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드를 배우며 든 생각들
플랜트 업계에서 캐드는 필수적이다. 일을 하려면 간단한 건 그릴 줄도 알아야 하고 당연히 도면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군산에 내려오기 전부터 사장님은 캐드를 배우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쁘다는 핑계와 귀찮음, 그리고 전혀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학원으로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서울에서 학원은 다니지 않았고 가끔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걸로 죄책감을 덜어내려 애썼다.
온갖 선과 기호들, 용어들이 난무하는 설계 도면을 마주하면 언제나 20년도 더 전에 치렀던 적성검사가 떠올랐다. 검사 결과는 매우 빈번하게 내가 '공간지각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원기둥에서 여기를 이렇게 저렇게 자른 뒤 회전시키면 어떤 모양이 되는지, 주어진 입체 모형에 들어맞는 보기는 무엇인지 등등. 복잡한 걸 싫어하고, 성미가 급한 나는 몇 초 정도 문제를 응시하다 찍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어쨌든 난 그런 문제가 싫었고 검사 결과가 그렇게 말하니 20년 넘게 나는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먹고살기 위해서 12월부터 캐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수업은 일대일이었다. 선생님이 명령어 하나를 알려주고 사용 방법을 알려주면 책에 있는 예제를 똑같이 그려내야 했다. 처음엔 버벅거렸으나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시간이 나면 예제 도면을 그렸다. 막상 해보니 공간지각 능력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2주가 되자 기본적인 형태를 그리는 명령어들을 다 배웠고 마지막 주차가 되자 어지간한 예제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냥 막연히 '최소 3개월은 고생을 하겠지, 그래도 반년은 해야 익숙해지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한 달만에 목표하던 수준에 도달했다. 뿌듯하면서도 허무하고, 괜히 걱정했던 과거의 내가 바보 같고 묘한 감정이 일었다.
비슷한 경험이 과거에도 있었다. 취준생 시절 코트라 입사 시험을 준비했던 적이 있다. 경제학 논술 시험이 있기 때문에 전혀 공부해 본 적 없던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준구의 경제학, 맨큐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의 국제경제학 책을 일 년 넘도록 품고 살았다. 경제학은 어느 정도 수학적인 베이스가 필요한데, 나는 '수학 고자'였고, 수리적으로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공부를 시작해서도 항상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었다. 진도는 역시 더뎠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정말 치열하고, 꾸준하게 공부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내가 IS-LM 곡선을 그리며 경제 이론을 설명하고, 수식과 그래프를 들먹이며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지만 이때의 경험 덕에 나는 '전혀 기초가 없는 분야라도 하면 되긴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때의 공부가 아니었다면 주식 투자를 시작할 수도 없었을 거고, 지금처럼 경제, 금융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도 없었을 거다.
서두가 길었다. 요점은 노력하면 뭐가 되든 되더라는 경험을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사실 군산에 내려오는 결정이 맞았나,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도 나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처럼 ‘노력하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그 노력의 산물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그 노력들이 빛을 발하고 그간의 내 경험, 지식들과 연결되어 성과를 내는 때가 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스티브 잡스가 말한 숱한 명언들 중에서도 connecting the dots라는 말을 좋아하고, 종교처럼 믿는다. 내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2020년은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노력하는 해로 삼았다. 캐드 학원을 몇 개월 더 다녀서 캐드 능력과 도면을 보는 능력을 심화시킬 생각이다. 다른 업체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 인벤터를 배워서 공사 전 배관 라인이나 기계장치류의 모델링까지 제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공부해볼 생각이다. 두 번째는 '코딩'에 입문하려고 한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코딩 야학을 시작했다. 최종 목표는 알고리즘 트레이딩과 퀀트 투자에 접목시켜보는 건데 거기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니 일단은 올해는 코딩 입문 및 기초지식을 쌓는 걸 목표로 할 생각이다.
캐드 학원을 다니면서 한 가지 또 깨달은 것은 배우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말자는 거다. 돈을 쓰니 수개월 동안 걱정만 했던 게 한방에 해결됐다. 고작 20만 원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엔 유용한 강의가 넘쳐나고 유튜브만 해도 도움이 되는 비디오들이 수북하다. 돈을 쓰지 않으면 강의나 팁들이 하찮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헤매지 말고 전문가를 찾아가 합당한 돈을 지불하고 배워야 한다.
얼마 전 인스타에서 본 글이다. 한 80대 어르신의 인생에 대한 소회였는데 자신은 번듯한 직장에서 성공한 삶을 살았고 60대 초반에 지인들과 가족들의 축하를 하며 직장에서 은퇴를 했다고 한다. 그러곤 여든이 된 그 순간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기만을 기다려오는 사람 같았다는 거다. 자신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은퇴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올해는 열심히 배워보자’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큰 가르침을 주는 일화였다. 하루하루 때우는 삶 이어선 안된다.
아무튼 2020년 이렇게 채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