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을 수 있을까?
한때 활자중독, 지금은 난독. 소진된 독서력에 마지막 심폐소생술!
한때는 스스로 활자 중독자라 생각했었다.
변기에 앉아있는 시간에도
무엇을 읽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하다못해 샴푸 뒷면이라도 읽었다.
하루의 마무리는 항상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었고
까무룩 까무룩 졸아가면서도
읽는 게 너무 좋아
쉽사리 눈을 감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그러다 엄마가 됐다.
엄마가 되기 전 블로그에 쓴
마지막 게시글에 이런 문장이 남아있다.
"아이가 나오면 분유통에 적힌 글자도
눈에 안 들어온다던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실제로 분유 조제 설명서를
자세히 읽을 겨를이 없어
설명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분유를 타 먹였고 뒤늦게야 그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다 찾아온 반짝 황금기.
아이가 밤에 통잠을 자면서도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푹푹 낮잠을 자던
돌 전 두어 달,
낮잠 자는 아이 곁에서
백라이트가 들어오는 전자책으로
어렵지 않은 소설책을 읽는 게 가능했었다.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마치 '뇌에 혀가 달린 것처럼'
온 머리가 활자로 달려드는 희열을 경험했다. 그렇게 최은영과 김금희의 소설을,
김애란과 김영하의 수필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기쁨 한켠에는
'나는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우월감도 싹을 틔웠다.
그러나 결국은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이가 이유식을 자주 먹고 활동성이 좋아지면서 낮잠 타임을 독서와 휴식으로 활용했던 황금기는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아이를 재우면서 깜빡 같이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일어나서
앞니밖에 나지 않은 아이가
쉽게 씹을만한 음식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나와야 했다.
돌봄과 집안일 사이에 짧게 틈이 나면
여지없이 손에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기대거나 넷플릭스의 짧은 에피소드에서 안식을 구했다.
긴 호흡의 소설은 끊어 읽으니 흥미가 떨어졌고 짧은 에세이에 호응할만한 감성도 바닥났다.
27개월,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서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동안
프리랜서 번역일을 시작했다.
하루에 네댓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쓰고 고치다 보면 어느덧 노란 차에 탄 아이가
아파트 현관에 내릴 시간이었다.
돌봄에 들어가는 수고가 줄긴 했어도
생활의 스트레스를 다독이는 건
여전히 넷플릭스였다.
넷플릭스와 유투브 외엔 다른 문화생활이 없던 삶에 위기를 느낀 건 최근이다.
불현듯 내 글에서 맵시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번역한 글에서 화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평이한 단어와 지루한 문장을
연거푸 쓸 때가 늘었다.
글은 문과생이자 도서지역 거주자이자 경력단절자이자 다섯살배기의 주양육자인
나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사회와 소통하는 채널이다.
글마저 무뎌지면
정말 내겐 한발 재겨 디딜 곳이 없다.
내 유일한 재주,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는 나만의 시그니처,
내 글을 살려야 했다. 그
러려면 읽어서 채워야 했다.
나의 렉시콘(lexicon)을, 감성을.
그간 돌보지 않안 쪼그라들어버린
내 독서근육을 되살리는 것 쉽지 않았다.
지난 몇 달 정말 여러 권을 잡고 펼쳤지만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책이 태반이었다. '워킹데드'와 '기묘한 이야기'를 완주하는 동안 내 머릿속 독해력은 '1인치 자막'에 갇혀버렸다.
그러니 이 연재는 나만의 챌린지다.
읽기와 쓰기를 함께하면
읽기가 한층 풍성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읽을 것이고 읽은 것에 대해 쓸 것이고
점점 더 잘 쓰게 될 것이다.
지금은 책이 눈은커녕 손에도 잘 잡히지 않아서 집안 이곳저곳에
이 책 저책을 늘어놓는 수법을 쓰는 중이다.
이 글에선 그렇게 드문드문 읽다가
'이것 보게'하고 자세를 고쳐 잡게 하는 책 위주로 서평을 남길 생각이다.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그런 책들의 어떤 부분이 나를 끌어당겼는지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려 한다.
혹 그러지 못한 책은 왜 그랬는지를
해명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독자를 유인하는 포인트를 발견하는 건
번역을 할 때 '읽히는 책'을 선별하는 능력과도 무관하지 않아서
장기적으로는 직업능력을 향상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잘 쓰기 위해 잘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