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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마마 Aug 18. 2021

밥짓기는 자존심을 찌우고
글짓기는 자존감을 찌운다

엄마를 살리는 글쓰기

밥을 지을수록 리모컨을 눌러댔고

글을 지을수록 키보드를 두드렸다. 


밥을 지을수록 자존심만 쩠고

글을 지을수록 자존감이 쩠다. 


밥을 아무리 지어도 빼빼마른 써니의 살은 내맘대로 안올랐지만

글을 지을수록 살고싶은 마음은 어제보다 토실토실 올랐다.


밥을 지을수록 왜 사느냐고 물음표가 생겼지만

글을 지을수록 그래서 산다고 느낌표가 생겼다.


밥을 지을수록 쓸데없는 생각만 했고

글을 지을수록 쓸모있는 행동을 했다. 


밥을 지을수록 정사각형(인스타그램) 속의 다른 여성의 삶을 훔쳐봤고 

글을 지을수록 직사각형(브런치) 속의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밥을 지을수록 아이와 거리를 두고싶었고

글을 지을수록 아이와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글을 쓴 지 8달, 조회수 11만에 구독자 148명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으면서도 내가 눈하나 깜빡하지않고 8개월동안 글쓰기를 지속하는 이유다. 밥짓기는 귀찮지만 글짓기는 하고싶은 속마음을 이 공간(브런치)에서만큼은 이해받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나와 닮은 엄마사람친구들을 부르는 소리를 간절하게 질러본다.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나에게 

" 뭐라구요? 애 엄마가 밥짓는걸 거르고 글을 쓴다구요? " 라며 화들짝 놀라지 않을테니까. 


6살 써니를 혼자키우면서 없는 시간을 조각조각 붙여서 글쓰기를 지속했던 가장 큰 이유를 솔직히 고백하면, 살고싶어서다. ?? ?? 맞다. 나는 살고싶어서 쓰기시작했다. 써니의 엄마로 오래오래 버틸 수 있는 힘. 삶의 근육 만들기를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 싶어서 글을 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가 툭 던지고 간 폭탄을 받아드는 일은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다른 사람에게 던질 새도 없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와서 빵 하고 터진 그 일은 서른 여섯의 내가 처음으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너무 구체적으로 나의 죽음을 상상하는 날이 지속됐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6하원칙에 기반해서 생생한 끝 그림을 그려본 적 없으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어쩜 그렇게 섬세한 묘사가 가능했을까? 처음으로 내 마음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을 쓰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죽음의 문턱에서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유서를 쓰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내 앞에 벌어진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고백하면서도 감정안에 숨겨진 진짜 욕구는 살고싶은 마음이었다. 살고싶다고 말하면 내게 일어난 일들이 너무 가벼운 것이 될까봐 나는 글 속에 살고싶은 마음을 꽁꽁 감췄다. 


그 이후로 계속 글을 썼다. 퇴사를 한 이후 프리랜서라는 간헐적 워킹맘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글 쓸 시간이 생겼고 글 쓸 시간이 없으면 밥-짓기를 거르고서라도 글을 썼다. 업무가 바빠서 하루에 잠 잘 시간이 3-4시간이 지속될 때, 글을 며칠동안 쓰지 못하면 오히려 더 괴로웠다. 새로운 글을 써야 하는 괴로움보다 글을 쓰지 못하는 시간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대개는 강의일정 2-3일 전까지는 매우 바쁘고, 변화한 강의 환경만큼 매우 긴장상태라 일에만 집중하는 편인데 그저께는 강의 전날 밤에 글을 쓰고 잠들었다. 1시간이라도 더 챙기고 또 점검하고 일하며 완벽주의를 지향하던 내가 강의 직전에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유를 부리는 것을 누가 봤다면 너가 10년 이상의 베테랑 강사냐고 어디서 여유부리냐고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밥짓기를 걸러도

글짓기를 거르지 않는 이유 


- 매일 조금씩 더 살고싶어져서 

죽고싶은 마음에도 무게가 있다면 글을 쓸 수록 1g씩 그 마음이 줄어서 삶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그러면 지금 나는 완벽하게 괜찮아 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내 상황은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로 가득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고단함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종종 일과 삶이 너무 버거워 생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내 안에 10% 정도는 남아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가볍고 앞으로 이 마음이 더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내일을 기다리는 날들이 늘어났다. 밥을 지으면 지을수록 도대체 나는 왜 사느냐고 물었다. 목적없는 내가 삶에 불시착 한 느낌이 들었다면 글을 지으면 지을수록 내가 원하는 삶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처음에는 에버노트에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미운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부정, 절망이 가득했다. 하고싶을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차마 얼굴을 보고 하지 못했던 욕도 글로 적어봤고 바닥까지 힘들었던 마음도 솔직하게 꺼냈다. 그래서 얻은 것은 핵사이다 같은 감정이 아니라 '이렇게 까지 굳이 표현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내 글을 보는 눈을 의식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글쓰기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이유 


1) 생각을 조심하게 되는 보는 눈을 돈 주고 사기 

보는 눈(글쓰기 동료)을 의식적으로 만들면 가상의 회사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일기의 언어와 공식적인 글쓰기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일기에는 투덜투덜 불평하는 나, 불쌍한 한 여성이 있지만 독자가 있는 글쓰기는 어떻게든 좋은 마무리로 마침표를 찍게 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싶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마음은 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것을 다 드러낼 수 없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글을 조심스럽게 써야 했다. 글을 조심스럽게 쓰려면 생각을 조심해야 했는데 나에게는 이것이 아주 큰 선물과 같았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며 습관이 운명이 된다는 싸이클의 결과를 바꾸려면 생각을 조심해야 했다. 조금만 마음이 고삐처럼 풀려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유리멘탈같아서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싶은 날들이 많은데 보는 눈이 있으니 생각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처음 브런치북을 만들고 독자분들로 부터 큰 사랑을 받은 댓글을 읽었다. 나를 응원해주는 마음을 읽고나니 그 후로 생각을 함부러 하면 안되겠다는 책임감이 생겼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글의 마무리는 읽고나면 살고싶어지는 글이 되기를 바랬다. 


공심님의 신글방에 들어오니 새로운 보는 눈들이 또 많아졌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생각과 보는 눈과 만나는 자리에서 삶의 교훈은 각자의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진다. 댓글을 무조건 달아야 하는 규칙도 마음에 든다. 감정이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말이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응원을 받은 만큼 좋은 댓글을 단 사람의 삶도 같은 분량만큼 힘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비록 의무감에서 이행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2)  같은 분야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간접적인 교류 


글을쓰면서 같은 분야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해서 열심히 읽었다. 세상에 스승님은 모두 이곳에 있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배움이 넘쳤다. 내가 좋아 하는 분야에 대한 애정이 가득할 수록 내 관점이 얼마나 편협한지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게 됐다. 글을 쓸수록 글이 술술 써지는 날들이 늘었다. 위험한 신호다. 글이 잘 써진다는것은 늘 비슷한 생각만 하게 되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만 계속 이야기한다는 뜻이니까. 작가로서 자기복제의 시작임을 알리는 신호다. 다양한 주제와 관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를 찾겠다는 글만 계속 쓰게 되니 같은 스토리가 계속 반복되는것을 이젠 마무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시간 글을쓰며 자신을 연마한 분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다양한 관점의 글쓰기를 시도한다. 



글쓰기의 최종목적지


뾰족해지고싶다는 말을 아주 많은 글에서 이야기했다. 이 전까지 내 글쓰기의 목적지는 퍼스널 브랜딩이었다. 강사로 단단히 뿌리를 내리려면 뾰족해야 한다고. 내가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신념처럼 갖고 있었다. 그럴수록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 처럼 갑갑했다. 뾰족해지지 않으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온몸에 퍼졌다. 


잠시 브런치를 벗어나 블로그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 대단한 작가도 아니면서 마침표 모양 하나까지도 섬세하게 조각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내가 일을 하는 과정을 편안하게 기록했다. 일을 더 잘하고 싶고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리고 싶었다. 몇년 차 강사이고 말을 얼만큼 유려하게 하고 얼만큼 대단한 곳에 많이 출강을 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극복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얻었는지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쓰기시작했다. 나의 무형자산에 대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쓰니 처음으로 꼭 이 일이 아니라도 나는 얼마든지 다른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죽어도 이 일로 대단한 사람이 되고싶다고 잔뜩 힘이 들어가 있을때는 자존심만 상했다. 블로그에 이웃인 다른 강사님들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나는 언제든지 이 일을 때려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이 일이 좋아졌고 더불어 자존감도 섰다.



글쓰기는
나와 닮은 영혼을 부르는 일 

글쓰기는 세상에 비슷한 영혼을 부르는 소리를 외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댓글을 달고 싶은 글에는 글을 쓴 사람과 읽은 사람 내면에 분명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은 절대로 반응할 수 없다. 


아직 최종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단지 나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진주들을 하나하나 세상에 내보낸다. 반응을 잔뜩 기대한 글들은 묻히고 생각지도 못한 글이 반응하기도 한다. 알 수 없다. 무심코 올린 아이에게 쓰는 편지글이 내 블로그 유입경로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내 글의 재미와 의미가 독자들과 만나는 지점을 찾는 시도를 꾸준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빗나가는 느낌이다. 내 글을 독자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어떤 테마를 가져야 할지 방향성을 찾는 일이 현재 내 글쓰기의 최종 목적지다. 쏘아올리다 보면 얻어 걸리는 날도 있고 진짜 제대로 걸리는 날이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어서 오늘도 엄마는 밥짓기를 미루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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