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가 그때 어떻게 했냐면~"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동시에 눈으로는 살짝 시계를 쳐다본다. 벌써 9시다. 티가 날까 얼른 시선을 돌려 다시 친구를 바라본다. 예감이 좋질 않다. 다른 친구들을 바라보니 아직 쌩쌩하다. 오히려 눈이 초롱초롱한 친구도 있다. 이야기하던 친구의 말이 끝나자마자 초롱초롱한 눈을 했던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날은 11시가 돼서야 자리를 파하고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마저도 내가 피곤하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한 차를 더 갈 뻔했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몸을 맡기고 나니 그제야 온전히 나의 삶이 시작된 듯한 기분이 든다. 고요한 방 안에 부드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머리맡에 둔 책을 집어 들고 보기 시작한다. 다섯 페이지 정도 읽었을까? 졸음이 몰려온다. 책이 제 할 일을 다했으니 다시 머리맡에 둔 후 탁상 등을 끈다.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은 후 천천히 호흡하며 잠이 든다.
'좋다.'
늦게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소위 MBTI라고 말하는 성격 유형 검사 도구에서 I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이 사실을 몰랐다. 아니 부정하고 오히려 그 성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내가 살아온 한국사회는 I형 인간을 선호하지 않았다. 세상은 내가 더 적극적이길 원했고, 사람은 많이 만나야 하며, 경험도 이것저것 많이 해야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실제로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다양한 경험이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있었지만 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겠거니 하고 살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요구되는 것들은 많아져만 갔다. 가장 좁은 가족부터 시작해 친구, 사적모임, 회사 등의 일정을 챙기고,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즐거움이 아닌 버거움으로 다가왔다. 사람을 만나면 얼마 되지 않아 빨리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기술과 위기의 도래를 알리는 뉴스들은 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냥 천천히 여유롭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가끔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기술이 발전되지 않아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었고, 소심한 성격에 교우관계도 협소했던 그 시절. 나는 딱히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어린 시절 동생은 여느 아이들처럼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그때 나는 소파에 누워 편안하게 TV를 보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고심 끝에 빌린 만화책을 쌓아두고 라면이나 짜파게티를 한 그릇 해치운 후 침대에 몸을 뉘이고 만화책을 보거나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즐겼다. 그 시간이 내겐 가장 충만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니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성향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까지 왔고, 그 노력을 멈추려 한다. 더 이상 해도 안 되는 영역에 도달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공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여기서 ‘안다(知)’는 머리로 이해하고 억지로 따라가는 단계다. 나는 오랫동안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추려 애쓰며 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견뎌내고 있는 이 과정 자체를 좋아했다. 더 나아간 이들은 그 자체를 즐겼다. 장기전에서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내 주변에도 심심치 않게 있는 그들은 내가 노력해서 맞춰가는 것들을 전혀 '노력'이라 생각지 않는다. 야근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모임을 하고, 술자리를 하고, 정치싸움을 한다. 거기에 드는 시간, 에너지, 돈을 버거워하고 비용이라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들은 거기서 얻어지는 것들을 더 가치 있게 여기거나 아예 그런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노력하면 단기전으로는 몇 번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전으로는 이길 수가 없는 상대들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몸에 힘을 좀 빼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 선에 맞추느라 지쳐가는 대신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편안해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저녁식사, 햇살 좋은 카페에서 즐기는 수다, 조용히 말없이 즐기는 독서나 글쓰기, 해가 질 무렵의 산책 등. 이런 것들로 에너지를 가득 채운 후 가족, 친구, 회사, 그 외 것들에 다시 에너지를 쏟는다. 그리고 다시 채우고 쓰기를 반복한다. 그제야 큰 부하 없이 나의 삶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물론 요즘도 불가항력적으로 에너지를 채울 틈이 없을 때가 있다. 직장인이라면 인사발령, 보직변경, 회사 내 크고 작은 이슈 등으로 일 년에 두, 세 번 그런 시간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과거의 나였다면 연거푸 이어지는 모임에 막연히 힘들어하며 언제 집에 갈 수 있을지 눈치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가 생긴 지금은 간혹 모임이 길어져 지쳐갈 때쯤이면 나와 같은 동류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집중하려 노력하지만 이미 무거워진 눈꺼풀, 입을 가린 채 하는 간헐적인 하품, 힘이 풀려 주저앉은 어깨.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보일 때면 나는 타이밍을 봐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곤 한다.
"피곤하시죠?, 이제 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상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반쯤 감긴 눈으로 살짝 미소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나와 닮은 이를 보며 조용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 역시 같은 위안을 얻길 바란다.
나아가 이 시대의 모든 내향인들이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해,
내향인들에게 다소 척박한 사회에서도 잘 살아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