 타는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북촌에 대안으로 여겨진 서촌에 열렸던 작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는 이유를 분석해 봐야 한다. 활동가들이 벌이는 행사도 일회성으로 끝나버렸다. 익선동 역시 빛바랜 플래카드가 이러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익선동의 한옥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그 역사성에 맞는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대로 인근에는 서민들이 즐겨 다니던 피맛골의 흔적이 남아있는데다가, 지금은 부암동으로 건축물이 옮겨간 오진암 등 대형 요정들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기생들이 이런 요릿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기생들이 전통을 이어오던 국악 관련 시설이 곳곳에 남아있다. 요릿집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정식집도 골목 안쪽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상업시설보다는 이런 특색을 살리며 장기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소설가 김유정의 짝사랑이었던 판소리명창 문형문화재 박녹주가 살던 집도 이곳에 있다. 월북작가 벽초 홍명희 등 유명문인들과 가수 최희준도 익선동에 거주했었다고 한다. 서울시가 역사적 장소를 찾아 지속적으로 표지석과 표지판을 세우고 있지만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궁궐과 종묘가 가까워 이곳에서 연주하던 악공들이 많이 거주했으리라 짐작된다. 1930년대 명창사설단체 조선성악연구회가 있었고, (사)한국국악협회, 주요무형문화재5호 임향님 판소리 연구소, 국악로 전통문화학교와 같은 국악전수소와 교습소, 악사들이 찾는 국악사, 명인들의 옷을 짓던 한복집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근 돈화문로가 국악의 중심지가 되면서 국악당도 새로이 개장했다. 지역색을 더욱 지켜나가야 할 때다. 상업지구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 전철을 더 이상 밟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