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이혼 서류를 구겨 넣으며 20년짜리 쇼윈도 부부를 선고하다
오후 여섯 시 반.
뜨거웠던 뙤약볕이 한풀 꺾이고 핏빛처럼 붉은 노을이 반지하 창문을 비스듬히 넘어 들어올 무렵,
뻑뻑한 현관문이 무겁게 열리며 정우가 들어섰다.
하루 종일 40킬로그램짜리 시멘트 포대와 씨름한 그의 작업복은 땀과 회색 흙먼지로 딱딱하게 굳어 마치 낡은 갑옷처럼 변해 있었다.
정우는 신발을 벗으며,
작업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 점심시간.
식사도 거른 채 흙먼지 흩날리는 작업복 차림으로 현장 근처의 어두컴컴한 피시방 구석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인쇄해 온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였다.
오후 내내 땀에 절은 주머니 속에 품고 일한 탓에, 하얗던 에이포 용지는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져 있었고 모서리는 시멘트 가루가 묻어 까맣게 닳아 있었다.
거실에서는 달콤하고 짭짤한 고기 냄새가 반지하 특유의 곰팡내를 덮으며 진동하고 있었다.
정우가 식탁에 남기고 간 피 같은 십만 원으로 동네 정육점에서 장을 보아온 듯,
윤희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돼지고기를 볶고 있었다.
아침에 탐욕스럽게 덧발랐던 붉은 립스틱은 대충 지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옆모습에는 내연남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오만하고 들뜬 생기가 가득했다.
남편의 피 같은 돈으로 밥상을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남편의 그 멍청하고 둔감한 순박함을 철저하게 조롱하고 비웃고 있음이 역력했다.
"여보, 왔어? 씻고 얼른 나와. 당신이 주고 간 돈으로 애들 먹일 고기 좀 샀어."
윤희가 뒤를 돌아보며 한없이 다정하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제 비를 쫄딱 맞고 들어와 벌벌 떨며 눈치를 보던 그 파리한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우는 그 뻔뻔하고 화사한 아내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분노조차 일지 않는, 지독한 허탈감과 서글픔이 발밑에서부터 차갑게 차올랐다.
정우는 낡은 식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흙먼지가 하얗게 묻은 손으로,
들고 있던 눅눅한 이혼 서류를 식탁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마찰음이 그 좁은 거실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윤희야."
정우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에, 윤희의 국자를 젓던 손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남편이 자신을 여보나 당신이 아닌 이름 석 자로 부른 것은,
스무 살 가난한 연애 시절 이후로 무려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봐. 밥 먹기 전에, 도장부터 찍자."
윤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와 식탁 위에 놓인 구겨진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땀에 번진 잉크 자국 사이로 인쇄된 글귀를 읽어 내려간 순간,
윤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거짓말처럼 싹 가시며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여... 여보. 이게, 이게 뭐야? 이혼 서류라니, 갑자기 당신 왜 이래?"
"나 어제 우울증 약 타러 갔던 거 엄마한테 다 들었잖아."
"수진이라는 그 놈."
"남양주 북한강. 그리고 네 젖은 원피스에서 진동하던 그 지독한 남자 향수 냄새까지."
정우의 갈라진 입술에서 무심하게 튀어나온 단어들에,
윤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쿵, 하고 거실 바닥에 비참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고 믿었던 그 바보 같고 둔감한 남편이,
자신의 가장 깊고 더러운 바닥을 새벽부터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끔찍한 공포가 윤희의 목을 잔인하게 조여왔다.
"돈이 없어서, 내가 널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에서 평생 호강시켜 주질 못해서..."
"네가 다른 온기를 찾아간 거라면... 널 때리거나 원망하지 않을게."
"다 내 무능함이 만든 일이니까."
"청약 통장에 있는 돈이랑 이 집 전세금 삼천만 원 빼서, 위자료 대신 전부 네 통장으로 넣어줄 테니까."
"미련 없이 도장 찍고 그놈한테 가라."
정우의 목소리는 분노로 타오르지 않았다.
체념과 참담함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남자의 가장 슬픈 사형 선고였다.
윤희는 바닥을 기어가 정우의 흙투성이 작업복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전 재산을 준다 한들, 애 둘 달린 빈털터리 노가다꾼의 이혼녀를 도영이 받아줄 리 만무했다.
도영에게 자신은 남편 몰래 만나는 짜릿하고 값싼 유희거리일 뿐,
호적에 올리고 책임져야 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윤희 스스로가 가장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 찬란한 세계를 즐기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이 바보 같은 남편이라는 비루하지만 안전한 울타리가 반드시 필요했다.
"여보! 내가 미쳤었어!"
"내가 이 눅눅한 반지하에서 숨통이 막혀서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다신 안 그럴게, 나 당신이랑 애들 두고 어디 안 가! 제발 한 번만 살려줘, 여보!"
윤희가 짐승처럼 흉한 소리를 내며 오열했다.
그녀의 눈물과 콧물이 정우의 더러운 바짓단에 끈적하게 늘어붙었다.
정우가 그 가증스러운 아내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익, 하고 안방 문이 빼꼼히 열리며, 안방에서 혼자 까무룩 잠이 들었던
서윤이가 부모의 험악한 분위기에 놀란 얼굴로 걸어 나왔다."
서윤이의 등 뒤로는 배가 고픈지 칭얼거리는 백일 된
지훈이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좁은 거실로 날카롭게 새어 나왔다.
"아빠아... 엄마 왜 울어? 아빠가 엄마 혼냈어?"
서윤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시멘트 먼지가 하얗게 묻은 정우의 거친 오른손을
자신의 작고 따뜻한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아이의 그 보드랍고 따스한 체온이 닿는 순간,
정우의 심장이 수만 개의 유리 조각에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저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타락한 여자를 내쫓는다면.
나는 저 어린 핏덩이들을 홀로 등에 업고 새벽마다 흙먼지 날리는 공사판을 전전해야 한다.
아니면 쥐꼬리만 한 위자료를 쥐여주고 저 괴물 같은 여자에게 양육권을 넘겨버려,
내 아이들이 다른 낯선 남자의 눈치를 보며 평생 가난과 상처 속에서 방치되게 만들어야 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은 종이 한 장이면 끝날 일이었으나,
내 아이들의 하늘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비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정우는 피가 나도록 꽉 깨물고 있던 입술에서 비릿한 쇠맛을 느끼며,
천천히 무릎을 꿇어 서윤이를 자신의 넓은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공주님."
"아빠가 엄마한테 미안한 일이 있어서 그래. 우리 서윤이 배고프지?"
정우는 서윤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반대쪽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그 눅눅한 이혼 서류를 거머쥐었다.
'빠지직.'
하고 종이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정우는 그 서류를 처참하게 구겨
자신의 작업복 깊은 주머니 속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정우는 서윤이를 다독여 안방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방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닥에 주저앉은 윤희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세상의 전부였던 남자의 눈빛은,
이제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은 잿빛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울지 마라. 안 쫓아낼 테니까."
정우의 그 건조하고 쇳소리 나는 한마디에, 윤희의 흐느낌이 마법처럼 뚝 멎었다.
"대신, 약속해라."
"방 안에서 울고 있는 저 핏덩이 지훈이가 스무 살 성인이 돼서 군대에 가는 그날."
"딱 그때까지만, 내 아이들의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 껍데기 같은 집에서 살아."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남은 이십 년의 세월을 통째로 제물로 바치겠다는 가장 처절한 맹세이자,
윤희를 향한 끔찍한 쇼윈도 부부의 선고였다.
"지훈이가 우리 품을 떠나는 날."
"그때 이 구겨진 서류에 도장 찍고, 우리 각자 인생 살자."
"애들이 받을 상처 다 아물 때까지, 우리 부모라는 껍데기 하나로 죽은 듯이 버티는 거다."
"할 수 있겠어?"
바닥에 주저앉은 윤희는 멍한 눈으로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당장 쫓겨나지 않는다는 기괴한 안도감과,
앞으로 평생을 남편의 경멸 속에서 버텨야 한다는 비참함이 뒤섞였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동아줄을 잡은 윤희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옥문을 스스로 열고 걸어 들어간 아빠와,
남편의 그 피눈물 나는 희생을 방패 삼아 더욱 완전한 괴물이 되어갈 엄마.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잔인한 쇼윈도 부부의 제2막이,
낡은 반지하의 저녁 밥상머리에서 그렇게 서글프고 기괴하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안방은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등을 돌리고 누운 정우의 귀에,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윤희의 희미한 휴대전화 타자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서윤이의 눈물과 지훈이의 울음소리를 방패 삼아 위기를 넘긴 윤희는,
이제 남편에 대한 마지막 알량한 미안함마저 완벽하게 지워버린 상태였다.
'들켜도 쫓겨나지 않는다는 기괴한 내성이 생겨버린 괴물.'
윤희는 숨죽여 우는 남편의 방문 너머에서,
도영에게 내일 낮에 다시 오피스텔로 가겠다는 밀회 문자를 스스럼없이 전송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기척을 듣고 있던 정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머니 속에 처박힌 구겨진 이혼 서류가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정우는 소리 없이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 되는 그날까지,
자신은 철저하게 눈이 멀고 귀가 먹은 허수아비가 되어야만 했다.
가난한 아비가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비참한 헌신이었다.
그날 이후, 장맛비가 무려 스무 번이나 더 창문을 때리고 지나갔다.
세월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침묵의 연속이었다.
윤희는 철저하게 두 얼굴의 여자로 살았다.
아이들 앞에서는 살가운 엄마의 껍데기를 뒤집어썼지만,
정우와 단둘이 남겨질 때면 마치 벌레를 보듯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도영과의 관계가 끝난 뒤에도 그녀의 은밀하고 잦은 외출은 계속되었고,
정우의 피 땀 묻은 생활비는 윤희의 화장품과 옷값으로 끊임없이 증발했다.
하지만 정우는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아내의 뒤를 밟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새벽 다섯 시면 말없이 무거운 안전화에 발을 밀어 넣고
공사판으로 나가는 기계가 되었다.
시멘트 가루는 정우의 폐를 서서히 갉아먹었고,
무거운 철근은 그의 꼿꼿했던 허리를 굽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우는 그 피눈물 나는 육체의 붕괴를 담보로,
기어이 가족들을 눅눅한 반지하에서 꺼내 볕이 잘 드는 번듯한 아파트로 옮겨 놓았다.
아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아비의 독한 책임감이었다.
숱이 많던 검은 머리에는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백발이 내려앉았고,
투박했던 손마디는 관절염으로 밤마다 퉁퉁 부어올라 숟가락조차 제대로 쥐기 힘들게 변해갔다.
그 헌신 위에서, 큰딸 서윤이는 장학금을 받으며 번듯한 대학을 졸업해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방 안에서 칭얼거리던 핏덩이 지훈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늠름한 군 입대를 앞둔 스무 살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눈부신 봄날의 어느 아침.
스물여덟이었던 정우가 어느덧 마흔여덟이라는 늙수그레한 중년이 되어버린 그 무거운 봄날이었다.
"아빠. 나 갈게."
"제대할 때까지 건강하게 잘 계셔야 돼."
"무릎 아프니까 무리해서 현장 나가지 말고."
커다란 배낭을 멘 지훈이가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정우를 꽉 끌어안았다.
굽은 등을 다독이는 아들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길에,
정우는 주름진 눈가로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키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와."
독립하여 서울로 떠난 서윤이에 이어,
막내 지훈이까지 훈련소로 떠나는 날이었다.
지훈이의 뒷모습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정우는 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손을 흔들었다.
아들이 남기고 간 온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서늘한 대리석 바닥이 깔린 넓은 집안에는 이내 숨 막히는 적막만이 찾아들었다.
이제 이 집에는,
아이들이라는 거대한 방패막이가 완벽하게 사라지고 오직 마흔여덟의 정우와 마흔여덟의 윤희,
두 사람만이 남겨지게 된 것이다.
윤희는 아들이 떠나자마자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웠다.
"여보. 나 오후에 동창 모임 있어서 나갈 거니까 저녁 알아서 차려 먹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뻔뻔하고 이기적인 아내의 뒷모습.
정우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관절염으로 삐걱거리는 무릎을 굽혀, 정우는 장롱 맨 밑바닥에 놓인 낡은 철제 상자를 꺼냈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낡고 누런 종이 뭉치 하나가 비닐에 조심스럽게 싸여 있었다.
20년 전, 아이들의 울음소리 앞에서 차마 건네지 못하고 처참하게
구겨 넣으며 약속을 받아냈던 바로 그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였다.
오랜 세월의 습기를 먹어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고
시멘트 가루가 까맣게 눌러붙은 그 서류를 꺼내어 드는 정우의 거친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스무 살의 찬란했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대가는 스무 번의 지옥 같은 장마로 치러냈다.
더 이상 지켜야 할 어린 핏덩이들도,
눈물을 머금고 인내해야 할 변명거리도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우는 구겨진 서류를 손바닥으로 빳빳하게 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흔여덟,
남자의 눈빛이 20년의 길고 길었던 동면을 끝내고 마침내 차갑고도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길었던 가짜 부부의 연극을 끝내고,
약속했던 마흔여덟의 안녕을 고할 시간이 마침내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