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따질 수 없었다.
따지는 순간 그녀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 믿고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할수록 그녀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고, 그 모습에 나는 조급해졌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미약하지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끔 보이는 그녀의 미소와 활력에 나는 힘을 얻었고, 더 분발해 그녀의 마음을 끌어올리기 노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활력은 나로 인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의 웃음과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것들은 나를 지나쳐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있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들불처럼 커져만 갔다.
나는 천천히 고통의 늪에 빠져들었다.
당시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던 나는 내가 더 잘하면 그녀의 시선을 다시 내게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표현했고 한없이 그녀를 배려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힘을 잃어갔고 나는 더욱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지쳐버린 나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그간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른 곳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과 무심함에 대해 크게 성을 냈다.
나의 갑작스러운 화에 그녀는 놀랐다.
이어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앞으로 노력하겠다며 사과했다.
묘한 카타르시스와 함께 마음이 좋아진 나는 그녀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후 내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한 갈증은 이전과 유사한 상황이 느껴질 때면 나를 더 화나게 했고, 그녀를 윽박지르도록 만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잠시 엇나갔던 시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매번 반복해 설명했고, 한없이 작아진 그녀의 모습에서 작은 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아닌 무심함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의 추궁에도 그녀는 힘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내뱉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어느 순간 나는 다시금 그녀에게 집착하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 갔다.
천천히 떠나가는 그녀를 아무리 따라붙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삶이 피폐해지고 망가져 갈 때쯤 이별을 고해왔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별은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진행되고 완료되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녀에게 몇 번의 연락을 했고, 그때마다 나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을 철저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달을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앞에는 어떤 여자도 거들떠보지 않을 못난 몰골의 남성이 서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아이처럼 울다 잠이 든 나는 오랜만에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배가 고팠다.
오랜만에 장을 본 후 김치찌개를 만들어 밥을 먹었다.
아주 맛있었다.
이후 산책을 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쳐 갔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온 나는 깨끗이 씻고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제때 음식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녀와 헤어진 후 다시금 건강한 삶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이별에 대한 고통이 마음속에서 거의 사라질 때쯤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다.
우리 둘은 서로를 인지했지만, 각자의 일행이 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그녀는 나와 헤어질 때와 달리 활력 있어 보였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감정이 올라왔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망가질 것만 같았다.
대신 그녀가 생각날 때면 운동을 했고,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노력으로 마음속 평온이 다시금 찾아올 때쯤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한번 보자는 연락이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예전에 자주 가던 커피가 맛있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약속 날 큰 기대하지 말자고 몇 번을 되뇌고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를 보며 활짝 웃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내게 반갑게 인사를 했고, 나도 그에 맞춰 인사를 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의 이야기, 헤어진 후의 이야기, 현재의 이야기를.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미 선약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답했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이후 나는 이전과 같이 일하고 운동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살았다.
불쑥 그녀에게 연락 하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선택권은 내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때면 더욱 열심히 운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한 번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저번에 먹지 못한 저녁이나 한 끼 하자는 연락이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는 즐겁게 저녁을 먹고 차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시 만난 그녀와의 시간은 여전히 좋았다.
그녀도 그래 보였다.
지금 우리 사이가 대체 뭔지 모호했지만, 괜히 내가 먼저 나서서 이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카페에서 나와 그녀를 배웅해 주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그녀의 버스가 5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평소 배차간격이 길었던 버스라 아쉬웠다.
우리 둘은 정류장을 지나치는 버스들과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응시했고, 그녀의 버스는 금세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왔다.”
그녀가 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왔네. 잘 가.”
“응. 너도.”
그녀가 내게 고개를 돌려 인사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그녀가 버스에 타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앞에 한 사람쯤 남았을 때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너, 만나는 사람 있어?”
나는 그녀의 물음에 무조건 반사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웃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나는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