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앞치마에서 증거를 발견한 늙은 어미의 날카로운 추궁
그날 밤.
장마철 특유의 끈적한 습기가 가시지 않은 좁은 안방.
낡아서 스프링이 꺼진 매트리스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간신히 아이들을 재우고 벽 쪽으로 등을 돌려 누운 윤희는,
눈을 뜬 채 캄캄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우의 묵직하고 거친 팔이
뱀처럼 다가와 윤희의 허리를 감아왔다.
"여보, 자?"
피로에 잠긴 정우의 쉰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등 뒤에서 훅 끼쳐오는 퀴퀴한 땀 냄새와,
아무리 독한 비누로 씻어내도 피부 결 사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공사판의 시멘트 먼지 냄새.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가족을 위해 뼈가 부서져라 희생하는 가장의 냄새라며
애써 안쓰럽게 여겼던 그 서글픈 체취가,
오늘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역겨운 구역질로 다가왔다.
낮에 도영의 오피스텔에서,
그리고 에어컨 바람이 쾌적하게 쏟아지던 고급 세단 안에서 온몸으로 빨아들였던
그 세련되고 묵직한 우디 향이
이미 윤희의 후각과 말초신경을 완벽하게 지배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 나 오늘 너무 피곤해."
"지훈이가 이앓이하는지 아까부터 계속 젖을 찾아서 진을 다 빼놨어. 온몸이 쑤셔."
윤희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자신의 허리에 감긴 정우의 투박한 팔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굳은살이 박인 남편의 손길이 닿았던 얇은 잠옷 자락에,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간 것처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래. 당신도 오늘 터미널에서 친구 이민 간다고 울고 오느라 고단했겠지. 푹 쉬어."
정우는 아내의 날 선 거절에도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를 안쓰러워하며 순순히 팔을 거두고는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얇은 벽을 웅웅 울리는 거친 코골이 소리가 비좁은 안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윤희는 어둠 속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다른 남자의 손길에는 짐승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이,
나를 위해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구르다 온 남편의 손길에는
죽은 고목나무처럼 차갑게 식어버리다니.
머릿속으로는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수백 번 되뇌면서도,
육체는 이미 도영을 향해 완벽하게 길들어버린 끔찍한 괴리감.
10년이라는 길고 긴 쇼윈도 부부의 서막은,
이토록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육체적 단절로부터 싹트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열 시.
정우가 새벽 별을 보며 현장으로 출근하고,
윤희가 밤새 칭얼거리는 지훈이를 달래느라 젖을 물린 채
안방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어 있을 때였다.
띠띠띠띠,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친정엄마가 들어왔다.
"어휴, 이것들은 밤새 도둑이 들어서 다 업어가도 모르고 자겠네."
"집구석 꼴은 또 이게 뭐람."
엄마는 퉁퉁 부은 무릎을 두드리며 혀를 쯧쯧 찼다.
끈적이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빈 젖병들을 싱크대로 치우고,
화장실 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쉰내 나는 빨랫감을
세탁기 쪽으로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수건과 아이들 내복,
그리고 누렇게 찌든 정우의 땀 절은 런닝셔츠를 분리수거 하듯 나누던 엄마의 거친 손에,
윤희가 어제저녁 내내 입고 있던 낡은 꽃무늬 앞치마가 딸려 왔다.
"이 기집애는 앞치마 주머니에 자꾸 영수증 쪼가리를 처박아놓고 빨래를 내놓는다니까."
"종이 다 풀어지면 세탁기 거름망 다 막히는 걸 매번 말해도 귓등으로 들어."
엄마는 투덜거리며 무심코 앞치마의 오른쪽 주머니에 뭉툭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끝에 빳빳한 종이 조각 하나가 만져졌다.
감촉이 이상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마트 영수증이 아니었다.
두꺼운 코팅 종이를 누군가 억지로 비틀고 잡아당겨 찢어낸 듯한,
반듯한 상자의 일부분이었다.
엄마는 노안이 온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작은 종이 조각에 적힌 글씨를 더듬더듬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남양주 북한강... 프리미엄 베이커리..."
순간, 세탁기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엄마의 쭈글쭈글한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남양주? 북한강?
어제 윤희는 분명 강남 고속 터미널에서
캐나다로 이민 가는 대학 동기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핏덩이를 떼어놓고 터미널 근처에서 얼굴만 보고
펑펑 울다 오느라 늦었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던 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왜 강남과는 정반대 방향인 남양주의 빵집 상자 조각이
은밀하게 찢겨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 순간,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정리하던 엄마의 시선이
어젯밤 윤희가 버려둔 그 비싼 호두 타르트 빈 상자로 향했다.
상자의 모서리 한쪽이 쥐어뜯긴 것처럼 날아가 있었다.
앞치마에서 나온 종이 조각은, 소름 끼치게도 그 상자의 찢겨나간 모서리 부분과
재질부터 폰트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엄마의 심장이 불길한 예감으로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딸은 단순히 친구를 만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산후 우울증 상담을 간다며 예쁜 외출복을 사 입고 립스틱을 바르던 모습,
거적때기 같은 수유브라 대신 세탁 바구니 맨 밑바닥에 숨기듯 벗어놓았던 얇은 레이스 속옷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휴대전화를 쥐고
숨죽여 웃던 딸의 낯선 공기들이 엄마의 머릿속에서 섬뜩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친구가 준 상자라면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일 것을,
왜 굳이 남양주 주소가 적힌 부분만 오려내어
제 앞치마 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단 말인가.
엄마는 널브러진 빨랫감 앞에 털썩 주저앉은 채,
굳게 닫힌 안방 문을 서늘하고도 참담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주름진 손에 꽉 쥔 남양주의 상자 조각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절대 열리지 말았어야 할 가장 치명적인 목격자의 손에 의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밤새 칭얼거리는 지훈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윤희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친정엄마가 세탁기를 덜덜거리며 돌리고,
좁은 싱크대에서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소리로 집안이 소란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낡은 반지하 거실은 소름이 끼칠 만큼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엄마... 언제 왔어. 왜 안 깨웠어..."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안방 문을 나선 윤희는,
거실 바닥에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엄마는 산더미처럼 쌓인 빨랫감 앞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있었다.
굽은 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집안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온 것 같은 기괴한 침묵이었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관절염 또 도졌어?"
윤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엄마의 굽은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엄마가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돌려 윤희의 손을 탁! 하고 매섭게 쳐냈다.
파리하게 질린 엄마의 두 눈동자에는 딸을 향한 깊은 원망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이 기괴하게 뒤섞여 핏발이 서 있었다.
윤희는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차윤희. 너 어제 강남 터미널 간 거 맞아?"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쇳소리 섞인 시끄러운 잔소리가 아니었다.
피를 토해내듯 낮고 서늘하게 바닥을 긁는,
처음 들어보는 무서운 목소리였다.
"어? 어... 왜 그래 갑자기. 이민 가는 수진이 만나고 왔다니까."
"터미널에서 펑펑 울다 오느라 늦었다고 어제 다 말했잖아."
"왜 자꾸 사람 피곤하게 같은 걸 물어."
윤희는 애써 짜증을 내며 침을 꼴깍 삼키고 시선을 돌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수유 티셔츠를 적셨다.
"그래? 강남에서 친구년이랑 펑펑 울다 온 년이."
"왜 남양주 빵집 주소를 주머니에 찢어서 숨겨놔!"
엄마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서,
거실 장판 바닥 위로 무언가를 팽개치듯 집어 던졌다.
툭. 바닥에 나뒹구는 작은 종이 조각.
그것은 윤희가 공포에 떨면서도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의 온기를
차마 버리지 못해 앞치마 주머니에 은밀하게 챙겨두었던 바로 그 증거물이었다.
남양주 북한강이라는 글씨와 베이커리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윤희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입술이 달달 떨려 단 한 마디의 변명조차 튀어나오지 않았다.
"너 어제 늦게 기어들어 올 때 들고 온 그 비싼 빵 상자!"
"아까 내가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려진 껍데기를 보니까 주소 부분이 감쪽같이 뜯겨 있더라."
"근데 이년아, 대답해 봐!"
"그냥 친구가 준 빵이면 껍데기째 버리면 그만이지."
"네가 왜 남양주 주소만 벌벌 떨면서 파내서 숨겨!"
"엄마... 그게 아니고..."
"이년아, 내 눈깔이 삐었냐! 네가 치매 걸린 노인네야?"
"네가 강남이 아니라 남양주에 쏘다닌 거 정 서방한테 들킬까 봐 찔려서 찢어 숨긴 거 아니야!"
엄마는 앙상한 가슴을 퍽퍽 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딸의 얄팍하고 이기적인 거짓말은,
세상에서 차윤희라는 인간을 가장 잘 아는 엄마의 날카로운 논리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우울증 상담 간다고, 애미 무릎 갈아 넣어서 핏덩이 맡겨놓고 나갈 때부터 내 심장이 벌벌 떨렸어."
"우울증 걸려 죽겠다는 년이, 화장대에 앉아서 벌건 립스틱을 떡칠하고 레이스 달린 속옷을 주워 입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기어들어가서 핸드폰 쥐고 실실 쪼개는 꼴을 내가 늙었다고 모를 줄 알았어!"
엄마의 뼈아픈 통찰에 윤희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남편을 감쪽같이 속여 넘겼다는 오만한 자만심은,
딸의 미세한 샴푸 냄새 변화조차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늙은 어미의 눈썰미 앞에서
처참하게 발가벗겨졌다.
"너... 딴 놈 만나니?"
"어떤 미친놈이랑 눈이 맞아서."
"젖내 나는 애새끼 팽개치고 남편 눈 피해서 남양주까지 기어 나갔다 온 거야!"
"아니야! 내가 무슨 남자를 만나!"
"엄마 진짜 사람 취급을 왜 이따위로 해!"
코너에 완벽하게 몰린 윤희가 눈물을 터뜨리며 악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결백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더러운 밑바닥을 들킨 죄인의 비참하고도 초라한 발악일 뿐이었다.
"정 서방 어제도 새벽 별 보고 나가서 밤늦게 흙투성이로 들어왔어."
"네 년 혓바닥에 발린 거짓말 철떡 같이 믿고."
"그 빵 친구가 사 온 거라고 좋아하면서 지 새끼들 먹이겠다고 실실 웃는 등신같이 착한 놈이라고!"
"네가 사람년이면, 짐승만도 못한 년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서방 등에 칼을 꽂아!"
결국 엄마의 거친 손이 윤희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윤희는 저항하지 않고 거실 바닥에 엎드린 채 짐승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니라고...
엄마가 오해한 거라고 끝까지 거짓말을 뱉어내야 했지만,
찢겨진 상자 조각이라는 완벽한 물증과,
엄마의 그 핏발 선 두 눈 앞에서는.
어떤 치밀한 알리바이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 너무 힘들어, 엄마..."
"숨 막혀서, 진짜 이 시궁창 같은 집구석에서 미쳐 죽을 것 같았단 말이야..."
결백을 증명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
윤희는 자신의 처절한 불행을 방패막이 삼아 오열했다.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외도와 거짓말을,
숨을 쉬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발버둥이었다고,
낳아준 어미 앞에서 눈물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 지독하게 이기적이고도 끔찍한 딸의 변명에,
머리채를 쥐고 있던 친정엄마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엄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딸의 헝클어진 얼굴을 참담하게 내려다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시집가서 고생만 하는 딸년이 불쌍해
관절염 약을 삼키며 손주를 봐주었던 자신의 희생이,
딸의 불륜을 돕는 알리바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엄마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10년의 기나긴 쇼윈도 부부 생활.
그 파멸의 문을 여는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한 목격자가 탄생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