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대리석 감옥, 그리고 피어나는 꽃 (에필로그)

[다시, 봄] 아빠의 희생을 껴안는 두 아이와, 정우의 진짜 '봄'

by 이세라

정우가 남기고 떠난 넓은 아파트의 거실은 숨이 막힐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붉게 물든 단풍이 한창이었지만,

서늘한 대리석 식탁에 엎드려 있는 윤희의 시간은

여전히 정우가 떠나가던 마흔여덟의 그 봄날 아침에 잔인하게 멈춰 있었다.

윤희는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20년 전의 그 낡고 구겨진 이혼 서류를 멍하니 쓰다듬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해 도망치려 했던 20년 전.


윤희는 남편의 피 묻은 돈으로 마련된 이 안락한 아파트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요양병원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던 친정엄마는,

이혼 소식을 듣고는 사위를 향한 뼈저린 죄책감에 곡기를 끊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서윤이와 지훈이 역시 이 넓은 집으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윤희는 매일 밤 불 꺼진 거실을 배회하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스물다섯의 눈부셨던 남편을 늙고 병든 노가다꾼으로

갉아먹은 대가로 얻어낸 이 쾌적하고 넓은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끔찍한...


'윤희만의 무덤이자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다.'


같은 시각.

경기도 외곽의 상가 신축 공사 현장.


시멘트 먼지가 뽀얗게 날리는 허름한 함바집 옆 가설 숙소 앞.


낡은 작업복을 입은 정우가 수돗가에서 거칠게 세수를 마친 뒤,

욱신거리는 무릎을 주무르며 허리를 펼 때였다.


"아빠!"

익숙하고 맑은 목소리에 정우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큰딸 서윤이가

두 손에 무거운 반찬통과 종이가방을 든 채,

흙먼지 날리는 공사판 한가운데 서서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여긴 먼지 날리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아빠가 주말에 서울로 간다고 했잖아."

정우가 허둥지둥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며 다가가자,

서윤이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아빠의 굽은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값비싼 향수 냄새 대신,

시멘트와 땀에 전 정우의 낡은 작업복 냄새가 서윤이의 코끝을 먹먹하게 찔렀다.

"아빠. 나 지훈이한테 편지 왔어."


"첫 휴가 나오면 엄마 있는 집 말고, 아빠 있는 이 숙소로 곧장 오겠대."

서윤이가 종이가방에서 군사 우편 도장이 찍힌 빳빳한 편지 봉투를 꺼내

정우의 거칠고 마디 굵은 손에 쥐여주었다.

"이 녀석이... 지 엄마 혼자 있는 집에 안 가고 여길 왜 와."

"잠잘 곳도 마땅치 않은데."

정우가 멋쩍게 웃으며 봉투를 열었다.


짧게 깎은 머리로 늠름하게 경례하던 아들의 글씨가

편지지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 저 지훈입니다.

훈련소에서 첫 월급 받은 거, 아버지 통장으로 다 보냈습니다.


저 스무 살 될 때까지,

그 숨 막히는 집구석에서 저희 지키느라 혼자 얼마나 끔찍하셨습니까.


누나도 저도,

아버지가 엄마 사랑해서 참고 사는 거 아니라는 거

옛날부터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새벽마다 혼자 거실에서 우시는 거 보면서

저도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많이 울었습니다.


무릎도 아프신데 제발 무리해서 일하지 마세요.


저 제대하면 누나랑 제가 돈 벌어서 아버지 제일 좋은 집으로 모실 거니까,

이제 아버지 인생 사세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정우의 시야가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로 흐려졌다.


글씨가 눈물에 번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20년 동안 눈과 귀를 닫고 입을 틀어막은 채 견뎌왔던 그 지옥 같은 희생을,

어린 핏덩이인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은 묵묵히 지켜보며 함께 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우가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떨구자, 서윤이가 다가와 정우의 거친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아빠. 나 어렸을 때... 엄청 비 많이 오던 날, 아빠가 유치원 버스 정류장에 데리러 왔던 거 기억나?"

그 순간, 정우의 굽은 등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20년 전, 윤희가 다른 남자의 냄새를 묻히고 나타났던 그 파멸의 날이었다.

"나 그날 전부 다는 아니어도, 조각조각 다 기억해."


"비에 젖은 엄마한테서 나던 낯선 냄새, 그리고 그날 밤..."

"거실 식탁에서 혼자 종이를 쥐고 숨죽여 울던 아빠 뒷모습."


서윤이의 맑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몰랐는데..."

"머리 좀 크고 나서 엄마 아빠 껍데기만 남은 부부로 사는 거 보니까 알겠더라."

"그날 아빠가 들고 울던 종이가 뭔지."

"아빠가 나랑 지훈이 지키려고, 그날부터 자기 인생 버리고 평생 피눈물 참으며 살았다는 거."

"나 다 알고 있었어."


서윤이의 맑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아빠. 우리 안 버려줘서 고마워."


"나쁜 엄마한테 우리 안 뺏기고, 끝까지 아빠가 다치면서 우리 지켜줘서 진짜 고마워."

"이제 아빠 짐 우리가 다 질 테니까, 아빠는 그냥 우리 옆에서 웃기만 해."

그것은 정우가 20년 동안 시멘트 바닥을 기어 다니며

흘렸던 모든 피눈물을 한순간에 씻어 내리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거룩한 구원이었다.

정우는 차마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채,

서윤이를 자신의 넓고 따뜻한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지훈이의 편지를 꽉 쥔 그의 투박한 손등 위로,

뜨겁고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비록 아내의 배신으로 청춘은 잿더미가 되었고,

몸은 골병이 들어 망가졌지만.


자신이 지켜낸 두 아이는

세상 그 어떤 꽃보다도 바르고 단단하게 피어나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함바집 마당을 맴돌았지만,

정우의 가슴속에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찬란한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스무 살의 맹세를 온몸으로 지켜낸 가난한 아비의 입가에,

마침내 티 없이 맑고 평온한 진짜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길고 잔인했던 겨울의 끝에서 피어난, 정우 인생의 두 번째 봄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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