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화려한 원피스와 젖이 새는 수유 패드 사이의 기괴한 괴리감
통화 연결음이 세 번을 채 울리기도 전이었다.
"여보세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영의 목소리에
윤희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이성과,
이 목소리를 조금만 더 듣고 싶다는 지독한 갈증이 거세게 충돌했다.
"여보세요? 윤희니?"
침묵하는 수화기 너머의 미세한 숨소리만으로도
도영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챘다.
그 다정한 부름에 윤희의 견고했던 인내심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선배... 저, 윤희예요."
물기 어린 윤희의 목소리가 어두운 거실에 조용히 흩어졌다.
안방에서는 여전히 남편 정우의 코 고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내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집안에서
다른 남자와 통화를 하고 있다는 배덕감과 공포가
윤희의 손끝을 파르르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도영은 윤희의 그 위태로운 떨림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었다.
"전화해 줄 줄 알았어.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윤희야. 내일 시간 어때?"
"길게 말고, 딱 한 시간만 나한테 내어줄래?"
'딱 한 시간.'
그 짧은 조건이 윤희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밥 한 끼도 아니고,
그저 차 한잔 마시는 것뿐인데 무슨 큰일이 날까.
윤희는 스스로에게 비겁한 면죄부를 쥐여주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윤희는 정우가 출근하자마자 첫째 서윤이를 서둘러 어린이집에 보내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지훈이를 잠시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미뤄둔 충치가 너무 아파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고 오겠다는 핑계였다.
친정엄마는 딸이 아프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와 주었고,
윤희는 죄인처럼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와 약속 장소 근처 상가의
허름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세면대 앞,
윤희는 손에 들고 온 낡은 종이가방에서 연노란색 원피스를 꺼냈다.
무려 4년 전,
정우와 벚꽃 구경을 갈 때 입었던 옷이었다.
쉰내 나는 수유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지자,
거울 속에는 잦은 수유로 볼품없이 처진 가슴과 튼 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찌릿.'
때마침 가슴에 모유가 도는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윤희는 황급히 가방을 뒤져 두꺼운 일회용 수유 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예전의 얇고 예뻤던 속옷 안쪽에 패드를 구겨 넣어 단단히 고정했다.
모유가 새어 나와 연노란색 원피스를 얼룩지게 할까 봐 두려웠다.
'여자 차윤희'로 보이고 싶어 발버둥 치지만,
자신의 신체는 이미 '지훈이 엄마'로 완벽하게 세팅되어
통제조차 할 수 없다는 잔인한 현실.
윤희는 젖이 차올라 빵빵해진 가슴 위로
힘겹게 원피스 지퍼를 올리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화장품 파우치를 열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코랄색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푸석한 얼굴에 억지로 색을 입히는 자신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지금 미쳤다.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여자는,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은 차윤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방송국 근처의 조용하고 세련된 갤러리 카페였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쾌적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짙은 커피 향이 윤희를 감쌌다.
눅눅한 곰팡내와 시큼한 젖내가 배어있던 윤희의 일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다른 차원의 세계 같았다.
"윤희야, 여기."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도영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반듯한 셔츠 차림의 그는
대학 시절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근사한
어른 남자의 태를 풍기고 있었다.
윤희가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도영은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주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아기 맡기고 나오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아... 네, 친정엄마가 잠깐 도와주셔서요."
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윤희가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자신의 철 지난 원피스와 촌스러운 화장이
도영의 세련된 모습과 너무 대비되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속옷 안쪽에 덧대어 놓은 수유 패드가
답답하게 가슴을 조여오고 있었다.
그때, 종업원이 두 잔의 음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한 잔은 도영의 아메리카노,
그리고 윤희의 앞에는 뽀얀 우유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간 바닐라 라떼였다.
"너 대학 때 맨날 바닐라 라떼만 마셨잖아. 아직도 단 거 좋아해?"
윤희의 두 눈이 커졌다.
남편 정우조차 윤희가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카페에 갈 여유도 없었거니와,
늘 생활비를 아끼느라 집에서 믹스 커피만 타 마셨으니까.
그런데 무려 5년 전,
자신이 즐겨 마시던 커피 취향을 이 남자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 하시네요."
"네 기억은 하나도 안 잊어버렸어."
도영이 턱을 괸 채,
윤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 직설적이고도 깊은 시선에 윤희의 귀끝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오늘 되게 예쁘네."
"옛날 방송제 때 스탠바이 하던 차윤희 아나운서 보는 것 같다."
"놀리지 마세요. 저 아줌마 다 된 거 알아요."
"살도 많이 찌고..."
"아니. 내 눈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네가 제일 예뻐."
단호하게 끊어내는 도영의 말에 윤희는 호흡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남편 정우에게서 마지막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은 게 언제였던가.
연애 시절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독하게 달콤하고 낯선 칭찬이었다.
"너, 낭독하는 거 정말 좋아했잖아."
"목소리가 사람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거든. 지금은 어때?"
"아직도 가끔 책 소리 내서 읽어봐?"
육아, 남편, 시댁, 집안일.
윤희의 삶을 짓누르던 무거운 단어들은
도영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차윤희라는 사람의 과거와 꿈,
그리고 현재의 감정만을 묻고 있었다.
윤희는 눈앞의 달콤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에 닿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서러운 이성을 순식간에 녹여 내리고 있었다.
도영과 마주 앉아 있던 한 시간은 잔인하리만치 빠르게 흘러갔다.
육아도, 돈 걱정도, 무심한 남편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
오직 '차윤희'라는 사람에게만 온전히 집중해 주는
다정한 눈빛 속에서,
윤희는 10년 치의 막혔던 숨을 단숨에
몰아쉰 것 같은 황홀함을 느꼈다.
하지만 마법은 끝났다.
약속한 한 시간이 되자
윤희는 초조하게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데려다줄게, 윤희야."
도영이 차 키를 챙기며 일어섰지만,
윤희는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병원, 병원 들렀다 가야 해서..."
어설픈 치과 핑계를 댄 윤희는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도영은 아쉬운 눈빛이었지만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그녀의 뒷모습을 따뜻하게 배웅했다.
상가 건물로 들어선 윤희는
다시 그 허름하고 좁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면대 거울을 본 순간,
꿈에서 깬 신데렐라처럼 비참한 현실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가슴은 그새 모유가 돌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뭉쳐 있었고,
속옷 안에 덧대어둔 수유 패드는 이미 묵직하게 젖어 있었다.
지퍼를 내리자 짓눌려 있던 젖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번졌다.
윤희는 황급히 연노란색 원피스를 벗어 종이가방에 쑤셔 넣고,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쉰내 나는 수유 티셔츠를 다시 뒤집어썼다.
세면대에 비치된 싸구려 물비누를 짜내어,
거친 화장실 휴지로 입술에 발랐던
코랄색 립스틱을 벅벅 문질러 지우기 시작했다.
쉽게 지워지지 않고 번지는 립스틱 자국을
미친 사람처럼 닦아내다 보니,
윤희의 입술 주변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치과에서 신경치료 마취가 덜 풀린 척 연기를 하려면
이 벌건 자국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윤희는 세면대를 짚고 소리 죽여 울었다.
잠깐의 일탈이 준 지독한 달콤함과,
그 대가로 치러야 하는 뼈아픈 자괴감이 뒤섞여
가슴을 무참히 후벼 팠다.
집으로 돌아와 축축한 반지하 현관문을 열자,
아이의 악쓰는 울음소리가 가장 먼저 윤희의 고막을 때렸다.
"어휴, 이제 오니. 신경치료는 잘 받았어?"
"애가 낯가리며 엄마 찾는다고 어찌나 칭얼대는지 아주 혼이 다 빠졌다."
친정엄마는 땀범벅이 된 채
갓난 지훈이를 안고 좁은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친정엄마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딸을 향한 안쓰러움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엄마, 미안해... 어, 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말이 잘 안 나와..."
윤희는 일부러 어눌한 발음으로
입을 틀어막고 얼버무리며 도망치듯 아이를 건네받았다.
퉁퉁 부은 젖가슴으로 아이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
윤희의 심장에 날카로운 죄책감이 푹 하고 꽂혔다.
내 친정엄마는 제 딸내미 이가 아플까 봐
밥도 못 먹고 노심초사하며 손주를 업고 있었는데,
그 시각 미친 딸년은 립스틱을 바르고 옛 남자와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천하의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혐오감에
윤희는 지훈이의 등을 토닥이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는 딸이 치통이 심해서 우는 줄로만 알고
혀를 쯧쯧 차며 윤희의 등을 다독였다.
그 따뜻한 손길이 윤희에겐 채찍처럼 아팠다.
얼마 후 친정엄마가 돌아가고, 지훈이에게 젖을 물려 겨우 재운 뒤였다.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 식은 보리차를 마시려
싱크대 앞에 선 윤희의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 액정에 뜬 발신자는 도영이었다.
[오늘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어.]
[짧아서 아쉬웠지만, 넌 여전히 내가 아는 가장 눈부신 여자야.]
[우리 다음엔 두 시간 보자.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윤희야.]
그 다정하고도 치명적인 문자 한 통.
윤희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꽉 품은 채 싱크대 아래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죄책감으로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던 가슴 한구석에서,
지독하게 달콤한 독버섯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파국을 향한 브레이크 없는 폭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