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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 Feb 05. 2020

자투리 영화

무편집본에서도 멈춘 프레임은 단 하나도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르는 ‘림보’라는 비현실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세상을 등진 사람들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역인 림보에서 삼 일 동안 자신의 일대기를 편집 없이 되돌아본 뒤, 가장 행복한 기억 한 가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그 순간 하나만 기억으로 안은 채 천국으로 가게 된다.


의외는 어떠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든 마지막 기억으로 선택하는 순간은 아주 사소한 찰나라는 것이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자다 문득 깼을 때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주던 엄마의 그 눈빛, 명성을 떨치며 살았지만 가난했던 어릴 적 죽 한 그릇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 고운 채에 걸러진 기억만을 품고 떠나는 이의 얼굴은 바람 없는 백사장의 풍경처럼 평온하고 고요하다.


  때론 대단한 순간이 아님에도 충만한 행복을 느끼곤 한다. 감독도 이를 겨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장장 삼 일 동안 그들의 생을 돌려보며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길고 따분한 생애를 기승전결의 구분이 뚜렷하고, 영화적 장치가 선명하게 드러나며 개연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하나의 시나리오로 수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 하나의 행복을 선택 후 나머지 모든 시간은 망각한다. 늘 그렇듯 갖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어렵기에, 고르고 고른 장면으로 만든 유일한 서사는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이 삼 일 동안 삶을 돌려보고 나흘 동안 삶을 재현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있다. 이런 일도 있었죠, 또는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한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요. 오래 방치되어 굳어버린 빵조각처럼 내던져진 기억들은 쉽게 소환되지 않는다.


  편집은 취사선택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개연성 없는 시퀀스의 집합체인 게 아닐까. 시간의 흐름이라는 기준만이 그것들을 정리할 수 있을 뿐이다. 기록하지 않는 이상 이 기준 역시 뒤죽박죽 섞여버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과거로 밀려난 이야기들은 후보정을 거친 영상처럼 미화되거나 탈락되거나 왜곡되거나, 또는 해상도가 낮아진 이미지처럼 훼손되거나 임의로 각색되어버린다.


  기억은 필름을 단순히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선별하여 저장한다. 안 좋은 기억은 잘라내고 좋은 기억만 남겨두는 사람들의 심리처럼, 또는 그 반대로. 우리의 기억 자체가 편집 과정이다. 인화되지 못한 필름은 손쉽게 버려져 천국에 들고 갈 수 없는 기억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다음 시간이 오지 않듯 편집되어야 마땅할 순간은 없다. 비록 사소한 우리의 행동은 영화의 B컷에조차 쓰일 수 없겠지만, 그 모든 모습이 모여서 한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영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서의 배우가 연기를 하듯 우리는 암묵적인 독자와 시선 앞에서 연기를 하는 삶의 연속을 산다. 타인이 볼 때만 청소를 열심히 하는 아이마냥 꾀를 부리는 것부터 나를 저버리는 태만과 게으름까지, 또는 법적 규제나 사회 규범 앞에서 모난 마음을 다스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감쪽같이 없던 시퀀스가 된다.


  휴지통에 들어간 기억들은 화석처럼 기억의 지하에 매몰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마음을 도려내 단면을 확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둡거나 뭉툭하거나 흐릿한 순간들이 토대를 뚫고 들어갈수록 틈이 생긴다. 한 순간도 보이지 않을 때가 없던 삶을 살 때는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 얇고 질기게 진동하다, 우리가 걷는 것을 멈추었을 때 깨닫게 한다. 묻는 순간이 많을수록 지반은 약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비울 수 없는 포화 상태의 휴지통을 자근자근 밟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은 버릴 수 있어도 실재했던 과거의 시간은 파묻을 수 없음을. 국소 마취 주사를 놓는 것처럼 어느 시절을 마취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검열하고 선별할수록 지진은 빨리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나를 이야기할 때 편집본만을 떠올리지만 진짜 본질은 잘려나간 이야기, 파묻힌 이야기, 편집되지 않은 따분하고 고루한 필름에 있다. 시공간 초월이 가능한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현재의 나는 굴절된 기억을 끌어 모아 시간 순으로 정렬해 가지런한 앵글로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러나 인생은 영화와 달리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고 모든 행동에 상징과 은유가 깃들어있지도 않아 해석할 필요도 없으며, 발 딛는 대로 살다 까먹고 싶은 건 까먹어버린다. 결과를 위한 복선이 깔려있지도 않으며 우리의 잘못에 대가를 치를 수도 치르지 않을 수도 있다. 우연이 필연이 될 수도 있고 필연이라고 생각했던 인연이 사실은 파국과 맞물린 비극적 우연일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거니와 캐릭터성이 확고하지도 않다. 선택을 위해, 또는 정직을 위해 철저히 정렬할 필요가 없다. 인생이야말로 최고의 비효율을 자랑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만일 이런 미미한 존재들이 길고 긴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마땅히 그들을 설명하는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커다란 행복이나 불행보다도 그저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토하고, 헤어진 연인에게 구질구질하게 메시지를 보내고, 새벽에 손 가는 대로 써내려간 두서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않을까. 편집 과정에서 탈락한 자투리 시퀀스들이 마지막 필름의 자격을 얻는 건 아닐까. 기억의 단면을 잘랐을 때 가장 고요히 잠든 것은 죽 한 그릇, 비 오는 날의 휴식, 사랑하는 이의 무릎을 베고 잠든 순간이다. 끝까지 견디는 것은 따분한 일이므로 가장 따분한 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


  기억은 등에 업으면 볼 수 없지만 시간은 접거나 잘라낼 수 없다. 행복한 기억은 없을지 몰라도 행복한 순간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죽음을 겪은 후에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달리는 순간엔 발치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장애물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지만 사실 달리지 않으면 그것은 지하에서 힘겹게 움터 올라 발치에 한 번 걸리기 위해 아등바등 머리를 내민 죽 한 그릇의 순간이라는 걸 알아챈다. 등장인물에게 주어진 삼 일은 또다시 취사선택을 위해 달리는 시간이 아닌, 레일을 돌아가는 시간이다. 무너지고 갈라진 땅에 화석 같은 행복이 널브러져있다. 어쩌면 박제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주워 담아 품에 녹여낼 순간 하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림보에 남아 죽은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라 지시하는 직원이 되더라도 우리에겐 각자 주어진 따분한 자투리 작품이 있다. 관객은 레일을 돌아가는 본인뿐이지만 그 어떤 타인을 겨냥하지도 않은 순수하고 우연적인 서사들이 진실 된 민낯으로 놓여 있다. 심하게 우울하지도 몹시 기쁘지도 않은 그런 자투리 영화들이 림보에선 매일 상영된다. 마구잡이로 덩어리진 인생을 매끈하고 길게 잘라내었을 때, 그 모든 단면은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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