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이혼을 준비하는 남편과 그의 피 땀을 비웃으며 떠나는 아내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밤새 반지하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려대던 장맛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비가 물러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물먹은 벽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퀴퀴한 곰팡내와,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끈적하고 무거운 습기뿐이었다.
정우는 삐걱거리는 낡은 매트리스 끝자락에서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짓물러 있었고,
거북이 등껍질처럼 굳은살이 박인 굽은 어깨는 하룻밤 새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듯 무겁게 축 처져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등 돌려 누워 있는 아내 윤희의 야윈 뒷모습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3년 전, 번듯한 예식장은커녕 웨딩드레스도 입지 못한 채 싸구려 정장 한 벌을 입고 자신의 거친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어주던 스무 살의 윤희.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겠다던 알량한 맹세는 온데간데없고,
결국 고생만 시키다가 아내의 무거운 짐칸으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초라한 현실이
칼날처럼 가슴을 후벼 팠다.
정우는 이불 밖으로 비져나온 아내의 앙상한 어깨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차마 그 살결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거칠고 투박한 손을 힘없이 거두어들였다.
자격이 없었다.
어제 자신이 맡았던 그 수십만 원짜리 고급 향수와 부드럽고 여유로운 세계의 손길에 길든 아내였다.
지금 시멘트 독이 올라 쩍쩍 갈라진 자신의 손이 닿으면,
아내의 몸이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역겹다는 듯 움츠러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정우는 발소리를 죽여 안방을 빠져나왔다.
불 꺼진 비좁은 주방에 서서 미지근한 맹물 한 컵을 단숨에 비워낸 그는, 현관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어제 빗물에 젖어 시멘트가 하얗게 굳어버린,
돌덩이처럼 무거운 안전화에 퉁퉁 부은 발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어젯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그토록 짐승처럼 가슴을 치며 오열했으면서도,
날이 밝으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낡은 안전화 끈을 조여 매고 흙먼지 날리는 공사판으로 나가야 하는 것.
그것이 가난하고 무능한 가장에게 허락된 잔인하고도 지독한 일상이었다.
정우는 뻑뻑한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
땀에 전 작업복 안주머니를 뒤적여 꼬깃꼬깃하게 접힌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어제 현장 소장에게 빗속에서 비가림 작업하느라 고생했다며,
국밥이나 한 그릇 사 먹으라고 몇 푼 더 얹어 받은 피 같은 일당이었다.
그는 식탁 위에 올려진 윤희의 낡은 핸드백 옆에,
끄머리에 시멘트 가루가 미세하게 묻어 있는 그 지폐 두 장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빛바랜 볼펜을 들어 노란색 포스트잇에 삐뚤빼뚤한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비 맞아서 감기 올지 모르니 애들 데리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사 먹어. 병원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수십만 원짜리 향수도,
남양주 북한강의 비싼 호두 타르트도 사줄 수 없는 못난 남편이 아내에게 내밀 수 있는 마지막 염치이자,
눈물겨운 안녕의 인사였다.
'오전 열 시.'
상가 신축 공사 현장.
폭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의 뙤약볕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달궈진 아스팔트와 젖은 흙바닥에서 훅훅 뿜어져 나오는 지열이 인부들의 숨통을 조였다.
전날 덮어두었던 무거운 방수포를 걷어내고 40킬로그램짜리 시멘트 포대를 쉴 새 없이 등에 짊어질 때마다, 정우의 빛바랜 작업복은 금세 끈적한 땀과 회색 흙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정우는 어깨가 빠질 듯한 육체 노동의 고통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사랑하는 윤희를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늪에서
완벽하고 깔끔하게 끊어내 줄 것인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만약 남편인 자신이 모든 진실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윤희는 얄팍한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가정에 남으려 하거나,
친정엄마의 등쌀에 밀려 그 끔찍하고 숨 막히는 쇼윈도 부부 연기를 계속할지도 몰랐다.
8년을 오직 자신 하나만 믿고 진흙탕에서 구른 불쌍한 여자였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화려하고 여유로운 세계로 훨훨 날아가게 해주려면,
자신이 철저하게 모른 척하며 멍청한 남편의 얼굴로 이혼을 종용해야만 했다.
점심시간.
함바집에서 소금기 가득한 된장국에 대충 밥을 우겨넣은 인부들이
그늘에 널브러져 코를 골며 낮잠을 청할 때였다.
정우는 뜨겁게 달궈진 현장 컨테이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거칠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은행 어플을 켜서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청약 저축에 들어간 오백만 원, 이번 달 생활비 통장에 남은 구십만 원.
그리고 빗물이 줄줄 새는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 빌라의 전세 보증금 삼천만 원.
이것이 정우가 스무 살,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맹세한 그날부터 뼈가 부서져라 짐을 나르고 땀을 흘려 모은 전 재산의 전부였다.
"이거라도... 전부 다 쥐여줘야... 그놈한테 가서도 돈 없다고 기죽지 않고, 밥이라도 한 끼 당당하게 사 먹지."
정우는 핏발 선 눈으로 액정을 들여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내의 끔찍한 외도에 분노하여 위자료를 청구하고 뺨을 때리기는커녕,
빈손으로 쫓겨날 아내가 그 부자 남자 앞에서 조금이라도 초라해 보일까 봐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내어줄 궁리를 하고 있는 미련한 사내.
그것이 사랑하는 여자를 가난으로 내몰았다는 뼛속 깊은 원죄를
지닌 정우의 비참하고도 먹먹한 사랑법이었다.
정우는 검색창을 켰다.
시멘트 가루와 진땀이 뒤섞인 지문 때문에 화면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느릿느릿 입력한 검색어는 단 하나였다.
협의 이혼 절차 및 재산 분할
화면 가득 이혼 서류 양식과 법원 방문 절차를 안내하는 차갑고 건조한 법률 용어들이 무심하게 쏟아져 내렸다. 정우는 그 화면을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가다, 결국 흙투성이가 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스무 살의 찬란했던 맹세는 이제 법원의 얇은 서류 몇 장으로 영원히 파기될 준비를 마쳤다.
아내를 향한 정우의 조용하고도 끔찍하게 아픈 이별 준비가,
그 뜨거운 공사판 한가운데서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오전 열 시 반.
거센 장맛비가 물러가고, 구름 사이로 드러난 뙤약볕이 지면의 습기를 빨아올리며
후텁지근한 열기를 반지하 창문 틈새로 훅훅 밀어 넣고 있었다.
윤희는 끈적이는 장판 바닥의 불쾌한 감촉에 미간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자,
코를 찌르는 퀴퀴한 곰팡내와 덜 마른빨래의 쉰내가 윤희의 숨통을 턱 막히게 했다.
불과 하루 전, 도영의 오피스텔에서 온몸을 감싸던 그 쾌적하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침구에서 나던 고급스러운 향기가 미친 듯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서윤이가 어린이집도 가지 않은 채
티비 애니메이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칭얼거리다 지쳐 잠든 핏덩이 지훈이가 땀범벅이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윤희는 아이들의 땀 냄새가 밴 정수리를 쓰다듬어주는 대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며 낡은 식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핸드백 곁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 맞아서 감기 올지 모르니 애들 데리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사 먹어."
"병원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시멘트 가루가 묻은 뭉툭한 손으로 꾹꾹 눌러쓴 정우의 투박한 글씨.
심지어 지폐의 끄머리에는 정우의 지문 자국을 따라 하얀 시멘트 가루가 미세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어제 빗속에서 자신을 짐승처럼 의심했던 남편의 그 서늘했던 눈빛은,
결국 친정엄마의 완벽한 방어막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 것이 분명했다.
순간, 윤희의 가슴 한구석이 아주 미세하게 욱신거렸다.
날이 밝기도 전에 나가 진흙탕을 구르며 뼛골을 빼야
간신히 손에 쥘 수 있는 피 같은 남편의 일당이었다.
스무 살의 차윤희였다면 이 돈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불과 반년 전의 차윤희였다면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며
고스란히 생활비 통장에 밀어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희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픽, 하는 실소였다.
심장을 조여오던 그 알량한 죄책감은,
눈앞에 놓인 비루한 현실 앞에서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윤희의 얇은 손끝이 식탁 위에 놓인 십만 원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십만 원.
그것은 어제 도영의 오피스텔에서 그가 냉장고를 열어 아무렇지 않게 코르크를 따주었던,
이름 모를 수십만 원짜리 최고급 와인 한 잔 값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액수였다.
도영에게는 기분 내킬 때 지갑에서 툭 꺼내어 던져주는 팁에 불과한 푼돈이,
정우에게는 빗속에서 목숨을 걸고 40킬로그램짜리
시멘트 포대를 수십 번 날라야만 얻을 수 있는 하루치의 전부였다.
윤희는 그 구겨진 지폐 두 장을 보며 남편의 고단함을 연민하는 대신,
자신이 처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무게를 다시 한번 소름 끼치도록 실감할 뿐이었다.
이런 푼돈에 감지덕지하며,
비가 새는 반지하에서 늙고 병들어가는 남편의 병수발이나 들며 평생을 썩어갈 수는 없었다.
도영이 보여준 그 찬란하고 여유로운 세계를 한 번 맛본 이상,
이 눅눅한 지옥으로는 단 한 발짝도 다시 내디딜 수 없었다.
윤희는 핸드백에서 액정이 깨진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젯밤, 정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들의 생일로 되어 있던 비밀번호를
도영의 생일로 완벽하게 바꿔둔 참이었다.
화면을 켜고 카카오톡을 열어,
수진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도영과의 대화창을 띄웠다.
어제 새벽 두 시에 와 있던 다정한 안부 문자에,
윤희의 입가에 짙고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윤희의 얇은 손가락이 스마트폰 액정 위를 거침없이 미끄러졌다.
"선배. 우리 남편 진짜 바보인가 봐요."
"어제 그렇게 비를 맞고 들어갔는데도 엄마가 대충 둘러대니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어요."
"방금 일어나 보니까 식탁에 십만 원 올려놓고 애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네요."
"우리 언제 또 볼 수 있어요? 선배 냄새가 벌써 미치게 그리워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송 버튼을 누른 윤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방 화장대로 향했다.
그녀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어제 발랐던 그 붉은 립스틱을 꺼내어,
거울 속 자신의 핏기없는 입술 위에 다시 한번 정성껏 덧바르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더 이상 두 아이의 엄마도, 가난한 노가다꾼의 아내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눈이 멀어버린, 소름 끼치도록 이기적인 괴물일 뿐이었다.
한 남자는 뜨거운 공사판 구석에서 흙투성이 얼굴을 한 채 아내에게 쥐여줄
이혼 서류와 전 재산을 계산하며 피눈물을 삼키고 있을 때.
다른 한 여자는 완벽한 거짓말에 성공했다는 오만함에 취해,
붉은 입술을 칠하며 내연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구제할 길 없이 타락해 버린 아내와, 모든 진실을 껴안고 무너져 내린 남편.
8년의 세월을 갈라놓는 잔인하고도 기괴한 이별의 의식이,
반지하 빌라와 뙤약볕이 내리쬐는 공사판 양쪽에서 숨 막히게 진행되고 있는 참담한 정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