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빗속의 약국, 아내를 '여자'로 불러준 옛 선배와의 재회
도영의 차 안은 이질적일 만큼 고요하고 쾌적했다.
창밖으로는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 무서운 기세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두꺼운 차창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는 그저 아득한 백색소음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차갑게 젖은 윤희의 어깨 위로 따뜻한 바람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온도 괜찮아?"
"애기 감기 더 심해질까 봐 에어컨 끄고 히터 약하게 틀었어."
"너무 답답하면 말해."
핸들을 쥔 도영이 시선을 앞을 향한 채 다정하게 물었다.
윤희는 앞만 멍하니 바라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가 젖을까 봐 엉덩이를 끝에만 살짝 걸친 채,
등 뒤에서 쌕쌕거리며 잠든 지훈이의 포대기만 생명줄처럼 꽉 쥐고 있었다.
차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는 우디향 디퓨저 냄새.
그 세련된 향기 속에서 윤희는 자신의 어깨에 묻은 쉰내 나는 젖자국과,
비에 젖어 눅눅해진 낡은 운동화가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남편 정우의 낡은 중고차가 떠올랐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이 새어 들어와 퀴퀴한 곰팡내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나던 차.
에어컨은 늘 고장이 나 있었고,
조수석 발판에는 정우의 작업화에서 떨어진 흙먼지가 가득했다.
스물두 살의 윤희는 도영 선배의 이 빛나는 조수석 대신,
정우의 낡은 트럭 조수석을 선택했었다.
가난해도 사랑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 눈부셨던 선택의 결과가,
지금 이토록 초라한 몰골로 옛 남자의 차에 앉아 숨죽이고 있는 것이라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졸업하고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겨서 동기들도 다들 궁금해했는데."
부드러운 도영의 물음에 윤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지냈어요."
"일찍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면서."
"그렇구나. 남편은 어떤 사람이야?"
"우리 윤희 고생 안 시키고 잘해주지?"
악의 없는 다정한 질문이었지만,
윤희의 가슴에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푹 꽂히는 것 같았다.
잘해주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우는 분명 좋은 가장이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며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집이라는 외딴섬에 갇혀 서서히 질식해 가는 윤희의 마음은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그저 돈을 벌어오는 것을 '잘해준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윤희가 아무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자,
도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와이퍼 속도만 조절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윤희의 숨통을 더 조여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윤희가 일러준 낡은 빌라 앞 좁은 골목에 멈춰 섰다.
외벽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고,
비좁은 주차장 구석에는 이웃들이 내다 버린 젖은 쓰레기봉투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초라한 반지하 빌라.
도영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들킨 것 같아
윤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윤희는 도망치듯 황급히 차 문을 열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조심히 가세요."
"윤희야."
차에서 도망치듯 내리려던 윤희를 도영이 조용히 불렀다.
도영은 운전석 옆 수납함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함이 적힌
반듯한 명함 한 장을 꺼내 윤희의 손에 쥐여주었다.
"나 방송국 근처로 발령받아서 당분간 이 동네에 있을 거야."
"가끔... 숨 막히고 답답할 때 연락해."
윤희가 흠칫 놀라 도영을 돌아보았다.
도영의 깊은 눈동자가 윤희의 젖은 얼굴을 곧게 향하고 있었다.
"애기 엄마 말고, 그냥 옛날 후배 차윤희로서. 언제든 커피 한잔 사줄 테니까."
'애기 엄마 말고, 차윤희로서.'
그 말이 윤희의 심장을 미친 듯이 내려쳤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빌라 현관으로 뛰어 들어간 윤희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젖은 명함을 가슴에 꼭 쥔 채 짐승처럼 소리 없이 오열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토록 망가져 버린 걸까.
빗소리에 묻힌 윤희의 울음소리가 좁고 축축한 빌라 복도를 처절하게 울리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1박 2일의 지방 현장 숙식 작업을 마친 정우가 집으로 돌아왔다.
장마철 특유의 무덥고 습한 공기가 낡은 반지하 빌라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눅눅해진 벽지에서는 기분 나쁜 곰팡내가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현관문이 열리고 땀과 먼지에 절어있는 정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피로로 검게 죽어 있었고,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낯선 지방 공사 현장에서
이틀 밤낮을 구르다 온 가장의 고단한 훈장이었다.
"다녀왔어. 지훈이 열은 좀 어때."
흙먼지가 엉겨 붙은 안전화를 대충 벗어 던진 정우가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마른빨래를 개고 있는 윤희에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윤희의 퀭한 얼굴이 아니라, 곧장 안방을 향해 있었다.
"병원 다녀왔어. 다행히 열은 내렸어."
"서윤이도 낮에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방금 같이 잠들었고."
윤희가 건조하게 대답하며 수건을 반으로 접었다.
정우는 대답도 듣는 둥 마는 둥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서윤이와 지훈이 남매가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서윤이는 더운지 이불을 배 밑으로 다 걷어찬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정우의 시선과 손길은 오직 지훈이에게만 향했다.
정우는 잠든 지훈이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아이고, 내 새끼. 아빠 없는 동안 아프느라 고생했네."
"장하다 우리 귀한 아들."
그는 곁에서 곤히 잠든 첫째 딸 서윤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지훈이의 볼에만 연신 입을 맞췄다.
그 편애 가득한 목소리를 거실에서 등 뒤로 들으며
윤희는 수건을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밤새 불덩이 같은 둘째를 안고 홀로 공포에 떨었던 건 자신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침,
우산 하나 없이 애를 업고 병원 복도를 미친 사람처럼 헤매느라
정작 첫째 서윤이는 어린이집에 쫓기듯 밀어 넣어야 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종일 엄마의 품을 그리워했을 딸아이가 안쓰러워 윤희의 가슴은 미어지는데,
남편의 입에서는 아내인 윤희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지,
딸 서윤이가 얼마나 칭얼댔을지 묻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직 그가 원했던 완벽한 가정의 상징,
아들 지훈이의 안위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정우가 안방에서 나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지훈이 엄마도 애 보느라 고생했어."
"나 씻고 바로 좀 잘게. 현장에서 잠을 한숨도 못 자서 몸살이 올 것 같네."
그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정우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비좁은 거실을 울렸다.
윤희는 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화장실 문짝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생했어.'
그 의무적이고 건조한 네 글자가 윤희의 텅 빈 가슴에 툭 하고 떨어져 부서졌다.
차라리 그가 밖에서 딴짓을 하는 놈이었다면 욕이라도 할 텐데.
윤희는 정우가 얼마나 처절하게 밖에서 돈을 벌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내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
착하고 성실한 남편
하지만 편협한 부성애로 아내의 영혼이 말라 죽어가는 것에는 철저하게 무지한 남편.
그 숨 막히는 평행선이 윤희를 더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얼마 뒤,
물기를 대충 수건으로 닦아낸 정우가 젖은 머리칼을 털며 안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안방 문틈으로 정우의 거친 코골이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로에 절어 단잠에 빠진 남편의 코골이.
평소 같으면 안쓰러워 이불을 덮어주었을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윤희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적막한 거실.
윤희는 홀로 낡은 교자상 앞에 앉았다.
상 위에는 낮에 도영이 쥐여주었던 하얀색 명함이 놓여 있었다.
[JBC 방송국 교양제작국 메인 PD 김도영]
빳빳하고 세련된 재질의 명함.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뿜어내는 이질적인 광채가
이 남루한 반지하 거실과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윤희의 귓가로 낮에 도영의 차 안에서 들었던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환청처럼 맴돌았다.
"가끔 숨 막히고 답답할 때 연락해."
"애기 엄마 말고, 그냥 옛날 후배 차윤희로서."
'차윤희.'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입안으로 가만히 굴려보았다.
너무 오래 불리지 않아 발음조차 어색해진 이름.
윤희의 시선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정우의 안방 문과
식탁 위의 명함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 명함을 당장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이성이 소리쳤지만,
그녀의 본능은 이미 명함을 꽉 쥐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차윤희'라고 불러주는 곳.
내 어깨의 무거운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그저 온전한 여자로 숨 쉴 수 있는 그 찰나의 시공간이 윤희는 미치도록 절실했다.
그것이 설령 내 가정을 파탄 낼 독이 든 사과라 할지라도,
이 지독한 갈증을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베어 물고 싶었다.
'똑딱. 똑딱.'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윤희의 가쁜 숨소리와 뒤섞이던 밤 열한 시.
윤희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 불빛이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서늘하게 비추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명함에 적힌 번호를 하나씩 액정 위에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20년이라는 길고 긴 쇼윈도 부부의 서막을 알리는, 파멸의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