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지옥속 남편을 외면한 밀회, 알리바이를 무너뜨릴 뻔한 상
다음 날 아침.
윤희는 정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하자마자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쥔 손에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엄마, 나 어떡해. 대학 때 제일 친했던 동기가 내일모레 갑자기 캐나다로 이민을 간대.”
“오늘 아니면 평생 못 볼 것 같다고 얼굴만 잠깐 보자고 울고불고 난리인데...”
“지훈이 한 시간만 더 봐줄 수 있어?”
“고속 터미널에서 딱 얼굴만 보고 금방 올게.”
수화기 너머로 관절염 앓는 엄마의 앓는 소리와 함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어휴, 핏덩이 떼어놓고 어딜 싸돌아다닌다고. 날도 푹푹 찌는데... 알았어.”
“점심 먹고 넘어갈 테니까 후딱 얼굴만 보고 와.”
“애기 젖 먹일 시간 늦지 않게 일찍 일찍 다니고.”
전화를 끊은 윤희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비열했다.
거짓말은 생각보다 너무나 쉬웠고,
관절이 부서져라 손주를 업어 키우는
늙은 어미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볼모로 잡은 자신의 밑바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추악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죄책감과 혐오감마저도,
곧 도영을 만날 수 있다는 벅찬 기대감 앞에서는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이슬처럼 속절없이 바스러졌다.
윤희는 떨리는 손으로 가장 아끼는 얇은 블라우스를 꺼내 입고,
그 안쪽으로 거추장스러운 수유 패드를 욱여넣었다.
오후 한 시.
낡은 반지하 빌라를 빠져나와 주위를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며 두 블록 떨어진 큰길가로 걸음을 재촉했다.
8월의 살인적인 폭염이 훅 하고 윤희의 숨통을 조여왔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 이글거리는 버스 정류장 앞에,
이 허름한 동네와는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최고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윤희는 도망치듯 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제 오피스텔에서 그 난리를 치고도 또 이 남자를 만나러 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단단히 미친년이었다.
윤희가 흠뻑 젖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시트에 기대자,
운전석에 앉은 도영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올 줄 알았어, 무리해서 나온 거 아니지?"
"땀나는 것 좀 봐."
"네... 친구가 이민 간다고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나왔어요."
"저 진짜 천벌 받을 년이죠."
자조적인 윤희의 웃음에 도영은 아무 말 없이 몸을 기울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당겨 채워주었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
도영의 몸에서 풍기는 묵직하고 세련된 우디 향이 훅 끼쳐오자,
윤희는 어젯밤 남편에게 들킬 뻔했던 그 숨 막히던 기억이 떠올라
황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피했다.
"오늘은 답답한 서울 벗어나서 바람 좀 쐴까?"
"남양주 쪽으로 드라이브 가자."
도영의 부드러운 핸들링과 함께 차가 도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폭염이 세상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대낮이었지만,
도영의 차 안은 완벽하게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서늘할 정도로 쾌적한 에어컨 바람,
최고급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재즈 음악,
그리고 맨살에 닿는 부드러운 가죽 시트의 감촉.
눅눅한 곰팡내와 칭얼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생활비에 쪼들려 한숨짓던 윤희의 남루한 일상은
이 좁고 안락한 공간 안에서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윤희의 핸드백 속에서 휴대전화가 신경질적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친정엄마였다.
터미널에서 1시간만 보고 오겠다던 딸이
2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니 애가 타서 거는 전화일 터였다.
지훈이가 울다 지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휴대전화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도영과 함께 있는 이 완벽한 천국에
엄마의 고단한 목소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북한강을 따라 달리는 탁 트인 도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윤희는 죄책감을 애써 억누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스물다섯 이후로 완전히 잊고 살았던 여유와 평화였다.
그때였다.
신호에 걸려 차가 서서히 멈춰 섰을 때,
윤희의 시선이 도로 옆에서 진행 중인 거대한 상가 신축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안전모를 쓰고 땀에 절은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살인적인 뙤약볕 아래서 무거운 철근을 어깨에 메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수건으로 흙먼지투성이인 얼굴을 훔쳐냈고,
누군가는 뜨거운 생수를 머리 위로 들이부으며 비틀거렸다.
순간, 윤희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 지옥 같은 불구덩이 속 어딘가에,
지금 내 남편 정우가 있을 것이다.
자신은 땀띠가 나도록 싸구려 작업복을 입으면서도,
아내에게는 비싼 바디워시를 사서 쓰라며 사람 좋게 웃던 멍청하고 불쌍한 내 남편.
그가 지금 가족들 입에 밥술 하나 더 넣어보겠다고,
이 숨 막히는 폭염 속에서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쓴 채 짐승처럼 일하고 있을 것이다.
가슴을 짓누르는 거대한 죄책감과 구역질에 윤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이 시원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
남편이 있는 그 뜨겁고 남루한 현실로 기어들어가 엎드려 빌어야 할 것만 같았다.
호흡이 가빠지며 윤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윤희야. 강물 반짝이는 거 참 예쁘지."
도영의 다정한 목소리가 윤희의 처절한 상념을 단칼에 끊어냈다.
도영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뻗어,
불안하게 떨리고 있는 윤희의 두 손을 따뜻하고 단단하게 겹쳐 잡았다.
"너한테 이런 풍경, 매일매일 보여주고 싶다."
그 다정한 체온과 달콤한 속삭임.
윤희는 창밖의 끔찍한 공사 현장에서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도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도영이 잡아준 손에 천천히 힘을 주어 마주 잡았다.
저 뜨거운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대가가 훗날 끔찍한 파국으로 돌아온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서늘하고 달콤한 천국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윤희의 욕망이,
반짝이는 북한강을 따라 맹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
꿈결 같았던 남양주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온 도영의 검은색 세단이,
다시 윤희의 낡은 빌라 동네 어귀에 조용히 멈춰 섰다.
"오늘 고마웠어, 윤희야."
"꽉 막힌 집에만 있다가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웃으니까, 스물두 살 때보다 훨씬 더 예쁘네."
도영이 환하게 웃으며,
뒷좌석에서 고급스러운 리본이 묶인 베이커리 상자 하나를 꺼내
윤희의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주었다.
상자에서는 고소한 버터와 달콤한 시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이게... 뭐예요?"
"아까 카페에서 산 호두 타르트."
"첫째 서윤이가 딱 단 거 좋아할 나이잖아."
"들어가서 애기 먹여. 너도 단 거 먹고 기운 좀 내고."
자신의 딸까지 다정하게 챙기는 섬세함에 윤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남편 정우는 퇴근길에 늘 자기 안주거리인 기름진 치킨이나 식어빠진 순대만 사 올 뿐,
식구들을 위해 이렇게 예쁘고 비싼 디저트를 사 온 적은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감사해요... 우리 서윤이가 정말 좋아할 거예요."
차에서 내려 눅눅한 반지하 빌라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습한 곰팡내와 함께 아이의 악쓰는 울음소리가 윤희의 고막을 찢을 듯이 때렸다.
"너 지금 제정신이니!"
"터미널에서 한 시간만 얼굴 보고 온다던 애가 전화를 아예 꺼놓고 지금까지 안 오면 어떡해!"
"애가 젖 찾는다고 두 시간을 넘게 자지러지게 울었어!"
땀범벅이 된 친정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며 윤희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퉁퉁 부은 엄마의 관절염 무릎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엄마, 미안해..."
"친구가 안 간다고 하도 울고불고 매달려서 차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어."
"전화기는 배터리가 방전돼서 꺼진 줄도 몰랐고..."
"아이고, 내 팔자야. 핏덩이 떼어놓고 친구가 그리 좋더냐."
"애미 관절 다 부서지는 꼴 봐야 직성이 풀려?"
윤희는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지훈이를 건네받았다.
퉁퉁 불어버린 젖을 물리고 나서야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친정엄마는 혀를 쯧쯧 차고는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엄마의 굽은 등을 배웅하며 윤희는 거울 앞에 섰다.
예쁜 블라우스를 허물 벗듯 벗어 던지고,
땀과 젖내가 밴 헐렁한 수유 티셔츠를 다시 뒤집어썼다.
붉은 립스틱을 휴지로 벅벅 문질러 지우자,
화려했던 한낮의 일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남루한 지훈이 엄마의 모습만 덩그러니 남았다.
저녁 여덟 시.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정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근했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나온 정우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식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피곤한 시선이 식탁 한가운데 놓인 화려한 베이커리 상자에 머물렀다.
"어? 여보. 이 빵 상자 뭐야? 포장부터 되게 비싸 보이네."
"아... 캐나다 이민 간다는 그 친구가 애들 주라고 사 왔어."
"고속 터미널 근처에서 잠깐 얼굴만 보고 헤어졌거든. 서윤이 주려고."
윤희는 싱크대 쪽으로 돌아선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된장찌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목소리만큼은 제법 평온하게 꾸며냈다.
"그래? 친구가 정성이 갸륵하네. 우리 딸내미 일어나면 좋아하겠다."
정우가 무심한 손길로 상자의 고급스러운 리본을 풀었다.
그리고 타르트를 덮고 있는 투명한 비닐 포장지를 벗겨내려던 찰나였다.
"어라? 여보, 여기 남양주 북한강이라고 적혀있네?"
"아까 터미널 근처에서 만났다며."
순간!
찌개를 젓던 윤희의 국자가 냄비 바닥에 강하게 긁히며 찌익-.
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심장이 쿵 하고 발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우가 쳐다보고 있는 상자 겉면에는,
남양주에 위치한 대형 프리미엄 베이커리 카페의 이름과 로고가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윤희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간신히 돌려 정우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아무런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영이 나를 아껴주는 마음에 사준 그 달콤한 선물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내 알리바이를 산산조각 내는 끔찍한 흉기가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숨이 막혀 헐떡이는 윤희의 파리한 입술이 달달 떨렸다.
"아... 그게... 어..."
윤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국자 손잡이만 덜덜 떨며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정우는 타르트 상자에 붙은 작은 라벨 스티커를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친구가 터미널로 오기 전에 남양주 쪽에서 볼일이 있었나 보네."
"여기 보니까 오늘 오후 세 시에 구워져 나온 거라고 당일 생산 시간도 찍혀있다."
"야, 요새 빵집은 참 신기하네. 별걸 다 적어놓고 팔아."
'오후 세 시.'
윤희와 도영이 남양주의 강바람을 맞으며,
그 베이커리 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향해 웃음 짓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만약 정우가 남양주에서 강남 고속 터미널까지의 이동 시간과 거리를 조금이라도 계산해 보았더라면.
혹은 세 시에 갓 구워진 빵을 들고,
길 막히는 오후 네 시에 터미널을 거쳐 동네까지 도착한
친구의 물리적인 동선을 한 번만 더 의심했더라면.
그러나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온종일 뙤약볕에서 뇌수까지 지쳐버린 남편은,
아내의 어설픈 거짓말을 하나하나 따져 묻고 의심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피로에 절어버린 가장의 그 슬프고도 맹목적인 믿음이,
벼랑 끝에 몰렸던 윤희를 또 한 번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냈다.
"어... 맛있겠다."
"당신 먼저 먹어. 난 아까 친구랑 커피를 많이 마셨더니 속이 달아."
정우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타르트 한 조각을 뚝 떼어 입에 털어 넣었다.
윤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싱크대에 간신히 지탱하며 다시 돌아섰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자 다리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도영이 준 그 달콤한 타르트가,
마치 자신의 목을 서서히 조르는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알리바이가,
이렇게 허무하고 사소한 물건 하나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끔찍한 자각.
하지만 윤희는 그 지독한 공포와 서늘함 속에서도,
쓰레기통에 빈 상자의 주소와 로고가 적힌 부분만 조심스럽게 찢어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 속에 은밀하게 챙겨 넣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무서웠지만,
나를 온전한 여자로 숨 쉬게 했던 그 시간의 증거물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성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파멸을 향한 지독한 중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