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젖은 스폰지처럼 스며드는 죄악

[다시, 봄] 오피스텔로 발을 들이며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선을 넘다

by 이세라

새벽 다섯 시 반.


정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전 앓았던 몸살이 채 낫지도 않았건만,

그는 파스 냄새를 풍기며 주섬주섬 작업복을 챙겨 입었다.

식탁 위에 놓인 찬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정우가 현관문을 나서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훈이 엄마, 나 다녀올게.

문 잘 잠그고 애들이랑 더 자.

윤희는 자는 척 눈을 감은 채,

둔탁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채 뜨지도 못한 눈을 비비며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무거운 등짝.

그 선량하고 가여운 뒷모습을 떠올릴 때면

윤희의 가슴 한구석이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렸지만,

그 죄책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의 오후에는,

그 모든 서늘한 현실을 잊게 해 줄

지독하게 달콤한 도피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갤러리 카페에서의 첫 만남 이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차 한잔을 마시는 딱 한 시간이 전부였다.


친정엄마에게는 산후 우울증 상담을 받으러 다닌다는,

제법 그럴싸하고도 서글픈 핑계를 댔다.


엄마는 기꺼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지훈이를 봐주러 와주셨다.

하지만 도영이 내어주는 한 시간의 온기는 너무도 강렬했다.

그 짧은 만남이 끝나고 반지하 집으로 돌아오면,

윤희는 심한 금단증상에 시달렸다.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퀴퀴한 집안의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숨 막혔고,

오직 도영과 마주 앉아있던

그 쾌적한 카페의 공기만이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 시간은 두 시간이 되었고,

커피는 점심 식사로 이어졌다.

도영은 결코 조급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


그저 윤희가 밥은 제때 먹는지,

잠은 푹 잤는지를 물었고,

그녀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작가의 신간 소설이나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들을 선물하며

윤희의 메마른 감성을 끊임없이 적셔주었다.

그 세심하고도 완벽한 거리 유지가

오히려 윤희의 방어벽을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어느새 윤희의 일상은

완전히 도영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아이들 반찬거리보다,

자신이 바를 저렴한 매니큐어나

은은한 향이 나는 바디워시를 먼저 카트에 담았다.


펑퍼짐한 수유복 대신,

인터넷 쇼핑몰에서 허리선이 조금 들어간 블라우스와 치마를 몰래 결제하기도 했다.

속옷 서랍의 맨 아래 칸에는

도영을 만나러 갈 때만 몰래 꺼내 입는

얇고 예쁜 레이스 속옷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하지만 그 예쁜 속옷 안쪽에도 혹시나 젖이 샐까 봐

촌스럽고 두꺼운 수유 패드를 억지로 구겨 넣어야만 했다.

온전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만,

신체는 이미 젖을 돌게 하는 엄마로 세팅되어 있는 현실.


그 기형적이고 비참한 괴리감에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윤희는 도영을 만나러 가는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소름 끼치도록

가증스럽고 무서운 변화였다.

윤희는 자신의 이런 비참한 위선을 감추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남편 정우에게 더욱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도영을 만나고 온 날이면 정우가 좋아하는 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았고,

피곤에 지친 남편의 어깨를 주물러주기도 했다.


정우는 아내의 그런 변화를

그저 우울증이 나아지고 있는 긍정적인 신호로만 받아들였다.

당신 요즘 얼굴이 참 좋아졌어.

웃는 것도 많이 보고.

내가 앞으로 돈 더 많이 벌어올게.

우리 식구 고생 안 시키게.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워내며 사람 좋게 웃는 정우를 볼 때면,

윤희는 목구멍으로 밥알이 넘어가지 않아

뜨거운 찌개 국물만 억지로 삼켜내야 했다.


나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내 남편을 속이고,

내 아이들을 속이고,

친정엄마의 등골을 빼먹는 천하의 몹쓸 년.

하지만 그 지독한 자기혐오조차,

도영에게서 오는 문자 한 통이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오늘,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점심 무렵,

도영에게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윤희야, 오늘 밖은 날씨가 너무 덥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눈치 보며 밥 먹지 말고, 오늘은 우리 집으로 올래?]

[방송국 바로 앞 오피스텔이야.]

[너 예전에 크림 파스타 좋아했잖아.]

[내가 제대로 요리해 줄게.]

오피스텔. 다른 남자의 개인적인 공간.

윤희는 휴대전화를 쥔 채 얼어붙었다.

카페나 식당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 문 너머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은 정말 되돌아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가면 안 돼. 여기서 멈춰야 해.

머릿속에 수백 번 사이렌이 울렸지만,

윤희는 이미 거울 앞에서 새로 산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낡은 화장대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마스카라를 칠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그보다 더 큰 맹목적인 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 시간 뒤,

윤희는 도영이 일러준 최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의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도어락의 차가운 금속 버튼을 바라보며, 윤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문을 열면,

스물다섯에 남편 정우와 맺었던

그 눈부신 맹세는 영원히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윤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운명의 시계추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궤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고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육중한 현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왔어, 윤희야?"

소매를 걷어붙인 편안한 리넨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도영이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시원하고

쾌적한 에어컨 바람이 윤희의 뺨을 스쳤고,

고급스러운 디퓨저 향기와 고소한 버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윤희는 현관에 선 채로 숨을 죽였다.


통유리창 너머로 탁 트인 도시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넓고 화사한 오피스텔.


벽지 곳곳에 얼룩진 곰팡이와 눅눅한 습기로

가득한 자신의 반지하 집과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대비되는,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들어와. 밖이 많이 덥지?"

도영이 윤희의 발 앞에 하얀색 실내화를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윤희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었다.


그 한 걸음이,

스스로의 이성과 도덕성에 긋는 가장 명확한 파멸의 선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앉아. 파스타는 금방 나와."

도영의 안내로 대리석 식탁에 앉은 윤희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굳어있었다.


새하얀 식탁보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식기류가 눈부셨다.


주방에서 능숙하게 프라이팬을 돌리는 도영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며,

윤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한 크림 파스타가 윤희의 앞에 놓였다.

"와인 한잔할래? 아차, 참."

도영이 와인셀러로 향하다가 멈칫하며 돌아서더니,

다정하게 눈을 휘어 접으며 웃었다.

"수유 중이라 술은 안 되지."

"깜빡할 뻔했네. 시원하게 청귤 에이드 타줄게. 조금만 기다려."

그 순간, 윤희의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남편 정우는 퇴근 후면 피곤하다며

윤희가 젖을 물리든 말든 그 옆에서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빈 캔을 식탁 위에 그대로 방치하곤 했다.


아내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배려가 필요한지 단 한 번도 헤아려본 적 없는 남편.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달랐다.


자신을 '여자 차윤희'로 대해주면서도,

'엄마'로서의 불가피한 현실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배려해주고 있었다.

"맛있게 먹어. 네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얼음이 띄워진 청귤 에이드 잔을 내려놓으며

도영이 윤희의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았다.

윤희는 포크를 들어 조심스럽게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하고 진한 크림의 풍미.

스물다섯 이후로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소름 끼치도록 맛있고 호사스러운 맛이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윤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기어이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당황한 윤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훔쳤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스타 한 그릇에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초라한 인생이 서러웠고,

이 사소한 호의마저 눈물겹게 감사한 스스로가 너무도 비참했다.


무엇보다,

이 완벽한 시공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 하는

자신의 더러운 욕망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선배... 나 어떡해요. 나 진짜, 천벌 받을 나쁜 년인가 봐..."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는 윤희를 향해,

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는 윤희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윤희의 떨리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네가 왜 나쁜 사람이야."

"넌 아무 잘못 없어, 윤희야. 그저 너무 숨이 막혀서..."

"살기 위해 잠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뿐이야."

도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윤희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울어도 돼."


"여기서 다 쏟아내. 넌 그동안 충분히 아팠잖아."

그 다정한 위로에 윤희의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윤희는 도영의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도영은 그런 윤희의 젖은 등을 넓은 품으로 말없이, 그리고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는 오피스텔 한가운데서,

옛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윤희의 온몸을 속수무책으로 녹여 내리고 있었다.


10년이라는 기나긴 쇼윈도 부부의 서막으로 들어가는,

가장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첫 포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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