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엄마라는 이름 뒤에 지워져 가는 '나'

[다시, 봄] 기계가 된 남편과 독박 육아 속에서 썩어 들어가는 아내

by 이세라

지훈이의 첫 울음소리가 분만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날,

시어머니는 병원 복도에서 두 손을 모으고 만세를 불렀다.

정우는 갓 태어난 핏덩이를 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했다.


'아들.'


자신을 쏙 빼닮은,

이 팍팍한 삶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귀한 아들이었다.


그 벅찬 환희와 축복의 틈바구니 속에서,

퉁퉁 부은 얼굴로 땀범벅이 된 채 탈진해 누워있는

윤희의 창백한 입술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째가 태어나자 정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과,

완벽한 네 식구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 무거운 압박감은

그를 흡사 일하는 기계처럼 만들었다.

그는 주말마다 물류센터의 야간 아르바이트를 뛰었고,

건설 현장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위험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야간 특근 수당에 목을 맸다.


정우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해 내 새끼들에게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지 않는 것.


새벽별을 보며 나갔다가 자정이 넘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남편.

윤희는 그런 정우가 안쓰러우면서도, 점점 숨이 막혀왔다.

정우가 바깥이라는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는 동안,

윤희는 집안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세 살 터울의 남매를 홀로 키우는 건 매일이 한계와의 싸움이었다.


밤낮이 바뀐 갓난쟁이 지훈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동시에 동생에게 엄마를 뺏겨 칭얼거리는 첫째 서윤이를 안아 달래야 했다.

하루에 단 두 시간도 맘 편히 자지 못했다.

늘어진 면 티셔츠에는 쉰내 나는 젖자국과 토사물이 훈장처럼 얼룩져 있었고,

머리는 며칠째 감지 못해 엉켜있었다.


밥을 차려 먹을 기력조차 없어

싱크대에 선 채로 찬밥을 물에 말아 마시듯 넘기는 날들이 허다했다.

어느 날 밤, 현장 사람들과 술 한잔하고 거나하게 취해 돌아온 정우가 안방 문을 열었다.

그는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의 볼에 연신 입을 맞추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푹푹 찌는 좁은 주방에서, 가스레인지 위 끓는 들통에 젖병을 삶으며

퀭한 눈으로 솟아오르는 뜨거운 수증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지훈이 엄마,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내 새끼들 예쁘게 잘 키워줘서 고마워."

그 말끝에 정우는 씻지도 않은 채 소파에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지훈이 엄마.'


'내 새끼들.'


윤희는 젖병 소독기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우의 그 다정한 위로가 왜 이토록 서글프고 잔인하게 들리는 걸까.

그에게 윤희는 더 이상 스물다섯의 눈부셨던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소중한 아이들을 무탈하게 길러내는 보모이자,

가정이라는 성을 견고하게 유지해 주는 성실한 부속품에 불과했다.


정우의 사랑은 윤희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윤희가 만들어준 '완벽한 가족'을 향해 있었다.

윤희는 홀린 듯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비친 거울 속에는 푸석푸석하게 갈라진 피부,

생기 잃은 눈동자,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해 앙상해진 어깨를 가진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스물다섯에 정우의 손을 잡고 수줍게 웃던 차윤희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물다섯에 결혼해 곧바로 첫째를 낳고,

스물여덟에 둘째까지 품에 안으며 그녀의 빛나던 20대는 온전히 지워져 버렸다.


대학 동기들이 예쁜 옷을 입고 봄꽃놀이를 가거나 커리어를 쌓아갈 때,

그녀는 기저귀 발진 크림을 고르며 맘카페를 뒤졌다.

남편은 험한 공사판에서 뼈가 부서져라 피땀을 흘리며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갔지만,

윤희의 세계는 거실과 안방, 그리고 싱크대 앞이 전부였다.


철저한 사회적 고립.


지독한 산후우울증이 소리 없이 그녀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한낮,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들을 치우다 말고 윤희는 짐승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내면 아이들이 깰까 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꺽꺽대며 오열했다.


왜 우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한가운데 커다란 싱크홀이 뚫린 것처럼 공허하고 시렸다.

"엄마..."

낮잠에서 깬 서윤이가 눈을 비비며 칭얼거리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


윤희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일그러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되는 존재였다.

우울해할 자격조차 사치인 이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바닥을 긁는 듯한 지독한 외로움이 이미 아내의 내면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일에 취해 살던 남편 정우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지독한 장마가 시작되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밤새 칭얼거리던 둘째 지훈이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윤희는 혼비백산하여 해열제를 먹였지만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우는 하필 지방으로 1박 2일 출장을 떠난 상태였다.

새벽 내내 아이를 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윤희는,

아침이 밝자마자 첫째 서윤이를 서둘러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지훈이를 둘러업은 채 동네 소아과로 향했다.

소아과는 감기에 걸린 아이들과 지친 표정의 엄마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기 시간만 무려 두 시간.


등 뒤에 업힌 지훈이는 칭얼거리다 못해 악을 쓰며 울기 시작했고,

윤희는 아이를 달래려 좁은 병원 복도를 끊임없이 서성여야 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떡져서 대충 고무줄로 질끈 묶여 있었고,

급하게 걸쳐 입고 나온 헐렁한 티셔츠 어깨춤에는

지훈이가 토해놓은 끈적한 분유 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었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퀭한 얼굴.


누구 하나 그녀를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여자로 보지 않을,

완벽하게 찌든 아줌마의 몰골이었다.

"강지훈 아기 어머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부름에 윤희는 허겁지겁 진료실로 향했다.


다행히 단순 열감기라는 진단을 받고 처방전을 쥐고 나오는데,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건물 1층의 약국에서 약을 타기 위해 지갑을 꺼내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아이가 갑자기 크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윤희의 손에서 미끄러진 지갑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필이면 지퍼가 열려 있던 탓에,

안에 들어있던 동전들과 구겨진 영수증,

꼬깃꼬깃한 할인 쿠폰들이 약국 바닥으로 볼품없이 쏟아져 내렸다.

"아..."

윤희는 낮게 탄식하며 무거운 몸을 쪼그려 앉았다.


등에는 뜨거운 아이가 매달려 있고,

바닥에는 구질구질한 자신의 현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당장 동전 하나라도 아쉬운 처지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그때,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누군가의 발이 윤희의 시야에 들어왔다.

반듯하게 다려진 네이비색 정장 바지.

코끝을 스치는 은은하고 세련된 우디향.


윤희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그 남자가 윤희의 곁으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바닥에 흩어진 동전과 영수증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저,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윤희가 당황하며 만류했지만,

남자는 주워 담은 지갑을 윤희의 손에 정중하게 쥐여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다 주운 것 같네요."


"감사합..."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건네던 윤희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윤희는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여유로운 미소.


스물두 살 대학 시절,

방송제에서 늘 완벽한 수트 핏을 자랑하던 선배.


'도영'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도영은 아나운서를 꿈꾸며 빛나던 윤희를 곁에서 묵묵히 챙겨주던 다정한 선배였다.


비록 윤희가 일찍 정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그저 좋은 선후배로 남았지만,

윤희의 가장 눈부셨던 청춘의 한가운데를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도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차윤희...?"

'쿵!' 그 세 글자가 고막을 때리는 순간,


윤희는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너, 차윤희 맞지?"

누구 엄마, 누구 아내라는 무거운 껍데기가 아니라,

5년 만에 처음으로 불려본 온전한 내 이름.

그 소리가 어찌나 낯설고도 눈물겹게 다가오는지,

윤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헝클어진 꼴이,

토사물이 묻은 어깨가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지금 도영의 눈에 자신이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여자로 보일까.

윤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을 쳤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거짓말을 내뱉고 도망치듯 약국 문을 나서려는 윤희의 팔목을,

도영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붙잡았다.

"거짓말. 내가 널 어떻게 못 알아봐."

윤희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도영의 시선이 윤희의 낡은 옷차림과 등에 업힌 아이를 천천히 훑었다.


동정이나 비웃음이 섞여 있을까 봐 윤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도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내 기억 속 차윤희, 그 예쁜 모습 그대로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다정한 거짓말이 윤희의 견고했던 절망의

벽에 아주 미세한 균열을 냈다.


도영의 눈빛은 초라한 아줌마가 아니라,

벚꽃 날리던 캠퍼스에서 당당하게 웃던

여대생 차윤희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영이 윤희의 손에 들린 약봉지를 가볍게 빼앗아 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 이번에 이 동네로 발령받아서 어제 막 이사 왔거든."

"짐 정리하다 두통약 사러 내려왔는데 널 다 만나네."

약국 유리문 밖으로는 무서운 기세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였다.

"우산도 없는 것 같은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애기 열도 펄펄 끓는데 이러고 걸어가면 큰일 나."

"앞 공영주차장에 차 대놨으니까 타. 데려다줄게."


윤희가 한사코 거절하려 했지만,

도영은 이미 자신의 정장 재킷을 벗어 아이가 비를 맞지 않게

단단히 덮어주며 윤희를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결국 도영의 차에 올라탄 윤희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조용하고 쾌적한 세단 안.


윤희는 코끝을 맴도는 도영의 낯선 향수 냄새와,

빗물에 젖은 자신의 옷에서 피어오르는

시큼한 젖내를 동시에 맡으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서 있는 밑바닥의 현실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져 비참했다.

남편 정우는 늘 험한 비바람을 뚫고 돈을 벌어오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아내가 짐을 들고 비를 맞고 있을 때

편안한 차를 내어주거나 어깨를 감싸주는 세심함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윤희의 이름 석 자를 불러주며

기꺼이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옛 남자의 온기.


그것은 메말라 비틀어진 윤희의 마음에 떨어진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단비였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파국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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