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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Jan 03. 2024

73년생 8학군 92학번이 보는 ‘X세대 한동훈’

더리포트 독점기고

“아날로그세대와 디지털세대의 간극이 너무 커서 때론 놀라곤 한다. 동시대를 나눔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두 세대 사이의 ‘낀 세대’가 X세대로 불렸던 1970년대생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한 인류 유일의 세대로서 두 세대를 잇는 가교역할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2021년 1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라는 책을 개정전자판으로 다시 펴내며 쓴 지은이 소개를 이렇게 시작했다. 당시 X세대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첫마디를 꺼냈는데, 이후 다른 책들을 쓰느라 여태 완고를 못했다. 1973년생 8학군 출신 92학번인 ‘X세대’로서의 의식과 사고는 내 일생 전반을 지배하는 정체성이기에, 언젠가는 마무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가 동갑내기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가장 바라는 바는 ‘세대통합’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을 바라보는 유권자 대부분의 시각은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제 부대끼며 경험한 바 없는 사람에 대한 지지는 연예인에 대한 인기투표와 비슷한 면이 있다. 선거를 좌우하는 것은 사실 절대적 부동층이 아니라, 각 후보의 호감과 비호감도에 따라 갈리는 중도층이다. 분명한 것은 대중은 기존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며 ‘뉴페이스’를 원한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이 이재명을 이길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민심이 있다. 현 국정운영에 대한 여러 문제와 논란은 일단 차치하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라는 반응이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살아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새 세상에 거는 기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정일치 시대부터의 뿌리 깊은 무의식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탄생은 386에서 시작된 86세대의 정치계 장기집권에 대한 지겨운 감정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물꼬를 트기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감지한 현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발 빠르게 ‘X세대’로 후계를 지명했다. 그 선봉에 선 이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한동훈이다. 더불어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는 86세대의 공고한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선두주자로 그가 지목된 것은 X세대의 정중심에 있는 92학번이라는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흔히 92학번을 ‘운동권으로부터 가장 먼저 독립한 세대’라고 한다. 91년도만 해도 학생운동가 중 명지대생 강경대와 성대생 김귀정이 사망하고 분신과 투신시위가 이어지던 때였다. 또래들은 희생된 학우들에 대한 부채감을 당연히 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92년 대학입학생들은 이런 분위기가 싹 가신 캠퍼스 생활을 맞이하게 된다.    

 

1992년은 대변환의 해였다. 2024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탈이념, 후기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태동했고, 한류가 움텄다. X세대는 그 시대를 관통하는 주력이 됐다. 대표적으로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서태지가 데뷔하는 등 대중문화계가 대전환의 시대를 먼저 알렸다. 한동훈은 위원장 수락연설에서도 “동료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 가사를 차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과 함께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은 국민이 정치에 원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선당후사 대신 선민후사”라는 선언은 자신을 정치권 개혁의 불씨로 불살라 기존 정치인들에게 신물이 난 ‘동료시민’에게 확실히 ‘다른 길’을 보여주겠다는 결의로 해석된다. 현재 우리사회를 가르는 문제는 세대갈등, 빈부격차, 젠더갈등 등 분열요소들이다. 세대 간 반목이 세대교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소돼가리라는 전망하에 그의 등장은 일단 출신 자체로 신선하다.     


정치권에서 86용퇴론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민주당 측에서는 97그룹(90년대 학번, 70년대생)이 등장해 이재명 타도를 외치며 쇄신을 요구하기도 했다. 재선의원 ‘2강2박’ 71년생 강병원, 73년생 강훈식, 71년생 박용진, 73년생 박주민이 중심이 됐다. 그러나 이들은 차마 ‘X세대’라는 호칭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86을 기준으로 한 97세대 자체가 아류의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실 정치적 민주화를 성취한 86세대의 힘이 너무 강력하다 보니 정치권에서는 차세대들도 그 자력에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정·경·사(정치, 경제, 사회)를 휘어잡은 86세대는 의학발전에 비례한 장수·고령시대를 맞아 내려올 줄을 모르고, X세대는 K컬처라는 신기원을 개척하며 세계화의 물결에서 생존전략을 찾았다. 타 분야에서는 세대스킵현상이 일어나며 70년대생들은 ‘저주받은 92학번’이라는 신조어 유행까지 만들어 냈다. 한 해 100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나던 ‘제2베이비붐’ 세대로 단군 이래 최고 대학입시경쟁률을 뚫어야했고 졸업 즈음에는 IMF(국제통화기금)체제를 맞이해 취업의 길이 아예 막히는 경험들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치계에서는 80년대생 이준석이 먼저 집권당 대표가 됐고, 평생직장의 개념도 사라지고 연공서열과 연령 파괴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로 네이버 최수연 CEO처럼 80년생들이 먼저 임원이 되는 걸 지켜보며 묘한 열패감과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MZ세대라는 광범위한 나이대를 아우르는 젊은 세대가 부각되며 X세대라는 말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세대분류 학자들에 의하면, X세대는 1968~1980년생을 포괄하기도 하지만 1970년대 초반~중반생 만을 일컫는 ‘미니세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X세대에 대해 언론에서 집중보도하던 때가 1990년대 초반~중반이므로, 세대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가진 이는 IMF체제 이전 경제호황기에 대학시절을 보낸 이들로 압축될 수 있겠다. 문화계에서는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잠해 잊힌 세대다. 하지만 X세대는 1990년대나 지금이나 새로운 기준이다. 정의하기 어렵다고 해서 X라는 알파벳을 따와 ‘신세대’의 대명사가 됐고, 건국 이래 가장 진보적이고 참신한 신인류로 여겨졌다. X를 시작으로 Y, Z세대가 탄생했고, Y세대가 세기가 전환되며 밀레니얼세대로 바뀌어 불리게 됐지만 X가 그 표준점이 되는 것은 변함없다.     


X세대 문화가 발현된 장소가 서울 강남이고, 현재는 인터넷의 발전으로 문화평준화가 이뤄졌지만 당시만 해도 강남은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선도하는 전복적이며 역동적인 신도시였다. 신흥졸부로 비난받은 것은 당시에는 특권층이 산다는 동네라고 볼 수 없었고, 기득권들에게 밉보인 이유도 있다. 신중산층 계층이 만들어지며 시민시대를 주도한 젊은 대졸 화이트칼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성장한 한동훈에게 X세대 정신을 정치판에 이식시키도록 ‘정언명령’이 내려온 것도 어쩌면 시대적 요구일 터이다. 한동훈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정치인보다 다른 화법과 태도,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변화가 늦은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도 X세대의 첫 등장과 닮아있다. 강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그가 예상을 깨고 총선 불출마를 단언한 것도 파격적 전략이다. 총선 당선 여부를 떠나 정치인 세대교체의 도화선이 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놓고 ‘윤석열 아바타’라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합리적 젊은 보수’로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지지율에서 썩 좋은 결과를 내고 있지 못한 윤 대통령도 새로운 세대를 연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동훈이 조정훈 의원과 의기투합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72년생 8학군(상문고) 출신 재수 92학번 조정훈은 ‘중도’를 표방하며 시대전환을 창당했고,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에서 의원배지를 단 후 다시 돌아와 2023년 9월 국민의힘과의 합당을 결정해 ‘철새’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을 ‘훈훈브라더스’라고 부르며 ‘대한민국 정치의 희망’이라고 치켜올리는 우파매체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엘리트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다가 뒤늦게 정치에 입문해 기존 여의도 문법과는 차별되는 언행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나란히 ‘한동훈 스피치’, ‘조정훈 스피치’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들의 만남도 ‘신세대’ 적이다. 둘 다 술을 못해 콜라를 마시고 서태지 얘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한다.    

 

이들의 결합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인지는 아직까지는 모두 기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민의힘 전면에 나선 이들에 대응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의 세대교체는 불가피해 보인다. 일부 보수매체들은 1993년 창설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출신들에 주목해 공격에 나섰지만, 민주당 측도 X세대에 어필할 만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인 71년생 곽상언, 판사 출신의 78년생 이탄희 의원 등이다. 이들도 학군지 목동(신목고), 송파(가락고) 출신으로 서울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 미국유학까지 마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이탄희는 먼저 지역구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난달 13일 선거법 퇴행 만은 막겠다며 백의종군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한동훈의 맞수로까지 거명됐던 그의 결단이 당내에서는 어떤 포지션으로 드러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X세대들이 특권 포기를 통해 보다 민주적이고 혁신적 방향으로 전환을 위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내 후보 공천거쳐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정치1번지’로 꼽히는 종로구에서는 조정훈과 곽상언이 맞붙을 가능성도 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빠졌지만 아직 그 상징성은 여전한 종로구에서 2023년 하반기 가장 많은 플래카드 선전을 한 정치인은 두 사람이었다.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서 청와대를 향하는 도로 양측에 나란히 걸려있는 등 종로구에서의 인지도 상승을 뚜렷이 노려왔다. 조정훈은 한결같이 ‘좌도 우도 아닌 앞으로’라는 구호만 내걸었지만, 곽상언은 서너 번 이상 갈아치우며 눈길끌기에 성공했다. 그중에는 ‘노무현의 정치가 돌아옵니다, 종로는 움직입니다’를 비롯 ‘국민을 믿고 전진하겠습니다! 종로는 미래를 선택합니다’는 어구로 과거부터 미래까지 모두 아우르겠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더불어민주당 종로구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곽상언은 예상대로 차기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 정치인들이 거주하며 성장한 20여년 전까지 강남의 정치색은 특권층이라 불리며 성곽을 쌓아가고 있는 지금과 달랐다. 대졸, 화이트칼라들이 신중산층에 진입하며 새로운 주거형태인 아파트단지에 입주했다. 정치의식이 높았고 그 가운데 ‘강남좌파’도 형성됐다. X세대들 역시 ‘인간 노무현’에 대한 짙은 향수를 공유하고 있다. 성장기에 겪었던 환경은 그 사람의 의식을 구성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정치적 최대 과제였던 민주화가 이뤄진 뒤 성인으로 진입했던 X세대가 정치 무관심을 넘어 혐오감을 가지게 됐던 것은 기존 정치인들의 낙후된 관념과 언행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대인재들이 정치권 진입을 선호하지 않았다. 자기 분야에 매진하다 정치적 필요성이 간절해진 시기에 시대정신에 맞는 정치지도자로 메시아처럼 등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의 활약이 총체적 세대갈음으로 전이되며 한국 정치권의 색채 자체를 변모시킬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여성 유권자로서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X세대 여성은 ‘영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를 가지며 남성 본위 한국땅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민주화가 이뤄진 1990년대 이후 금녀의 구역을 하나하나 깨부수며 여성인권이 놀랍게 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 운동권 출신 인기 인사인 유시민이 2002년 대선 기간 발생한 개혁당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회에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발언으로 소수자인권을 도외시, 집중포화를 받은 케이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권자 절반은 여성이다.     


김태은 작가 (erikim0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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