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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 Feb 09. 2021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독후감

이 책의 주인공인 ‘경제적 인간’은 허구이며, 현재 살아있거나 이미 세상을 뜬 사람 누구와도 관련이 없음을 밝혀 둔다.
유사한 점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 책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지, 정말로 그 인물과 비슷해서가 아니다.


책을 읽지 않았을 때와 읽고 났을 때 이렇게 다르게 다가오는 머릿말이 또 있을까.(읽기 전에는 경제학 도서에서 왜 이런 소릴 하나 당황함)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전능함을 부여한 대신 보이는 모든 여성에게 무능함을 씌웠다. 이 전제는 매우 작위적이고 편협하나, (선택 또는 판단권이 주어지는 성인 남성) 모두가 쌍수를 들었다. 편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게.


9장까지 읽고 난 이후의 생각은 여성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남성에게서 이 뻔뻔함을 가져와야 하는 게 아닐까… 였다. 의심과 후회가 필요없고 설득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충분한… 성립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확신 뿐인 철옹성같은 뻔뻔함 말이다.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맹신하고 자만하던 경제학에 대한 허점은 그들이 내세운 기초 모델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땅에서 버섯이 자라나듯’ 탄생한 경제적 인간의 성향은 실재하는 인간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재확인시킨다. 경제학자들의 ‘인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세상에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 활동’으로 인정되는 일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남성이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자만 또 자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은 스테이크 하나도 본인이 굽지 않으려 들면서 말이다. 이 역시 ‘경제적 인간’으로서 본인의 능력보다 더 값싼, 또는 값으로 칠 필요조차 없는 여성의 수고로움을 활용하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늘 냉철하게,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존재인 나. 이보다 달콤하고 게으른 전제가 있을까? 심지어 ‘합리적이지 않은’ 여성을 손쉽게 배제시킬 수 있는 논리다. 케인스가 바란 ‘백합’은 무엇을 뜻하는가? 케인스는 ‘백합’에 값을 매기길 원했을까? 케인스의 세상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감히 값을 매기기 어려운 것. 하나는 값을 매길 필요가 없는 것. 어찌 여성혐오와 맥락이 비슷하다.


경제적 인간과 5세 아동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또 있다. 비판 없이 우긴다는 점이다. 단 한번도 자신의 선택에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 선택은 무조건 옳으니까. 맥락과 감정과 상황과 관계가 결여된 인간에게 남는 건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그친 본능 뿐이며, 이는 그들이 경제적 인간의 초기 모델로 제시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진다. 엄마가 짠 옷을 입고,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스스로를 섬에 떨어진 외로운 개체라고 생각한다. 의식주를 모두 여성의 손으로 해결하며 의식주 걱정하는 무인도 인간에 이입한다. 한 번도 지 손으로 코 풀어본 적 없으면서 '역시 우리 인간은 알아서 코도 잘 풀어~' 자위한다. 이렇게 재수없을 수가….


특히 흥미롭게 읽은 장은 5장이다. 남성이 정해둔, 남성에게 유리한, 남성의 것으로 간주되는 ‘표준’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남성이 되려는 여성들의 사례가 인상깊었다. 이 챕터 읽던 어느 날 저녁 지인 모임에서 어떤 남자가 “남장이라는 말은 잘 안 쓰는데 여장이라는 말은 왜 많이 쓰일까?”라는 골때리는 질문을 했다. 여성들이 맞지 않는 옷(표준이든, 대상화든)에 자신을 구겨 넣을 때, 그리고 그 노력의 흐름이 ‘평등을 향한 도약’ 쯤으로 치부될 때, 남성은 표준을 벗어나는 행위를 놀이와 조롱으로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설명해줬더니 어렵다고 무시당했다. 이새끼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태도도 합리적이라고 합리화하겠지…. 


그렇다. 경제적 인간의 행동은 합리적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다만 합리화시킬 뿐이다.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세상과 인간은 소꿉놀이 속 서로의 포지션이 분명한 역할극이 아니었던 것이다. 혐오와 배제는 이 게으른 확신에서부터 시작됐다.


                                                                                ***


여성의 노동은 측정할 필요를 못 느끼는 천연자원처럼 취급된다. 늘 존재할 것이라 추정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노동은 비가시적이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인프라로 간주된다.


‘그렇게 불평하고 도와달라 할 거면 너도 나만큼 벌어오든가.’ 남성들의 흔한 논리다. 집에서 먹고 놀면서 ‘경제적 가치가 없는’ 집안일을 도우라고 요청하는 전업 주부 아내에게 당당하게 내세우는 논리. 그들이 이토록 자신을 합리적이라 자만할 수 있는 이유는 애초에 그들이 설정한 경제적 가치의 범위에 큰 오류가 있었기 때문일테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하찮은 일도 있지만 감히 값어치를 매기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숭고한 일도 있다. 경제적 인간, 노동할 수 있는 남성을 표본으로 설정한 경제학자들은 여성의 노동을 저 두 가지 극단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경제’에서 벗어난 미지의 것으로 추앙하거나, 홀대한다. 


봉사, 헌신, 희생, 모성애, 가사, 육아… 이를 경제적으로 환산하려 들 때 경제적 인간들은 말한다. ‘정 없고 깐깐하다’ 그 누구보다 경쟁을 좋아하고 돈으로 값 매기는 것에 혈안이 된 인간들이 말이다. 


경쟁하도록 태어난(아니 설계된) 경제적 인간은 휴식 따위 필요 없겠지만, 어쩐지 그들은 매일같이 쉼터를 찾고 휴식을 원하고, 그들 스스로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필요’ 정도도 되지 못한다. 가사와 육아가 없었더라면 생존하지 못했을 남성들은 여성을 전경으로 취급했다. 


그러므로 ‘집에서 논다’라는 말은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 줄 아는 그들의 자신만만한 태생적 믿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노동해야 한다는 뜻을 함의한다. 경제학자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경제학은 세상의 반쪽만을 위한 낙관적 주문만을 반복하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시장에 지배당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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