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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쇠네스보헨엔데 Sep 09. 2024

이탈할 용기

"생의 이런 무게감은 너무나도 생소해서 

이것이 나의 생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김민철의 <무정형의 삶>


제주도에서 경기도 최대 학군지로 이사를 하다고 했을 때

나를 알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운동에너지의 역동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40년을 살았고

그래서

삶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며

베껴 쓸 정답지 같은 건 없다는 걸

너무 잘 안다고,

학군지의 치맛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나는 내 삶의 확신범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건

사교육이 교육의 중추가 되어버린

일타강사들이 교육의 질과 방향을 선도하는 

현실을 몰라서 부릴 수 있었던

오만이었다.


어느덧 내 아이는

학교를 마치면 가방을 바꿔 들고

영어와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교과 학원을 마친 아이의 입에 스트링치즈를 넣어주면서

피아노나 미술 학원으로 두 번째 라이딩을 나가는

바쁘고 평범한 이 동네 엄마가 되어버렸다.


저녁상을 물린 후에도 

아이를 책상 앞에 앉혀놓고

오늘의 단어를 외우게 하고

연산드릴 3장을 풀리는 나는

하품하는 아이에게

"네 친구들에 비하면 네가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저속한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환경에 물드는 내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도 않을 때쯤

남편의 출장으로

수라바야에 한 달 살기를 다녀왔다.


체험학습 20일을 몽땅 털어

7월 한 달을 올스톱하고

수라바야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동네 레고학원이나 보내겠다는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낯설어진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익숙한 역동 덕분이었다.


비영어권 중소도시에다가

출장비가 체류비를 상쇄하는 컨디션은

그 한 달을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주었다.

투입이 적으므로 결과에 대한 기대치도 낮았다.

건기 적도국가에서 피서하면서 수영이나 하는 게 

2024년 7월에 세운 내 목표의 전부였고

나는 그것을 초과달성했다.


내 딸은 

10회에 7만 원 하는 동네 레고방에서

유튜브로 영어를 배운 7살짜리 현지 친구와 함께

가라오케로 

"Wheels on the bus round and round"를 부르거나

슈퍼에서 망고 사 오기 등을 하다가 돌아왔다.


그나마 기대를 모았던 수영 레슨에서는

잠수해서 바닥에 떨어진 동전 주워오기에 꽂혀서

영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햇살이 파란 바닥까지 관통하는 야외 수영장에서

까르륵 꺌꺌꺌하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그 호들갑스러운 발차기를 보면서

그 용솟음치는 에너지를

학원과 숙제로

10년 후 입결이라는 무게로 눌러버린 나란 엄마를

많이 반성했다.


하지만 "과연 나의 생인지 의심스럽던" 한 달은 지나갔고

방학도 끝이 났으며

2학기 스케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내년에 3학년이 되면

지금의 창의수학은 문제풀이 중심으로

지금의 영어도서관은 4대 영역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고

지금 아이가 숨 쉴 구멍으로 삼고 있는

치어리딩이나 아트센터 아카데미 같은 

곁가지들은 쳐내야 한다고 했다.


학군지의 중력은 

여행에서 돌아온 나와 아이의 삶에

다시금 무게를 얹는다.

우등생과 모범생이란 틀로 

아이의 삶을 정형화한다.


삶은 무정형이라는 진실을

체득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비슷한 무게로 정형화된 삶의 편의성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좋은 학교를 나와

전문직으로 일하고

세련되고 예의 바른 사람들 사이에서

안락하고 유쾌하게 사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메인스트림의 논리는

쉽사리 무시하기엔

너무 매혹적이다.


그래서

내년에 혹시 모를 또 한 번의 출장에 기대를 걸고

이 삶의 현실을

현실의 무게를 받아들이자,

김민철 작가도 20년을 일한 끝에 파리는 고작 두 달이지 않았느냐,

일탈은 단발일 때 의미가 있다,

일렁이는 내 마음에 시멘트를 바르던 중

두둥!

다시 내 삶의 운동에너지가 용트름을 시작했다.


어디에 살 것인가.


남편의 운명에 낀 역마살을 공유하게 된 이후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고민 앞에서

나는 삶의 무게추를 덜어보기도 하고 놓아보기도 하는 중이다.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여행은 일탈이지만

살던 곳을 떠나는 이사는 이탈이다.


초등학생과 학군지 이탈은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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