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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형 Nov 26. 2016

시(詩)를 쓰다.

때론 기도, 때론 위로, 때론 읊조림, 그리고 오바이트

2016 아주 더운 여름. 부산에서 핫도그(HotDog)를 먹었다.


이제 인간(人間)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비단 문명의 발달이 우리 인간의 영역을 좁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인간과 기계의 구분인데, 기술의 발달은 둘의 영역을 융합 혹은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있다. 지극히 인간적인 일들이 규격화된 기계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보고 있으며, 이제는  마치 열광할 일만 남아있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 열광은 인간을 향한 것인지, 혹은 기계를 향한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다. 알파고(AlphaGo)의 승리는 딥러닝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기계가 가장 하기 어렵다는 바둑이라는 인간의 종목을 우리는 내주고 말았다. 2016년에 우리는 이를 분명히 목격했다.


그렇다면 바둑을 내준 우리가 부여잡을 '지극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알파고에 고개를 숙인 그날, 필자가 찾은 '지극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시(詩)였다. 이 역시 딥러닝이든 그보다 더한 학습을 통해 언젠가는 인간과 기계의 공동구역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시(詩)라는 것은 기도와 성찰 그리고 자기고백에 가깝다. 시(詩)는 진주를 품은 고통을 안고 사는 우리 인간의 결정체 일 때가 많다. 당장은 기도를 모르는 기계에 우리는 당분간 우위에 서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詩)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시(詩) 그것이 은유이든, 상상이든,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세상이 정해놓은 정의를 내려놓자. 그래야 나답게 쓸 수 있다. 시(詩)는 마음에 가깝다. 시(詩)를 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詩)를 학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을 정직하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그림을 그리듯 시(詩)를 말하자.


[새가 날다]     

새는

제 날갯짓으로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이 차올라

스스로 부양하는

말 못 할 서러움으로

그에게 가는 것뿐이다.


위의 시(詩)는 사랑에 다가가지 못했던 필자가 어떤 날에 내 앞에 떠있던 새를 보고 읊조렸던 것이다. 시(詩)의 구조나 형식은 일단 접어두자.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시(詩)에 가까운 경우가 있다.

 


[찌개에 대한 생각]     

어제저녁에 먹던 찌개를 오늘 다시 데워먹고

다시 내일 데워질 운명 같은 시간이여!     

냄비에 찌든 국물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나의 생과 너무 닮다.     

젓가락 두 짝처럼 매일 똑같다면

차라리,

데운 찌개가 쉬어져

먹을 수 없을 만큼의

방황을 맛보고 싶다.


현대시(詩)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을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 효율에 가려져 더 외롭고 더 인간적인 것들에 심취하고 있지 않더냐? 위의 시(詩)는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작은 토로였다. 혹은 시(詩)로 그려낸 오바이트(overeat).

 

누구나 한 번쯤은 시(詩)를 써봤을 것이다. 그것이 수업의 결과였든, 혹은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었든 간에 말이다. 다시 한 번 인간다움을 꺼내보는 건 어떨까? 어렵다면 불조심 표어를 만들어 보았던 어린 시설의 나를 상상하며 그려보자. 어쩌면 우리가 시(詩)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어야 진짜 기계의 주인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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