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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Aug 24. 2023

사라지는 여성공간, 서울여담재 10월 문닫는다

더리포트 독점기고




국내 최초 여성사전문도서관 ‘서울여담재’가 오는 10월 폐관한다. 2021년 4월 종로구 창신동 옛 원각사 자리에 ‘여성역사공유공간’을 표방하며 개관한 여담재가 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으며 또 하나의 여성공간을 잃게 됐다. 그나마 이번 폭우로 누수 피해를 입어 8월말까지 대부분의 시설을 사용할 수 없는 처지다. 서울시는 이곳을 아동시설로 전환할 예정으로 기관의 성격이 바뀌며 고용승계도 어렵게 됐다. 소장해온 여성관련 서적과 아카이브의 행처도 정해지지 못했다. 서울시는 이미 서울직장성희롱성폭력예방센터 ‘위드유’의 운영을 종료했고, 위드유와 함께 젠더교육플랫폼효재에서 위탁운영해오던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는 축소이전했다.  


 


원각사터에 여성사 관련 시설이 들어선 것은 단종비(妃)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염색을 한 ‘자지동천(紫芝洞泉)’과 거북바위가 위치한 데 따랐다. 국내에서 찾기 드문 조선시대 여성의 경제활동을 상징하는 지점이다. 앞서 세조의 탄압을 받던 정순왕후을 돕기 위해 여인들이 시장을 열었다고 해 기념된 ‘여인시장터’ 표지석이 소리소문없이 철거되는 아픔도 있었다. 종로구 숭인동 242-1에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채소시장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세워졌던 표석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반론에 부딪혀 결국 제거됐다. 온전히 기록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발굴하려 해도 사료가 불충분하다는 한계에 부딪히고,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연구가 더뎌져 다시금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여성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런 식이라면 ‘동망봉’ 표지석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다. 1997년 종로구 숭인동 58-587에 세워진 이 표석은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동망봉을 기리기 위해 영조의 친필로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로구가 매해 이곳에서 정순왕후문화제를 열고 있지만, ‘동망봉’을 찾아오라는 주문에는 어려움이 많다. 네이버지도는 ‘동망봉어린이공원’이 있는 성북구 보문동3가 218-38을, 카카오맵은 ‘숭인공원유아숲체험장’이 있는 종로구 동망산길 150을 동망봉으로 제각각 표시하고 있다.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라면 언제든 아예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필자는 지난해 발간한 책 ‘3·1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을 통해 매번 밀려날 수밖에 없는 여성공간에 대한 불평등을 논했다. 유사 이전부터 여성들은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으나 여성의 역사, 여성인물들은 잊히고 지워지기 일쑤다.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 기껏 자신들의 자리와 기록을 마련해도 정사(正史)가 되지 못하는 것은 승인 권한을 가진 이들이 여성사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서다. 여성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은 여성이 받아야 할 권위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시간의 연속성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조차 함께 묻힌다.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세월 동안에도 그런 일을 수없이 목격했고, 여담재 역시 전철을 밟게 됐다.  


 

김태은(작가, erikim0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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