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하 May 10. 2022

나의 사랑 초록이

소중한 양식을 끌어안아 준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나의 초록이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밤새 아픈 아이는 없었는지, 아가 손 같은 싹을 피워낸 아이는 또 누군지,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오늘은 몇 달 전부터 비실비실 죽어가는 벤자민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추운 겨울을 열다섯 번 지나오는 동안에도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굶주린 아이처럼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행여 화분이 좁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나쁜 벌레가 뿌리를 갉아먹은 것일까, 물을 너무 많이 주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이 넘쳐서 병약해진 것일까, 그렇다면 잠시 무관심하기로 하자, 이래저래 서성거리며 분갈이를 해주고 영양제도 주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으로 자리도 옮겨 보았습니다.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영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15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자라주던 아이가 왜 갑자기 죽어가는지 나는 영문도 모르고 가슴만 동동 거리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요, 15년 전이군요, 벤자민과의 인연이 시작된 날이!


어린날, 우리 집 마당에는 꽃밭이 있었습니다. 식물들을 귀히 여기시는 엄마, 아버지는 봄이 되면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태양이 높아질수록 이파리는 진초록으로 무성해지고 장미, 채송화, 분꽃, 나팔꽃, 과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고 했습니다. 라일락 나무는 담 밖으로 늘어져 아스라한 보랏빛 향을 투명하게 전해 주었고  핏물처럼 진한 동백꽃잎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뚝뚝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국화를 유난히도 좋아하셨지요. 소쩍새가 울어야만 피는 줄 알았던 국화는 마당에서부터 장독대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구석구석 국화의 행렬은 끝이 나지 않게 길고도 아득히 줄을 서 있던 기억이,  내가 열아홉을 보내던 그해에서 멈춰버렸습니다.  꽃밭은 황폐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엄마가 더 이상 꽃밭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꽃밭에 대한 기억을 잃었던 듯합니다.  돌보지 않는 꽃밭의 기억을 무의식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식물 키우기'는 나와 아무런 연도 없는 듯 도통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인이 된 나는 그저 자연 속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를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스쳐 지나갔지만 식물을 집안으로 들이는 일은 여전히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일상이 소소(炤炤)하게 다듬어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무심결에 지나던 산책길에서 바람이 실어온 라일락 꽃향기가 무의식 저 너머를 흔들어댑니다. 어린 날의 꽃밭에서 맡았던 그 아스라한 보랏빛 향이었습니다. 그 향의 진동은 신비로운 마법처럼, 국화를 매만지시던 아버지의 환영으로 다가와 전신을 휘감습니다. 나는 비로소 그 초록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가슴에 차오르는 환희를 체험하면서 그날로 당장 화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내 눈에 다부지게 들어왔던 초록이가 벤자민이었습니다. 그 아이로 시작된 식물 키우기가 이제는 나의 빠질 수 없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베란다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거실까지 즐거운 자리다툼을 하는 초록이들은 나의 친구이고 스승이고 보살펴야 하는 아기들입니다.

 

'식물을 키우는 엄마를 보면 꼭 말 못 하는 아기를 키우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내 딸아이만큼이나 어여쁜 고것들이 있기에 허허로운 시간도 마다 하지 않고 오히려 풍요로울 수 있었습니다. 단단한 흙을 뚫고 나오는 여린 싹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찬탄합니다. 이파리를 달고 생리적으로 뻗어나가는 가지 하나하나에서 무한한 우주를 누립니다. 떨어지는 꽃잎 하나 두울에서 스스로 지고 가는 겸허를 배웁니다. 아침마다 인사를 하는 나는 그 소중한 양식을 눈과 코로 들여 마시고 끌어안아 줍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그렇게 처음으로 나의 베란다에 와서 옹기종기 아우 초록이들을 거느렸던 벤자민,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갔는데, 이제는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연의 끝자락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허전하고 출처도 없는 슬픔이 더더욱 보태어져서 그 크기가 산더미처럼 불어납니다. 하물며 이 작은 생명도 그러할진대 - 사람의 인연은 더 할 테지요 - 그래도 가야 할 것은 명징하게 보내야 합니다. 내게 오랫동안 기쁨을 주었던 벤자민을 다시 대자연으로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는 속삭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사물이든, 생명이든, 집착하지 말고 사랑하라, 채우지 말고 비워내라, 아버지의 환영이 잠시 벤자민에 머물다가 사라집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