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어미의 피눈물을 밟고 서서 완벽하게 타락해 가는 윤희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모녀 위로,
무겁고 습한 장맛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반지하의 얇은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리는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오열을 간신히 덮어주고 있었다.
엄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엎드린 윤희의 깡마른 어깨를 쓰다듬지도,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한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딸이 저지른 짓은 천인공노할 불륜이었고,
뙤약볕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사위를 기만한 끔찍한 배신이었다.
당장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 이 미친년의 머리채를 끌고 나가라고 소리치는 것이,
평생을 시장바닥에서 꼿꼿하게 살아온 엄마의 도덕관념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시선이 현관문 앞,
비좁은 신발장에 놓인 낡은 신발 세 켤레에 머무는 순간 이성의 끈이 맥없이 끊어지고 말았다.
뒤축이 다 닳아빠진 윤희의 싸구려 비닐 샌들과,
서윤이가 유치원 장화를 신는 날 빼고는 매일 구겨 신는 작아진 운동화.
그리고 그 가난하고 비루한 삶의 증거물 옆으로,
이제 겨우 백일을 넘긴 지훈이의 앙증맞은 헝겊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모든 더러운 진실을 강 서방이 알게 된다면.
세상 착하고 순박한 그 남자의 눈이 뒤집혀
이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를 때려 부수고 윤희를 길거리로 내쫓는다면.
저 어린 핏덩이들은 애미 없는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생 가난과 상처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야 한다.
"스물다섯에 덜컥 시집와서 사회생활 한 번 못 해보고 모아둔 돈도 땡전 한 푼 없는 내 불쌍한 딸년은,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길바닥에 나앉아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 참담하고도 서늘한 현실 감각이 엄마의 활활 타오르던 분노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핏줄이라는 것은 이토록 질기고도 잔인한 것이었다.
딸의 죄악을 심판하기에는, 늙은 어미의 모정이 너무도 깊고 비참했다.
"일어나... 이 짐승만도 못한 년아. 얼른 일어나서 세수해."
엄마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바닥에 나뒹굴던 남양주 타르트 상자 조각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게,
아주 잘게 찢어 자신의 낡은 몸빼 바지 주머니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윤희의 죄악을 어미인 자신이 함께 짊어지고 지옥 불에 떨어지겠다는,
피눈물 나는 공범의 맹세였다.
"엄마... 미안해. 내가 진짜 미쳤었나 봐... 한 번만 살려줘."
윤희가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 손을 싸늘하게 뿌리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강 서방한테는...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입 다물 거다."
"내 딸년 목숨 살리자고, 그 불쌍한 강 서방 가슴에 내가 씻을 수 없는 대못을 박아."
엄마의 두 눈에서 탁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깊게 팬 주름을 적셨다.
"대신, 당장 그놈 번호 지워!"
"두 번 다시 그 미친놈이랑 연락하거나 밖으로 나도는 꼴 내 눈에 띄면, 그날은 내가 강 서방 앞에서 혀를 깨물고 콱 죽어버릴 테니까. 알아들었어!"
엄마의 피 끓는 경고에 윤희는 바닥에 엎드린 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가겠다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수백 번 맹세하며 눈물을 쏟았다.
엄마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쾅, 하고 닫힌 무거운 철문 너머로 빗소리가 더욱 거세게 밀려왔다.
홀로 남겨진 거실.
윤희는 허깨비처럼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퉁퉁 부은 눈을 씻어내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채를 잡혀 엉망이 된 산발과 붉게 달아오른 뺨.
엄마의 말대로 당장 도영의 번호를 차단하고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어미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고 남편을 기만한 이 무서운 연극의 막을 당장 내려야만 했다.
그런데,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던 윤희의 가슴 한구석에서 기괴하고도 소름 끼치는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지독한 안도감이었다.
들키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목격자였던 친정엄마가 결국 내 편으로 돌아섰으니,
이제 둔감한 남편 정우의 눈만 피한다면
나의 이 완벽한 일탈을 방해할 장애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의 묵인은 윤희에게 알량한 죄책감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알리바이보다 강력하고 안전한 방패막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울 속 윤희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떨던 파리한 기색은 사라지고,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자의 오만한 생기가 돌았다.
윤희가 거실로 나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한 시간 전 도영이 보낸 다정한 안부 문자가 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네."]
["우리 윤희, 눅눅한 집에서 빗소리 들으면서 우울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
["보고 싶다."]
그 활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윤희의 입가에 기어이 옅은 미소가 번지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어미 앞에서 바닥을 기며 오열했던 여자의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하고도 요염한 웃음이었다.
윤희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액정 위를 움직였다.
"선배. 저 내일... 선배 오피스텔로 가도 돼요? 종일 같이 있고 싶어요."
전송 버튼을 누른 윤희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미가 흘린 피눈물조차,
타락의 길로 접어든 딸의 브레이크 없는 욕망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덕적 한계선을 넘어 완전한 괴물로 각성한 윤희는,
그렇게 스스로 지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아홉 시 반.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낡은 우산을 받쳐 든 윤희가,
노란색 유치원 버스에 첫째 서윤이를 태워 보내고 반지하 집으로 돌아왔다.
장맛비가 온 동네를 집어삼킬 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바짓단을 대충 털어낸 윤희는 화장대 거울 앞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단축 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엄마... 나야."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엄마의 거칠고 무거운 숨소리만이 빗소리에 섞여 아스라이 들려올 뿐이었다.
윤희는 일부러 목소리를 한껏 떨리게 쥐어짜 내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연기를 시작했다.
"엄마, 나 어제 일 때문에... 도저히 숨을 못 쉬겠어."
"자꾸 나쁜 생각이 들어서 싱크대 서랍에 있는 식칼만 한참을 쳐다봤어."
"차라리 수면제라도 잔뜩 삼키고 이대로 영영 안 깨어났으면 좋겠어..."
"나 진짜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
"오늘 신경정신과 가서 약이라도 제대로 처방받고 올게."
"나 병원 좀 다녀오게 지훈이 한 번만 더 봐주면 안 될까."
비열하고도 잔인한 한 수였다.
딸이 다시 바람을 피우러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어미의 의심을,
자살 충동이라는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공포로 짓눌러버린 것이다.
"하이고... 내 팔자야."
"알았어. 허튼생각 말고 가만히 있어."
"애미 지금 우산 쓰고 나갈 테니까."
전화를 끊은 윤희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내 딸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관절염 앓는 다리를 이끌고 빗속을 뚫고 달려올 늙은 어미.
그 어미의 피눈물을 밟고 서서,
윤희는 화장기 하나 없는 파리한 맨얼굴로 거울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은 화장대 서랍 가장 깊은 곳을 뒤져,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어 점퍼 주머니 속에 차갑게 숨겨 넣고 있었다.
한 시간 뒤.
비에 흠뻑 젖은 우산을 털며 친정엄마가 현관문 안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섰다.
하룻밤 새 십 년은 폭삭 늙어버린 듯,
엄마의 얼굴은 흙빛으로 죽어 있었고 눈가에는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딴 데 새지 말고... 병원 가서 약만 딱 타서 곧장 들어와."
"비도 오는데 유치원 버스 오기 전에는 와서 서윤이 네가 받아야지. 알았어?"
엄마가 바닥에 눕혀진 지훈이를 불안하게 안아 들며,
신발을 신는 윤희의 파리한 맨얼굴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로 당부했다.
"알았어, 엄마. 빨리 다녀올게."
윤희는 엄마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황급히 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고,
반지하 빌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윤희는 우산을 받쳐 든 채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붉은 립스틱을 꺼냈다.
아스팔트를 때리는 거센 빗소리 속에서,
윤희는 쇼윈도 유리에 비친 자신의 핏기없는 입술 위에 붉은색을 탐욕스럽게 덧바르기 시작했다.
파리하고 우울했던 지훈이 엄마의 장막이 걷히고,
소름 끼치도록 요염하고 들뜬 생기가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빗물이 튀어 구두가 젖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도영의 오피스텔을 향해 날아갈 듯이 걸음을 재촉했다.
낮 열한 시 십오 분.
도영의 오피스텔.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육중한 현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비 많이 오는데 일찍 왔네, 윤희야."
도영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비에 젖은 윤희의 우산을 받아들었다.
문이 닫히고 바깥의 거센 빗소리가 완벽하게 차단되자,
오피스텔 특유의 서늘하고 쾌적한 에어컨 공기와
도영의 묵직한 우디 향이 윤희의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왔다.
그 완벽한 쾌적함.
윤희는 젖은 샌들을 벗어 던지듯 벗어놓고,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도영의 넓은 품으로 와락 파고들었다.
도영의 단단한 팔이 윤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붉게 칠해진 윤희의 입술이 도영의 입술과 습하고 뜨겁게 맞물렸다.
바깥 세상은 폭우로 물바다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최고급 통유리창으로 차단된 오피스텔 안방의 푹신한 침대 위는
오직 두 사람만의 완벽하고도 달콤한 천국이었다.
윤희는 도영의 손길 아래서,
자신이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도,
정우의 아내라는 사실도,
그리고 지금 빗물이 새는 반지하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있을 늙은 어미의 존재조차도
완벽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같은 시각.
비가 줄기차게 새는 눅눅한 반지하 집 거실.
친정엄마는 칭얼거리는 손주를 등에 업은 채,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빗물을 걸레로 훔쳐내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병원을 간다던 딸년은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어미의 직감은 딸이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딸의 공범이 되어버린 엄마는 그저 자신의 가슴만 퍽퍽 내리칠 뿐이었다.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상가 신축 공사 현장.
시멘트 포대가 비에 젖을까 봐,
정우는 우비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거운 방수포를 덮어씌우고 있었다.
진흙탕에 미끄러져 무릎이 까지고 빗물이 눈을 가려도,
그는 흙 묻은 얼굴을 빗물에 대충 씻어내며 사람 좋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마누라 요새 우울증도 나아지고 얼굴도 뽀얘져서 참 이쁜데."
"내가 돈 더 많이 벌어서..."
"어제 친구가 사 온 그런 비싼 빵 앞으론 내 손으로 매일 사주고,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도 빨리 벗어나게 해줘야지."
불륜으로 핀 아내의 붉은 생기를,
자신의 사랑이 닿아 우울증이 나은 것이라 철떡 같이 믿고 있는 멍청하고도 가여운 가장.
그 극명하게 갈라진 세 사람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스무 살의 눈부셨던 맹세는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의 밑바닥을 향해 맹렬하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