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지독한 우디 향을 묻혀온 아내, 사람 좋은 무지한 남편
도영의 품에 안겨 흘리던 서러운 눈물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뜨거운 열기로 번져갔다.
위로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포옹은
깊고 탐욕스러운 입맞춤으로 이어졌고,
윤희는 도영이 이끄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3년 동안 억눌려 있던 외로움과
여자로서의 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이성은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에어컨의 서늘한 공기가 무색할 만큼,
오피스텔의 안방은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로 가득 찼다.
두 시간 뒤.
도영의 욕실에 들어선 윤희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차가운 타일 벽에 머리를 기댔다.
물안개가 자욱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몸은 처참했다.
젖이 돌아 퉁퉁 부어오른 가슴과,
두 아이를 낳으며 탄력을 잃고 튼 살이 가득한 배.
그 초라한 몸뚱이 위로 도영이 남긴 붉은 자국들이 난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윤희는 도영의 욕실 선반에 놓인 비싼 우디 향 바디워시를 잔뜩 짜내어
미친 사람처럼 온몸을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거품이 일어날수록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내 몸에 밴 다른 남자의 흔적과,
짐승처럼 헐떡였던 자신의 추악한 죄악을 씻어내려는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살갗이 붉어지도록 몸을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늘 싸구려 우유 비누 냄새만 배어있던 자신의 몸에
묵직하고 세련된 도영의 체취가 더욱 깊숙이 덧입혀질 뿐이었다.
물기를 닦아낸 윤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그 얇은 레이스 속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젖이 차올라 묵직해진 가슴을 짓누르며 축축하고 두꺼운 수유 패드를 욱여넣었다.
달콤했던 여자의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비루하고 거짓말쟁이인 '지훈이 엄마'로 돌아가야 하는
잔인한 형벌의 시간이었다.
"윤희야. 젖은 머리 묶고 가면 두통 와. 다 말리고 가."
욕실 밖으로 나오자 도영이 다정하게 헤어드라이어를 내밀었다.
하지만 윤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그 다정한 눈빛을 다시 마주했다가는,
이대로 주저앉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축축한 반지하 집으로 돌아오자,
땀에 흠뻑 젖은 친정엄마가 칭얼거리는 지훈이를 업고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휴, 우리 딸 왔어? 오늘따라 애가 낯을 가려서 아주 혼을 쏙 빼놓네."
"상담은 잘 받고 온 거야?"
"얼굴이 한결 뽀얘진 걸 보니 상담 선생님이 참 용한가 보다."
친정엄마는 딸의 속도 모르고 안도하는 웃음을 지었다.
관절염으로 퉁퉁 부은 엄마의 손목을 보는 순간,
윤희의 심장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늙은 어미는 딸년 우울증 고쳐보겠다고
진통제를 삼켜가며 손주를 업고 있었는데,
그 시각 미친 딸년은 다른 남자의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윤희는 차마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쫓기듯 지훈이를 건네받으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녁 일곱 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정우의 손에는 기름 냄새를 풍기는 검은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오늘 현장 반장님이 수고했다고 일찍 보내주네."
"오는 길에 우리 서윤이 좋아하는 양념치킨 한 마리 샀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낡은 작업복 차림.
정우가 사람 좋게 웃으며 식탁 위에 치킨을 올려두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며 하루 종일 시멘트 가루를 마셨을 남편의 얼굴은
피로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아... 고마워. 얼른 씻고 나와. 밥 차려줄게."
윤희는 싱크대 앞에서 도마질을 하며 애써 정우의 시선을 피했다.
혹시라도 내 흔들리는 눈빛에서,
혹은 어색한 몸짓에서 아까의 그 끔찍한 짓거리가 들통날까 봐
온몸의 잔털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작업화를 벗고 거실로 들어온 정우가 도마질을 하는 윤희의 등 뒤로 훅 다가왔다.
그리고는 윤희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어? 여보."
정우의 낮은 목소리에 윤희의 심장이 쿵 하고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파를 썰기 위해 쥐고 있던 식칼이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렸다.
"왜... 왜 그래?"
"당신한테서 무슨 시원한 나무 냄새 같은 게 나네."
"비누 바꿨어? 냄새 좋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파 한 단 값에도 벌벌 떨며 사 쓰던 싸구려 비누 냄새와, 늘 시큼한 젖내만 배어 있던 아내의 몸에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남자 바디워시 향기가 났으니 코를 찌르는 건 당연했다.
공사판 먼지 속에서 구르며 냄새에 둔감해진 정우조차 단번에 알아챌 만큼,
도영의 향기는 윤희의 피부와 머리카락 깊숙이 지독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윤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내려놓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어. 마트에서 바디로션 세일하길래 샘플 한번 발라봤는데..."
"향이 좀 진하네. 이상해? 별로야?"
"아니, 좋아."
"당신 맨날 퀴퀴한 젖내만 나다가 이런 세련된 냄새 나니까 기분 전환도 되고 좋네."
"앞으로 그거 사다 써."
정우는 아내의 지독한 거짓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화장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윤희는 그제야 쥐고 있던 싱크대 상판에서 손을 떼며 바닥으로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달콤한 치킨 냄새와 눅눅한 집안의 곰팡내,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영의 짙은 우디 향.
그 이질적인 냄새들이 뒤섞인 좁은 주방 바닥에서,
윤희는 입을 틀어막은 채 짐승처럼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완벽한 지옥이었다.
밤 열한 시 반.
눅눅한 반지하의 좁은 거실에는 규칙적이고 둔탁한 정우의 코골이 소리만이
웅웅거리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윤희는 홀로 식탁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웅크려 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싱크대에는 저녁에 아이들과 정우가 먹고 남은 양념치킨 뼈와,
시뻘건 기름이 묻은 접시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늘 하던 대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해야 했지만,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정우의 투박한 코끝이 자신의 목덜미를 스치던
그 서늘하고 끔찍했던 감각이 아직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극도의 공포.
만약 정우가 눈치가 조금만 더 빠른 사람이었다면,
혹은 고급스러운 우디 향 속에 미세하게 섞여 있던 도영의 낯선 체취를 의심했다면
오늘 이 가정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공사판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와,
아내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며,
사람 좋게 웃던 남편의 그 무지한 얼굴이 윤희의 목을 더욱 세게 조여왔다.
파멸의 문턱까지 다녀온 윤희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내야 한다.
오늘의 이 숨 막히는 공포를 마지막 경고 삼아,
당장 도영의 번호를 차단하고
다시 예전의 평범하고 숨 막히는 지훈이 엄마로 돌아가야만 한다.
친정엄마의 관절염 약값을 생각해서라도,
시멘트 가루를 마시며 치킨을 사 들고 오는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것이 자신과 이 불쌍한 가족들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윤희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식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도영의 이름 옆에 있는 차단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징-'
손바닥 안에서 짧고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검은 화면 위로 떠오른 발신자는 도영 선배였다.
윤희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려야 한다고 이성이 처절하게 소리쳤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홀린 듯 액정 화면의 글씨를 탐욕스럽게 쫓고 있었다.
["오늘 너무 놀라게 해서 미안해..."]
["조금 더 아껴주고 싶었는데, 네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내 마음이 주체가 안 되더라...."]
["네가 급하게 나가느라 텅 빈 방에 혼자 남으니까, 벌써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넌 내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유일한 여자야. 잘 자, 윤희야."]
그 짧은 문장들이 윤희의 각막을 뚫고 들어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이성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던 죄책감과 남편을 향한 연민은,
'가장 간절했던 유일한 여자'라는
그 지독하게 달콤한 문장 앞에서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오히려 안방에서 들려오는 남편의 코골이 소리가,
이 위태롭고 은밀한 로맨스에 불을 지피는 완벽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모르고 자는 둔감한 남편과,
이 캄캄한 거실에서 다른 남자의 애정 어린 문자에 가슴을 떨고 있는 자신.
그 배덕감이 주는 묘한 쾌감과 우월감에 윤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윤희는 어두운 거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파리한 아줌마의 얼굴이었지만,
두 눈만큼은 스물두 살 때처럼 기묘하고도 요염한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천천히 키패드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차단을 결심했던 망설임은 비웃음이 나올 만큼 짧았다.
윤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답장을 써 내려갔다.
"저도... 당장 내일이라도 또 가고 싶어요. 어떻게든 핑계 만들어볼게요."
전송 버튼을 누른 윤희는,
곧바로 메시지 보관함에 들어가 도영과 나눈 모든 대화 기록을 흔적도 없이 삭제했다.
혹시나 정우가 새벽에 깨어 휴대전화를 볼 것에 대비한,
아주 치밀하고 기계적인 손놀림이었다.
들키지 않으면 된다.
내가 조금만 더 완벽하게 연기하고 조금만 더 철저하게 흔적을 지운다면,
이 구역질 나는 지옥 같은 현실과 저 눈부신 천국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윤희의 입가에 서늘하고도 비참한 미소가 번졌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여자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완벽한 괴물로 서서히 진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