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醜(노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서브스턴스>

by 쇠네스보헨엔데

뒤늦게 OTT로 챙겨본 영화 <서브스턴스>는 이윽고 인간이 한번 크게 늙는다는 만 44세에 도달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안에도 노화를 거스르고 싶은 욕망이야 다분했으나 막연히 감지했을 뿐이었다. <서브스턴스>는 늙음을 추함으로 직결하는 문화적 흐름을 지극히 이분법적으로, 그리하여 노골적으로 나타내었고 그 안에서 신선한 자극을 얻은 나는 영화를 본 후 얼마간 나는 세상만사를 젊음과 늙음으로 나누고 그 안에 아름다움과 추함을 대입하는 버릇을 얻기도 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19세기 말 소설을 굳이 찾아읽은 것 또한 <서브스턴스>의 문학적 레퍼런스에 해당한다는 어느 비평가의 해설을 들어서이다. 비록 영화처럼 역동과 자극의 대잔치는 아니었으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젊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다. 전성기를 그린 초상화에게 늙음을 이관하고 본인은 고고한 젊음을 유지한다는 기괴한 설정은, 그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현실적인 관계 설정과 시간의 흐름 위에 안착한 덕에 독자에게 사뭇 있음직도 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레이는 집에 음흉한 초상화를 숨겨둔 것 외에는 경솔하고 오만하며 가끔 뉘우치고 다정하기가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기에 독자는 보다 수월하게 그 위에 자신의 심경을 얹어볼 수 있다.


하늘도 젊고 아름다운 인간을 편애하는 것일까? 그레이는 자기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불사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세간에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최후의 파국에 관한 선택권마저 주인공의 손에 쥐여주었고 덕분에 그레이는 타인에 의해 허물어지는 대신 스스로 고고하게 파멸한다.


"인생이 자네의 예술이었네.

자네는 스스로를 음악에 맞췄어.

자네가 지낸 나날이 자네의 소네트였네."


"또 한번은 그녀에게 자기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때 그녀는 늙고 추한 사람이 악한 사람이지 어찌 그가 악한 사람이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젊음을 곧 아름다움으로 등치하는 데 한발 더 나아간 작가는 소설 막바지에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선으로 연결하기에 이르렀다. 부록으로 붙은 윤희기 번역가의 해설에 따르면, 오스카 와일드는 "위선적인 부르주아 도덕주의에 대한 경멸"으로 유미주의 운동에 앞장섰으며 이 소설을 통해 "예술이 미의 추구 이외에 그 어떤 다른 목적도 지니지 않음을 천명"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 맥락을 이해해보려 해도 늙음을 추함을 넘어 악으로 규정한 것에 저항감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생명을 가진 이래 늙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서브스턴스>의 엘레자베스에겐 멈출 기회가 있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그레이에게도 돌아설 타이밍이 있었다. 그러나 두 인물 모두 시간에 등 떠밀려 자연스레 삶의 무대에서 사라지기 보다는 역주행을 선택한다. 과감하게 물리법칙을 거스를 엄두를 못 내면서도 떠밀리고 싶지는 않아서 피부과와 영양제를 섬기며 발버둥치는 미약한 인간은 이야기 속 인물의 폭주에서 해방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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