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빗속의 목격자, 트이는 의심의 싹

[다시, 봄] 폭우 속 하원 길, 립스틱을 칠하고 뛰어오는 아내를 보다

by 이세라

오후 세 시 정각.


도영의 오피스텔 안방.


나른한 쾌락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에 취해 까무룩 잠이 들었던 윤희가 번쩍 눈을 떴다.

최고급 암막 커튼이 반쯤 쳐진 통유리창 밖으로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폭우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침대 협탁 위에 놓인 탁상시계의 바늘을 확인한 순간,

윤희의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서윤이의 유치원 버스가 동네 어귀의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네 시.


평소라면 한 시간은 넉넉한 거리였지만,

이 엄청난 폭우와 꽉 막힌 도심의 교통 체증을 생각하면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미쳤어, 어떡해. 늦겠어!"

윤희는 비명을 지르며 푹신한 호텔식 침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알몸으로 바닥에 나뒹굴던 얇은 속옷과 구겨진 원피스를

허겁지겁 주워 입는 그녀의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소란스러운 기척에 잠에서 깬 도영이

나른한 목소리로 윤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왜 그래, 윤희야. 비도 쏟아지는데 조금만 더 있다 가."

"내가 이따 차로 데려다줄게."


"안 돼요! 애 하원 시간 다 됐단 말이에요."

"엄마한테 병원 간다고 거짓말하고 나왔는데."

"버스 도착할 때까지 내가 안 나타나면 엄마가 무슨 의심을 할지 몰라요!"


윤희는 도영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 화장대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거울 속의 여자는 엉망진창이었다.

도영과 뒹구느라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격렬하게 입을 맞추느라 입술 선을 벗어나 입가 주변까지 벌겋게 번져버린 립스틱 자국.


윤희는 화장대 위에 놓인 티슈를 거칠게 뽑아 번진 립스틱을 벅벅 문질러 닦아냈다.

하지만 짙은 붉은색은 지워지기는커녕 입가 주변으로 더 넓게 번져,

마치 피를 닦아낸 것처럼 기괴해 보였다.


대충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틀어 묶은 윤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친정엄마의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찍혀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려 우산조차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윤희는 도영의 오피스텔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오후 세 시 십오 분.'


야속하게도 도심의 도로는 폭우로 인해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윤희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연신 기사의 눈치만 보았다.

"기사님, 제발 조금만 더 빨리 가주시면 안 될까요?"

"애가 비 오는데 혼자 버스에서 내려서 기다릴까 봐 그래요."

"아이고, 아주머니. 저도 미치겠네요."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차가 뚫려야 앞을 가죠."

'오후 세 시 오십 분.'


도로가 꽉 막혀 차가 옴짝달싹하지 않자,

윤희는 동네 진입로까지 한참 남은 꽉 막힌 사거리에서 결국 택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이성을 잃은 윤희는 뒷좌석 시트 위에 자신의 우산을 내팽개치고

내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 폭탄이 순식간에 윤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셨다.


급하게 대충 틀어 묶었던 머리는 거센 비바람에 맥없이 풀려

미역 줄기처럼 뺨에 들러붙었고,

빗물에 번진 화장 때문에 눈앞이 따가워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첨벙, 첨벙.


흙탕물이 고인 웅덩이를 구두로 짓밟으며 윤희는 미친 듯이 달렸다.


빗소리에 섞여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저 멀리,

동네 어귀의 버스 정류장으로 막 진입하는 노란색 유치원 버스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후 네 시 오 분.'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버스 정류장에 다다른 윤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췄다.

노란 버스의 문이 열리고,

작은 우산을 든 서윤이가 버스 계단을 총총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윤희가 목청껏 서윤아!

하고 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버스 정류장 처마 밑에서,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든 남자의 듬직한 뒷모습이 서윤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비 오는데 유치원 다녀오느라 고생했어요!"

그 다정하고 익숙한 쇳소리.


윤희의 심장이 그야말로 얼음물에 처박힌 듯 차갑게 굳어버렸다.

남편 정우였다.

새벽같이 공사 현장으로 출근했던 남편이,

왜 이 대낮에 퇴근해서 서윤이를 마중 나와 있는 것인가.


윤희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장마철 현장직은 폭우가 쏟아져도 일단 새벽에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다.


정우 역시 아침부터 쏟아지는 물 폭탄 속에서 어떻게든 실내 작업이라도

배정받으려 현장 컨테이너에서 버텼다.


하지만 점심 무렵 빗줄기가 재난 수준으로 굵어지자,

결국 현장 소장이 오후 작업을 전면 취소하고 인부들을 강제 퇴근시킨 것이다.

도영과의 쾌락에 눈이 멀어 그 모진 세월을 노가다꾼의 아내로 살았으면서도,

그 너무나도 당연하고 치명적인 공사판의 생리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 아빠가 웬일로 데리러 왔어?"

서윤이가 정우의 품에 덥석 안기며 환하게 웃었다.


정우는 딸의 뺨에 입을 맞추며,

흙먼지 대신 빗물에 대충 씻겨 나간 얼굴로 껄껄 웃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빠 일찍 끝났지."

"엄마는 오늘 병원 다녀온다고 몸도 안 좋은데, 우리 서윤이 비 맞을까 봐 아빠가 날아왔지."

그때였다.


정우의 품에 안겨 있던 서윤이의 시선이,

정류장 전봇대 뒤에서 비를 쫄딱 맞고 귀신처럼 서 있는 윤희를 향했다.

"어? 엄마다! 엄마!"

서윤이의 맑은 목소리에, 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정류장 한가운데서,

두 부부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얽혔다.

정우의 눈동자가 평소의 사람 좋은 호탕함을 잃고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울증 때문에 약을 타러 신경정신과에 다녀온다던 아내가,

왜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은 채 저렇게 큰길가에서 뛰어오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빗물에 얼룩진 얼굴 주변으로는 붉은 립스틱이 기괴하게 번져 있었고,

파리하게 입고 나갔다던 겉옷 안쪽으로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화려한 실루엣의 얇은 원피스가 비에 젖은 채 살갗에 들러붙어 있었다.

무엇보다 정우의 후각을 자극한 것은,

아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비 냄새에 섞여 훅 끼쳐오는 낯설고 묵직한 우디 향이었다.


그것은 눅눅한 반지하 집이나 병원 소독약 냄새와는 완전히 다른,

지독하게도 남성적이고 세련된 향기였다.

스무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아내를 의심해 본 적 없던 맹목적인 남편의 뇌리 속에,

서늘하고 끔찍한 의심의 싹이 아주 작게 트이는 순간이었다.

동네 어귀에서 반지하 빌라로 걸어오는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정우는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손으로 서윤이의 우산을 씌워주고,

남은 한 팔로는 비를 맞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수다를 떨었을 정우였다.

하지만 그는 서윤이만 번쩍 안아 든 채,

윤희와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묵묵히 빗속을 걸었다.

윤희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정우의 그 무거운 침묵이,

백 마디의 추궁보다 더 끔찍하게 윤희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눅눅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칭얼거리는 지훈이를 포대기로 업은 친정엄마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이고, 정 서방. 비 오는데 일찍 끝났는가 보네."

"서윤이는 할머니한테 오고, 정 서방은 얼른 씻어. 감기 들어."

엄마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서윤이를 넘겨받으려 했다.


하지만 정우는 서윤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젖은 작업복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윤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보. 당신 우산은 어쩌고 그렇게 비를 쫄딱 맞고 뛰어와?"


"아까 나갈 땐 분명 우산 들고나갔을 텐데."

첫 번째 화살이었다.


윤희는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달달 떨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택시에 우산을 두고 내렸다는 멍청한 실수를 덮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 그게. 버스 올 시간은 다 됐는데 마음이 급해서 막 뛰다가..."

"돌풍이 불어서 우산살이 다 뒤집어졌어."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길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냥 뛰었어."

윤희의 변명은 제법 그럴싸했다.

하지만 정우의 시선은 윤희의 빗물 젖은 머리카락을 지나

얼룩진 붉은 립스틱과 얇은 원피스 자락에 차갑게 머물러 있었다.

"그래? 근데 병원 다녀온다던 사람이 입술은 왜 그렇게 빨갛게 칠했어?"

"옷도 그건 처음 보는 거네."

"동네 병원 가는데, 비 오는 날 굳이 그렇게 얇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나갈 이유가 있었어?"

정우의 목소리는 화를 내고 있지 않았지만,

평소의 멍청할 정도로 사람 좋던 바보 남편의 톤이 아니었다.


거실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친정엄마는 숨을 헉 들이마신 채,

윤희의 창백한 얼굴과 사위의 서늘한 눈빛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 옷은... 맨날 수유복만 입고 있는 내가 너무 초라하고 불쌍해서..."

"병원 가는 길에 상가 매장 지나가다가 눈에 띄는 거 하나 그냥 홀린 듯이 샀어."

"립스틱도... 우울증 환자처럼 보이기 싫어서 화장품 코너에서 샘플 있는 거 발라본 거고."

"상가 매장? 동네 병원 간다더니, 쇼핑까지 하고 올 시간이 있었어?"

"그래서 우산도 없이 택시 타고 큰길에서 내린 거야?"

정우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젖은 흙먼지 냄새와,

윤희의 원피스에 배어 있는 도영의 묵직한 우디 향이 좁은 현관에서 기괴하게 뒤섞였다.

"그럼 그 남자 스킨 냄새는 상가 화장품 코너에서 묻은 건가 보네."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길래. 당신이 향수를 뿌릴 일은 없고."

정우의 눈동자에 명백한 의심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무 살 이후로 처음 보는 남편의 매서운 얼굴에 윤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핑계를 대면 댈수록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가장 결정적인 의심의 쐐기가 정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근데 여보. 상가에서 옷 사고 립스틱 바를 시간은 있었으면서."

"정작 당신 손에 병원 약봉지는 왜 없어?"

"몸 안 좋아서 병원 간다더니 약은 어쩌고 빈손으로 뛰어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약봉지.'


우울증 환자의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가 되어주어야 할 그 흔한 하얀 약봉지를,

윤희는 미처 위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윤희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완전한 파국이었다.

"내가! 약 타오지 말라고 했다!"

순간...


거실 한가운데서 숨죽이고 있던

친정엄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나섰다.

정우와 윤희의 시선이 동시에 엄마를 향했다.

엄마는 지훈이를 업은 채 절뚝거리며 현관 쪽으로 다가와,

굳어있는 윤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 기집애가 병원 가는 길에 상가에서 옷 샀다고 전화가 왔길래."

"내가 어차피 기분 전환 된 거 그 독한 약 타러 병원 문턱도 밟지 말라고 했어!"

"애미 젖 먹이는 년이 우울증 약 덥석덥석 주워 먹을까 봐."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내가 전화로 호통을 쳤다고!"

"약봉지가 어디 있어, 내 말 듣고 병원은 가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핏발 선 두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살고 싶어서... 숨 막히는 반지하 벗어나서..."

"지 살고 싶어서... 예쁜 옷 하나 사 입고, 화장 좀 한 게 그렇게 죈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애미가 하라는 대로 예쁘게 꾸며보고 오다가."

"우산까지 날려 먹은 내 불쌍한 새끼한테."

"정 서방은 지금 냄새가 나네 어쩌네 사람을 들잡아!"

그것은 딸을 살리기 위한 어미의 처절한 거짓말이자,

뼈저린 오열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딸년을 감싸기 위해 윤희의 어설픈 동선을 완벽하게 포장해 주며,

평생 땀 흘려 일한 사위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비참한 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피눈물이었다.

엄마의 그 처연하고도 공격적인 오열에,

정우의 서늘했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아내가 살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는 장모의 울음 섞인 항변은,

가장으로서 늘 돈에 쪼들리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정우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찔렀다.

"아닙니다, 장모님... 제가 화를 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윤희가 비를 쫄딱 맞고 와서 놀란 마음에..."

정우는 차마 장모 앞에서 더 이상 아내를 추궁하지 못하고,

거친 손으로 자신의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윤희는 엄마의 좁은 등 뒤에 숨어,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는 안도감과 끔찍한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가장 무서운 목격자였던 엄마가,

이제는 내 불륜의 가장 완벽하고 슬픈 방패막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우가 욕실로 씻으러 들어가기 위해 등을 돌리던 찰나,

그의 굳은 표정 위로 아까 정류장에서 맡았던 그 낯설고 묵직한 남자 향수의

잔향이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깊게 새겨져 있었다.

어설프게 봉합된 거짓말 아래서,

의심이라는 이름의 치명적인 독버섯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한

축축하고 어둑한 늦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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