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쏘아 올려진 나

이젠 인생이 우주로 보이기 시작한다

by 단짠

Q. '이젠 ㅇㅇ은 ㅇㅇㅇ처럼 보이기 사작한다'라는 문장을 패러디한다면?


일초, 이초, 삼초. 딱 삼 초만 해도 16.252, 3.578과 같은 숫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숫자들은 나로부터 발생하거나 내가 의도해서 생산한 것들이다. 분명 내가 있어서 만들어진 숫자인데, 어느새 숫자가 나를 주도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존재 자체의 가치보다 숫자가 나타내는 양으로 가치가 평가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 평수도 그 숫자만큼만 보이니까. 아니, 보니까.


사는 집의 평수, 수입, 자산, 차의 종류, 명함, SNS 구독자 수가 나를 대변할 수 있을까? 충분히? 대단한 철학이나 과학은 모른다. 다만 한 번뿐인 인생이 숫자로만 평가되고 정의되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나는 숫자가 아니다.


지금부터 사오백만 년 전에 에너지의 폭발로 원시 인류가 생겨난 이래 인류는 정말 진화한 걸까? 사람에게 필요해서 시작한 많은 것이 사람을 지배해 버린 것만 같다. 지구는 거대한데, 우리는 조각낸 각자의 구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갇혀버린 건 아닐까? 우리가 창조한 것들은 진정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있을까?


담쟁이덩굴에 창문마저 가려진 외딴집처럼, 본체는 안 보이고 덩굴만 보인다.


존재 자체의 가치보다 숫자가 나타내는 양으로 가치가 평가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 평수도 그 숫자들 만큼만 보이니까. 지금 보이는 인생 평수에 만족하는가? 한 번뿐인 인생이 숫자로 평가되고 정의되는 것에 동의하는가 말이다.
거부한다. 나는 숫자가 아니다. 존재 자체의 고유성만으로도 가치 있는 유일한 나, 나의 본체를 만날 때가 됐다


일초, 이초, 삼초. 삼초 후 나는 숫자를 뚫고 나왔다. 넝쿨을 걷어내니 본체가 드러났다. 창을 열고 공기를 흡입하니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땅에 매인 닻을 끊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졌다. 힘을 느끼는 순간, 찌지직 소리를 내며 닻을 맨 줄이 끊겼다. 슈슈슉 본체는 우주선처럼 솟아올랐다. 위대한 변화를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기권에 이른 듯 공기가 팽팽해지자 오로지 본체만 지구와 우주 사이를 유영하고 있다. 이미 떨어져 나간 숫자 외에 내가 만들거나 장착한 생존 아이템들도 대기권을 통과하며 떨어졌다. 본체만 남았다.


숨 고르기를 한다. 살갗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우주의 공기에 감싸인다. 하얀 리넨 커튼이 맨살을 쓰다듬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다. 흠, 이거였어. 그러나 이 기억도 이내 떨어져 나간다. 지구, 땅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 그리고 태초로 돌아가 기억한다. 난 원래 여기서 시작했어.


우주는 지구를 품고 있듯 나, 너, 우리를 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엉켜있지 않고 구역을 나눌 필요도 없다. 존재함으로 완전하고 자유롭다. 이미 충분하다.


생존 아이템을 모두 삭제했다. 나와 우주만 남았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롭다.


삼 초 전과 후. 과연 숫자에 갇힌 10평 남짓한 인생을 우주로 쏘아 올린 건 무엇일까?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기적이라 부른다. 이미 짜인 틀이 빡빡해서 한 뼘 텃밭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유한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유한한데, 딱 한 번뿐인데, 내가 지구로 와서 지금 뭘 하는 거지?' 하는 질문이 터졌다. 맨 아래에 갇혀있던 질문이 터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살아남으려 팽팽하게 잡고 있던 틀의 문고리를 놓아버렸다. 문고리를 놓자마자 틀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우주로 쏘아 올라갔다. 시공간의 허와 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기적이다.


어떻게 기적이 왔을까? 기적이 온 길을 더듬어 갔더니, 기적은 한순간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일초, 이초, 삼 초 사이에 일어나는 것 같지만 하루, 이틀, 수 백일을 반복한 10평을 넘어선 상상과 상상이 현실이 되기 위한 행동 이 모여 기적이 일어날 발화점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래, 여기는 여기이자 여기가 아니다. 인생이 16252, 3578이라는 숫자로 규정지어질 수 있는 게 아니듯이. 비로소 인생이 우주로 보이기 시작하고, 우주에서 인생을 바라보니 유한하지만 무한한 공기를 누릴 수 있다. 숨 쉬고 있지만, 숨 쉬고 있는 나를 자각할 수 없었듯이, 살아 있지만 살아있는 게 어떤 상태인지를 모르고 살았다. 이제 우주로 돌아왔으니 나의 오감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끼게 될지 설렌다.


하마터면 10평 남짓의 공간이 나의 전부인 줄 알고 주어진 구역마저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 뻔했다. 초파리에 갇힌 사람으로 죽어갈 뻔했다. 눈을 감는다. 손을 뻗는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다시 길게 내뱉는다. 나는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답게 호흡한다. 우주에서.


눈을 감는다. 손을 뻗는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다시 길게 내뱉는다. 나는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답게 호흡한다. 우주에서. (우주는 나의 꿈이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거짓일 수 있듯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할 수도 있다.


신나는 글쓰기 5기 8일차 미션 : 문장 패러디하고 이어서 쓰기

<반 고흐, 영혼의 편지> 48페이지의 문장입니다. "이젠 그림이 수채화처럼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