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아내의 오만한 착각을 박살 내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남편
막내 지훈이가 입대를 위해 집을 떠나고 며칠이 지난,
마흔여덟의 봄날 아침은 비현실적으로 평온했다.
창너머로 부서져 들어오는 봄햇살은 눈부셨고,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목련은 제 무게를 못 이길 만큼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곧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 내릴, 지독히도 잔인한 아름다움이었다.
식탁의 정중앙.
정우가 20년 동안 뼈를 깎는 노가다로 기어이 장만해 낸 아파트의 서늘한 대리석 식탁 위에는,
그 흔한 꽃병 하나 대신 하얀 서류가 놓여 있었다.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
윤희는 오랫동안 식어버린 커피잔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커피는 이미 까맣게 식어 그 어떤 향기도 내뿜지 않았다.
온기를 잃어버린 지 20년이 훌쩍 넘은 그녀의 결혼 생활처럼.
건너편, 윤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정우가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 또한 서류 봉투 옆 거실 바닥의 무늬를 비정상적으로 꼼꼼하게 훑고 있었다.
28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 허용된 침묵치고는 너무 무겁고, 지나치게 예의 발랐다.
정우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 없는 낙엽처럼 바스락거렸다.
"결국, 도장을 찍는구나. 우리."
윤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우를 보았다.
한때는 그녀 세상의 전부였던 남자.
자신의 군 복무 2년을 묵묵히 기다려준 윤희에게,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겠다며 제대하는 날 껴안고 눈물로 맹세하던 남자.
가난했던 이십 대의 옥탑방에서 단 한 장뿐인 전기장판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하얗게 입김을 불던, 그 다정하고 눈부셨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팍팍한 현실과 훌륭한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하얗게 새버린 머리칼과 깊게 팬 미간 주름,
그리고 마디가 굵게 휘어버린 손가락을 가진 낯선 노인이 되어 있었다.
윤희는 목으로 넘어오는 씁쓸함을 삼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약속했잖아. 둘째 지훈이까지 성인 돼서 군대 가면, 그땐 정말 우리 각자 인생 살기로."
"약속… 그랬지. 우리가 애들 부모라는 이름표 하나로, 이 껍데기 같은 집에서 버틴 게 벌써 20년이니까."
정우가 텅 빈 눈으로 슬프게 웃었다.
윤희는 애써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감정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며 싸우던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윤희는 지난 20년 동안 정우가 자신을 용서하려 애썼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가난으로 아내를 방치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 때문에 차마 자신을 내치지 못하고 곁에 두었다고,
그렇게 애틋하고도 오만한 착각 속에서 살아온 20년이었다.
"내가 먼저 찍을게. 당신은 천천히 확인해 보고 찍어."
정우가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낡은 볼펜을 꺼내 서류의 빈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관절염으로 퉁퉁 부은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정우가 서류를 윤희의 앞으로 밀어주며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세상의 모든 피로를 짊어진 듯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텅 빈 눈동자.
"다 썼어. 그동안… 모자란 사람 만나서 고생 많았다, 윤희야."
그 담담한 한마디에 윤희는 명치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옛날, 피 묻은 손으로 널 여왕처럼 살게 해 주겠다던 스물다섯의 맹세가 떠올랐다.
내가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당신이 내 외도를 덮어주려 안간힘을 쓸 때 내가 조금만 더 다가갔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식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윤희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펜을 집어 들었다.
'차윤희.'
그녀 역시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28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계절의 끝을 알리는 마침표가 종이 위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윤희가 볼펜을 내려놓고,
길었던 인연의 끝에 묘한 후련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윤희야. 이 서류, 같이 법원에 내주면 안 될까."
정우가 자신의 의자 옆에 내려두었던 낡은 비닐봉지 하나를
서늘한 대리석 식탁 위로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방금 윤희가 서명한 깨끗한 이혼 서류 옆으로,
누렇게 변색되고 모서리가 까맣게 닳아빠진 낡은 종이 뭉치가 놓였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잔뜩 뭉갰다가 억지로 펴놓은 듯 끔찍한 주름이 가득 잡혀 있는 서류였다.
"이게... 뭔데?"
윤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비닐을 벗겨냈다.
그리고 누렇게 바랜 종이의 맨 윗장을 확인한 순간,
과거의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던 윤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거짓말처럼
싹 가시며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
서류 오른쪽 상단에 희미하게 찍혀 있는 20년 전 그 장마철의 날짜.
남편 강정우의 이름 옆에는 20년 전...
낡은 피시방에서 찍었던 붉은 인주 자국이 검게 변한 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이 서류는 그날..."
윤희의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20년 전 그 눅눅했던 반지하에서,
자신의 외도를 추궁하던 정우가 서윤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처참하게 구겨 넣었던 바로 그 서류였다.
버린 줄로만 알았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지워버렸던 그 파멸의 증거.
"버릴 수가 없었다."
"20년 동안, 장롱 맨 밑바닥에 숨겨두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꺼내봤어."
정우의 목소리는 윤희를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투가 아니었다.
20년 동안 자신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버텨온
한 늙은 짐승의 처절하고도 비참한 고해성사였다.
"네가 그놈 냄새를 묻히고 들어왔던 날."
"널 내쫓으면 우리 서윤이랑 지훈이가 평생 애미 없는 자식 소리 들으며 가난하게 살까 봐."
"내가 너무 무능하고 돈이 없어서 이 구겨진 종이 하나를 차마 들이밀지 못했어."
"그래서 미련하게 약속했지. 애들 다 클 때까지만 껍데기로 살자고."
정우의 굽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붉게 충혈된 그의 두 눈에서 탁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혹시라도 내가 뙤약볕에서 뼈가 부서져라 일해서 돈을 벌어오면..."
"아파트로 이사하고 좋은 옷 입혀주면, 네가 옛날처럼 나를 보고 한 번은 웃어주지 않을까."
"그놈한테 갔던 마음이 나한테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이 구겨진 서류를 내 손으로 찢어버릴 날이 오지 않을까."
"20년 동안 그 바보 같은 미련 하나 붙잡고, 매일 새벽 공사판에 나갔다."
윤희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남편을 속였다고 믿었던 20년.
남편이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아 외로웠다고 탓하며 밖으로
겉돌았던 그 모든 뻔뻔한 시간들 동안.
남편은 모든 배신을 꿰뚫어 보고도 쫓아내지 못한 자신의 가난을 탓하며,
혹시나 아내의 마음이 돌아올까 봐 시멘트 먼지 속에서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끌어안고 20년을 매일같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근데 윤희야... 내가 너무 늦었지."
"내가 무식하고 둔해서, 널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는 데 20년이나 걸려버려서 네 마음이 영영 떠나버렸어. 다 내 죄다."
정우가 자신의 마디 굵은 손으로 낡은 20년 전의 서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내를 향한 복수나 단죄가 아니라,
스무 살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못난 가장의 뼈저린 후회와 자책만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아파트 전세금, 당신 통장으로 다 돌려놨어."
"나는 오늘부터 다시 현장 함바집 숙소로 들어갈 거니까."
"당신은 여기서 살아. 애들 올 때 친정이라고 올 곳은 있어야지."
그것은 윤희의 오만했던 지난 20년을 산산조각 내는,
어떤 분노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이었다.
차라리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하며 자신을 내쫓았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정우는 끝까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를 이끌고
모든 것을 내어준 채 빈손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여, 여보... 내가... 당신이 그렇게까지 아픈 줄도 모르고..."
윤희의 무릎이 맥없이 꺾이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더러운 욕망이 이토록 선량하고 바보 같은 한 남자의
인생 전체를 어떻게 갉아먹고 난도질했는지,
그 20년이라는 세월의 진짜 무게가 이제야 윤희의 숨통을 짓이기며 덮쳐오고 있었다.
"미안해, 여보... 내가 죽일 년이야. 내가 미쳤었어... 나 버리지 마, 정우야. 제발..."
윤희는 바닥에 엎드려 정우의 낡은 작업화에 얼굴을 비비며 짐승처럼 꺽꺽거리고 오열했다.
스물다섯의 애틋함을 추억하던 우아한 중년 여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자신의 끔찍한 죄악 앞에 짓눌려 피를 토하는 비참한 껍데기만이 거실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정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윤희를 더 이상 안아주지 못했다.
그의 몸과 마음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너무 낡고 철저하게 부서져 버린 후였다.
정우는 낡은 작업복 주머니에 두 장의 이혼 서류를 조심스럽게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린 윤희를 남겨둔 채,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철컥.'
아파트의 문이 열리고, 따스하고 눈부신 봄바람이 밀려 들어와 정우의 하얀 백발을 부드럽게 흩트려놓았다.
베란다 밖의 하얀 목련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정우의 두 눈에는 더 이상 그 봄날의 찬란함이 담기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20년의 짐을 내려놓았지만,
그가 돌아갈 곳은 결국 흙먼지 날리는 차가운 공사판 숙소뿐이었다.
스무 살의 눈부셨던 맹세는 끝이 났고,
마흔여덟의 늙고 지친 남자는 봄햇살 속으로 한없이 초라하고 쓸쓸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누구의 승리도 아닌, 가장 서글프고 잔인한 마흔여덟의 안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