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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Jan 19. 2020

칭다오에서 하루를 삽니다 2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

다들 자기소개서에 쓰기 위해 준비한 고사성어나 사자성어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것이다.



百聞不如一見. 백번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



백문불여일견. 누구나 다 아는 너무나도 유명한 고사성어. 나는 자기소개서에 사용하기 위한 것 외에 유독 이 고사성어를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기는 편이다. 언제부터냐면? 칭다오를 직접 겪어보고 난 후부터.






중국은 내 여권에 처음으로 도장이 찍힌 나라였고, 생소한 언어의 나라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문화가 다른 타국으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떠나기로 결정하고, 준비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하여 기숙사 키를 받을 때까지도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당시의 나는 해외라는 것에 엄청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나를 상상할 때면 외국의 어느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가 떠올랐다. 그렇기때문에 늘 책과 영상으로만 접하던 외국에 간다는 것에 흥분해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 때의 나에게 외국이란 유럽밖에 없긴 했지만. 어쨌든. 비행기를 탔으니까!


하지만 중국은 각종 안 좋은 이미지로 둘러쌓여있던 나라기도 하였다. 소매치기, 납치, 장기매매 등등...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계 3대음식에 속한다는 중국 음식에 무한한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책상다리 빼고는 다 먹는다는, 맛이 있을까 싶은 제비집까지 먹는다는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중국음식. 각종 범죄가 가득한,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음식이 있는 나라라니. 참 언밸러스하지 않은가?






공항에서 내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인솔자를 만나 작은 봉합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 길. 사방에 가득한 한자 외에는 별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한 시간 남짓을 달려 도착한 학교 기숙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중국어로 이름을 부르며 방 키를 나눠주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내 이름을 중국어로 알아가지 않았었는데, 뜻밖에도 한국어를 약간 변형한 것처럼 들려서 별 무리없이 키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3인실을 배정받았다. 3층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삼백몇호라고 적힌 문을 열면 아주 짧은 복도에 다시 방문이 네 개가 붙어있었다. 화장실 하나, 방 세 개. 그런데 방 세 개 중의 어떤 게 내 방이라고 알려주지 않아서 방마다 키를 꽂아 맞는 방을 찾아야했다. 룸메이트는 같이 갔던 승무원 관련된 타과의 동생들이었는데, 돌아오는 날까지 아니 돌아와서도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심지어 1명은 나와 같은 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내 방은 3개의 방 중 가장 컸다. 가장 안 쪽에 있는 방이었고 원룸 크기 정도였는데 정말 원룸과 다를 바 없이 냉장고와 티비, 침대, 책상, 옷장이 갖춰져있어 아주아주 만족스러웠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내 예쁜 캐리어를 올려놓고 정리하다가 사진을 한 방 찍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내 실수로 그 사진이 날아가버려서 너무나도 아쉽다. 그 장면이 내 머릿 속엔 남아있지만, 누군가와 공유할 수는 없으니까.


글을 쓰다보니 그 날의 설렘이 다시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진다. 기숙사 앞에 있던 슈퍼, 슈퍼를 지나 후문으로 가는 길에 자리한 목욕탕, 목욕탕 그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언덕길을 내려가면 검정색 철문으로 된 후문 밖에 쭉 자리한 작은 시장, 그리고 그 앞에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정차하는 정류장까지. 하나하나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오르는 것이 신기하다.


여하튼 첫날 오자마자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사야했는데, 우리를 도와주던(아마도 학교 일을 돕고 장학금을 받는  ) 한국어학과를 다니는 중국 학생  명과  학기 전에 미리 와있던 우리 학과 선배의 도움으로 다같이 까르푸에 가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샀다.  이후로도 항상 누군가와 함께 다녔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학교 안에서만이었다. 나는 혼자 다니는 것에 매우 익숙하였고, 오히려 한편으로는 혼자일 때를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혼자서는 경계라도 둘러진 것마냥 정문이고 후문이고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볼 일이 생겨 처음으로 혼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던 날, 크로스백을 앞으로 메고 가방 입구에 손을 댄 채 20분을 갔다. 여기저기 눈을 굴려가며 두리번 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너무 무서웠었다. 칭다오에서 생활한   달이 지났던 시점으로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순간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크아웃을 하러 들어간 카페에서는  어디보다 친절하게 주문을 받아주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긴장한 채로 가방을  잡았지만, 후문의 언덕길을 올라 기숙사로 향할 때는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뭔가  걸음 전진한 느낌이랄까, 알을 깨고 나온 느낌이랄까. 나는 대체  그렇게 무서워했을까? 어차피 여기도 나와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냥 한국의 우리 동네처럼, 다를  없는 동네  구석이었다. 백문불여일견.  고사성어가 더할나위없이  맞아떨어지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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