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젖은 옷에 남은 증거, 비참한 장례식

[다시, 봄] 새벽 2시, 가난한 자신을 자책하며 조용히 쏟아낸 피눈물

by 이세라

쏴아아.


녹이 슨 낡은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물줄기가

정우의 단단한 어깨를 때리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좁고 습한 욕실 안은 금세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찼지만,

정우의 머릿속은 한겨울 얼음물에 머리를 박은 것처럼 서늘하고 명징해지고 있었다.

싸구려 비누를 거품 내어 흙먼지가 엉겨 붙은 얼굴과 목덜미를 거칠게 문질러 닦아내면서도,

정우의 후각은 좀 전의 그 끔찍했던 순간에 완벽하게 멈춰 있었다.

비에 젖은 아내가 자신에게 다가오던 그 찰나의 순간.


눅눅한 빗물 냄새를 뚫고 훅 끼쳐오던 낯설고 묵직한 우디 향.

그것은 상가 매장 화장품 코너의 가벼운 냄새가 아니었다.


땀 흘려 일하는 노가다꾼들은 평생 가야 한 번 맡아볼 일 없는,

지독하게도 여유롭고 세련된 수십만 원짜리 고급 남성 향수의 냄새였다.

장모님은 아내가 우울해서 화장품 코너에서 이것저것 발라본 것이라며 억지를 썼지만,

정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립스틱을 발라본다고 해서 옷의 섬유 조직 깊숙한 곳까지

다른 남자의 진한 체취가 흠뻑 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와 아주 좁고 밀폐된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었거나,

숨결이 닿을 만큼 격렬하게 살을 맞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냄새였다.

정우는 샤워기 레버를 잠그고,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거칠게 훔쳐냈다.


거울 속 자신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바라보며,

둔감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돌아온 자신을 향해 역겹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등 돌려 눕던 아내의 싸늘한 뒷모습.


친구를 만나고 왔다던 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남양주 북한강 주소가 적힌 그 비싼 호두 타르트 상자.


그리고 오늘,

동네 병원에 약을 타러 간다면서 평소엔 입지도 않던 화려하고 얇은 원피스를 입고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채 비를 맞고 뛰어오던 모습까지.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의 잔인한 진실을 향해 맞춰지고 있었다.


장모님의 그 핏발 선 처절한 오열조차,

딸의 수상한 행적을 덮어주기 위한 어설프고 다급한 연극이었음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정우의 굵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욕실 문을 박차고 나가 아내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누구의 냄새냐고,

남양주에 간 그 친구라는 놈은 대체 어떤 새끼냐고 포효하고 싶었다.


가난한 남편이 뙤약볕에서 진흙탕을 구르는 동안,

어떤 놈의 품에서 그렇게 붉은 입술을 부비다 왔냐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정우는 피가 나도록 꽉 깨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고 깊은숨을 토해냈다.


지금은 아니었다.


확증이 없는 의심은 아내와 장모의 또 다른 발악과 거짓말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8년을 함께한 아내를 한순간에 잃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두 아이를 고아로 만들지 않으려면

완벽하고 숨 막히는 물증이 필요했다.

정우는 욕실 문고리를 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평소의 그 무던하고 바보같이 착한 남편의 가면을 다시 얼굴에 뒤집어쓰기 위한,

처절한 의식이자 끝이 나버린 사랑을 마주하러 가는 비참한 발걸음이었다.

'달칵.'


욕실 문이 열리자,

거실에서 지훈이를 안고 서성거리던 윤희가 흠칫 놀라며 정우의 눈치를 살폈다.


장모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없는 듯,

집안은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여보. 장모님은 가셨어?"

정우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최대한 평온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윤희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어... 엄마 관절염 때문에 비 오면 다리 쑤신다고,

서윤이 젖은 옷만 대충 갈아입혀 놓고 당신 화장실 들어가자마자 방금 가셨어."


"당신 배고프지. 내가 금방 찌개 데워줄게."

윤희가 도망치듯 주방으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여보, 잠깐만."

정우의 나지막한 부름에 윤희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정우는 천천히 걸어가 아내의 깡마른 어깨를 뒤에서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순간, 아직 씻지도 않은 아내의 젖은 머리카락과 원피스 목덜미에서

그 지독하고 묵직한 남자 향수 냄새가 다시 한번 정우의 폐부를 깊숙이 찔러왔다.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솟구치고 아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정우는 피가 나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목소리를 한없이 다정하게 꾸며냈다.


품에 안긴 윤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잘게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당신 비를 하도 많이 맞고 들어와서."

"옷도 다 젖고 우산도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놀라서 말이 헛나왔어."

"장모님 말씀 들으니까..."

"당신이 요즘 이 반지하 집에서 얼마나 숨 막히고 답답했을지 내가 너무 무심했다 싶네.""예쁜 옷 입고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데, 내가 냄새 타령이나 하고 미안해."

정우의 그 다정하고 바보 같은 사과에,

윤희는 억눌렸던 숨을 몰아쉬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남편의 둔감함이 또다시 자신을 살려냈다는 안도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니야..."

"내가 비 오는데 쓸데없이 상가 구경하다가 늦어서 서윤이도 못 데리러 가고..."

"내가 미안해, 여보."

"그래. 앞으로는 예쁜 옷 입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돈 더 많이 벌어서 당신 옷도 사주고, 립스틱도 사줄게."

"얼른 젖은 옷 벗고 씻어. 감기 걸리겠다."

"벗은 옷은 거기 빨래통에 던져놓고."

정우는 윤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윤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긴장이 풀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처절했던 거짓말 덕분에,

남편의 의심은 또 한 번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윤희는 완벽하게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방 문을 닫고 선 정우의 두 눈은,

평소의 다정함을 완전히 지워낸 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텅 비고 까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새벽 두 시.


윤희와 두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정우가 소리 없이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우는 발소리를 죽인 채 화장실 앞 세탁 바구니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거친 손을 뻗어,

윤희가 낮에 벗어 던져놓은 그 화려하고 얇은 젖은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옷자락을 코끝에 천천히 가져다 댄 정우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빗물과 습기에도 씻겨 내려가지 않은 그 지독하고 묵직한 수십만 원짜리 남성 향수의 냄새가,

그리고 어설프게 닦아낸 윤희의 입술에서 번졌던 붉은 립스틱의 잔여물이 옷깃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상가 매장 화장품 코너를 지나가다 우연히 묻은 냄새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낯선 온기를 품고 돌아왔다는 명백하고도 비참한 낙인이었다.


정우는 젖은 원피스를 틀어쥔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었다.

정우의 두 눈에서 마침내 차갑고 뜨거운 눈물이 동시에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아내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의 장례식인 동시에,

자신의 뼈저린 가난이 결국 아내를 다른 남자의 품으로 내몰았다는

참담한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서글픈 사형 선고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두 시 십오 분.


정우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세탁 바구니에서 꺼냈던 젖은 원피스를 원래대로 조심스럽게 구겨 넣었다.


지독한 우디 향의 잔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배신감에 찢겨 나간 심장 위로,

그 향기가 상징하는 지독한 부유함과 여유로움이 정우의 숨통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정우의 시선이 거실 한구석,


낡은 밥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윤희의 핸드백으로 향했다.


정우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다가가 조심스럽게 핸드백의 버클을 열었다.


안에는 지갑과 아기 물티슈, 그리고 겉면이 잔뜩 긁힌 윤희의 낡은 폴더폰이 들어있었다.


정우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폴더를 열고 메뉴 버튼을 눌러 '메시지 보관함'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화면에는 자물쇠 아이콘과 함께 네 자리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입력 창이 떴다.


정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첫째 서윤이의 생일인 0412를 눌렀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지난 3년 동안, 윤희의 모든 비밀번호는 늘 아이들의 생일 이거나,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경고음과 함께 붉은 글씨가 깜빡였다.


정우의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둘째 지훈이의 생일을 눌렀다.


오류.


결혼기념일을 눌렀다.

또다시 오류.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는,

완벽하게 단절된 벽이 생겨났다는 가장 명백하고 씁쓸한 증거였다.


정우는 허탈한 눈으로 '비밀번호 입력' 창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뀐 네 자리의 숫자를 풀지 못하면 그 남자가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정우는 더 이상 키패드를 누르지 못했다.

남편인 자신이 모르는 아내의 비밀번호가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너무도 비참한 확증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디쓴 숨을 삼키며 폴더를 닫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징, 징. 손바닥 안에서 폴더폰이 짧고 묵직하게 두 번 진동했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비밀번호 입력 창 위로,

새로 도착한 문자 메시지가 투박한 팝업창을 띄우며 덜컥하고 겹쳐 떠올랐다.


메시지 내용 숨김 설정을 미처 해두지 않은, 폴더폰의 치명적인 허점이었다.

정우는 숨을 멈춘 채, 푸른 백라이트가 켜진 작은 내부 액정을 홀린 듯이 응시했다.


[발신: 수진]

자? 아까 우산도 없이 택시 잡으러 큰길로 뛰어가는 거 보면서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감기 걸리지 않게 약 꼭 챙겨 먹고 자.


"오늘 예뻤어."


순간, 정우의 두 다리에서 맥없이 힘이 풀리며 그가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참담함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는 친구가,

어떻게 오늘 한국에서 비를 맞고 큰길로 뛰어가는

윤희의 뒷모습을 보며 조마조마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동성 친구 사이에 '오늘 예뻤다'며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에

애틋하게 문자를 보내는 경우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내는 그 남자의 이름을 이민 간 친구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위장해 둔 것이었다.


남양주 북한강의 비싼 빵을 사다 준 것도,


터미널에서 펑펑 울며 헤어졌다던 그 슬픈 연극도 모두 저 수진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낯선 남자와 만나기 위한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우의 가슴속에서는 분노나 살의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수십만 원짜리 향수를 뿌리고,

비싼 호두 타르트를 아무렇지 않게 사 먹이며,

빗속을 뛰어가는 아내를 걱정해 줄 여유가 있는 남자.


반지하의 곰팡내와 퀴퀴한 노가다꾼의 땀 냄새에 지쳐버린 윤희가,

그토록 간절하게 도망치고 싶었던 낡은 현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

내가 무능해서,

내가 가난해서 내 아내가 저런 거짓말까지 해가며 그 화려한 온기를 찾아갔구나.

정우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채,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짐승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아내를 향한 원망보다,

사랑하는 여자를 가난이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신의 못난 처지에 대한

처절한 자괴감이 먼저 가슴을 찢어놓았다.

정우는 휴대전화의 화면이 까맣게 꺼질 때까지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쏟아냈다.

그리고는 휴대전화가 놓여 있던 핸드백 안의 각도와 위치를 처음과 완벽하게 똑같은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무지하고 둔감했던 남편의 늦은 각성은,

분노가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세계를 향한 비참한 장례식이었다.

정우는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다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윤희는 등을 돌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우는 어둠 속에서 윤희의 야윈 뒷모습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스무 살,

돈 한 푼 없이 사랑 하나만 믿고 자신을 따라나섰던

그 눈부셨던 여자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정우는 윤희의 등 뒤에 조용히 누웠다.


장맛비가 유리를 때리는 반지하의 비좁은 방 안에서,스무 살의 두 사람의 맹세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서툴고도 비극적인 마흔여덟의 안녕을 향한, 가장 슬픈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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