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읽고서
양손에 쥔 아령을 머리 위로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그들의 손목을 유심히 보게 된 건 운동센터를 다닌지 두달이 훌쩍 넘어서다. 나를 비롯해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 아령이나 케틀벨을 들고 스쿼트나 런지를 하는 10명의 회원들은 모두 똑같은 헬스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근육보다 굳은살이 먼저 배겠다는 누군가의 푸념에 다른 누군가가 이왕 살 거면 배송비를 아끼자고 화답하여 공동구매한 아디다스 검정 장갑이었다. 똑같은 장갑을 낀 탓일까? 평소에는 예사로 보고 넘겼을 그들의 손목에서 경쾌하게 반짝이는 팔찌에 내 눈길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짧은 휴지기를 두고 강도 높은 근력 운동을 반복하는 써킷트레이닝은 이열로 나누어 운동과 휴식을 번갈아 했다. 운동 연차가 쌓일수록 거울과 트레이너에 가까운 쪽에 서기 마련이므로 자연스레 앞줄엔 고인물, 뒷줄엔 뉴비가 서게 되었다.
시립 센터에 써킷트레이닝이란 반이 생길 때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다는 '원년 멤버'가 포함된 고인물들은 로잉머신을 탈 땐 칼바람을 일으키고 윗몸일으키기는 50개를 거뜬히 채우며 마무리 점프 스쿼트를 할 때조차 체력이 남아도는 듯 경쾌하게 뛰어올랐다. 반면 등록 6개월 이하의 나 같은 뉴비들은 하체 운동을 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상체 운동을 하면 팔이 후들거리는 통에 죽을 상을 하고 뒷 줄에 서서 어기적어기적 앞줄이 하는 양을 따라하는 정도였다. 재등록 비율과 대기자 인원으로 능력치를 인정받는 트레이너로는 당연히 몇 년째 등록을 거듭하는 앞줄 회원들을 모시고 받들었으며, 뒷줄 수준에 맞춰 운동 강도를 조절해볼 고민같은 것 눈꼽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내 눈길을 사로잡은 손목의 주인공들은 앞줄에서 5파운드 덤벨을 20개째 들어올리며 스쿼트를 하는 고인물 언니들이었다. 검은 장갑과 울끈불끈 접혔다 펴지는 전완근 사이에서 광채를 뽐내는 다섯 개의 보석 팔찌. 어머, 이 언니들 핑클이야?
며칠 후 공교롭게도 나는 내란범의 부인이 종교단체로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고가 보석을 받았다는 기사에서 그와 비슷한 팔찌를 보게 되었다. 다이아가 알알이 박힌 둥근 고리 모양의 팔찌를 '테니스 블레이슬릿'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검색창에 '테니스 블레이슬릿'이라고 치니 내란범의 부인이 받은 몇 천만원짜리 천연다이아 대신 그 모양을 본딴 합성 보석으로 만든 몇 십만원짜리 팔찌들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실험실에서 고온, 고압에 탄소를 노출시켜 제작한 '랩그로운(Lab Grown)' 다이아는 지구의 열과 힘으로 몇 년간 탄소를 응축한 결과물인 천연 다이아 못지 않은 광채와 강도를 자랑한다고 했다.
"운동 계속 다니려면 테니스 팔찌도 공동구매 해야 하나요?"
센터에 다닌지 석달쯤 되었을까. 엉거주춤하게나마 운동 후 티타임에 몇 번 앉았던 터라 서로의 안면이 낯설지만은 않게되었을 즈음, 나는 그간 궁금했던 마음을 농담에 태워 날려보았다. 재잘재잘 수다를 멈추는 법이 없던 핑클 언니들은 잠시 애매한 표정으로 눈빛을 나누었다.
"왜 자기도 관심 있어?"
"네..."
시덥지 않게 던진 농담과 뜨듯미지근한 응답은 곧 운동 후 티타임 초대로, 금요일 저녁 치킨집 회식과 종로 금은방 순례로까지 서슴없이 발전했다. 마치 탄소 원자가 다른 원자와 충돌하고 결합하여 사슬모양 화합물이 되듯이.
그날 나의 들이댐에는 악의가 없었다. 일가붙이 없는 낯선 동네에 이사 온 터였고 은연 중에 동네에서 누군가를 좀 사귀어야겠다는 압박이 차오르던 차였다. 애초에 핑클 팔찌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도 살금살금 내 안에서 몸피를 키워가던 사회성에 관한 부담의 발로일지 모른다. 누구를 좀 사귀어야지, 그래도 동네에서 얼굴보고 인사할 이웃은 있어야지, 그게 사람이지...
들이대는 나를 카페와 호프집과 금은방으로 불러준 핑클 언니들의 마음 또한 선의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사실 그들이야말로 우정 팔찌까지 찬 마당에 굳이 뉴비를 받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알음알음의 문호를 개방한 그들은 동네에서 서로를 알고 지내 나쁠 것 없으리란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실험실의 탄소처럼 무럭무럭 자라 찬란한 보석이 되지 못했다. 나는 핑클의 여섯 번째 보석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나는 결합하기 보다는 충돌했고 사슬로 이어지기 보다는 튕겨나가는 쪽을 택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운동을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단톡 방에서 나오기 버튼을 눌렀던 날, 처음에는 핑클 탓을 했고 후에는 내 탓을 했다. 하지만 되짚어보니 그 파탄에는 잘잘못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