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의 몰입감이 2권에서 증발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도서관에서 무려 석 달여를 기다려 <파친코 1>을 받아 든 날은 12월 하고도 24일이었다. '예약도서가 도착하였다.'는 문자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산타클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몹시도 차가웠던 아침 공기를 뚫고 도서관을 달려가 책을 품에 안고 와 거실에 앉은 그 순간부터 나의 크리스마스는 끝이 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양진이 절름발이 총각에게 시집을 가는 에피소드에서부터 이야기로 훅 빨려 들어가 버렸으니 현실의 떠들썩함이 이물스럽게만 느껴졌다.
마음은 선자가 빨래를 하는 영도 바닷가에 보내놓은 채 들뜬 아이를 챙기고 이런저런 약속과 행사를 처리했다. 그러다 일과가 끝이 나면 졸린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와 어느덧 장성해 시장통을 누비는 선자 뒤를 쫓았다. 이튿날 컨디션이 걱정돼 책장을 덮으려다가도 고한수가 끈적하게 선자를 바라보기 시작하니 도무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사정없이 나올 예정입니다. 원치 않으시면 창을 닫아주세요.)
그렇게 이틀 만에 1권을 다 읽고 나니 애가 탔다. 1권을 빌린 후에야 2권을 예약한 나의 단견을 원망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책을 받아보고자 1권은 개정판으로 봤지만 2권을 구판으로 빌렸다.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 2권을 펼치고 보니 1권과 2권을 갈라놓은 지점이 서로 달랐다. 개정판 1권은 일본이 패망하고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된 선자 앞에 고한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반면 구판은 고한수의 등장이 2판 첫 챕터에 나온다. 그러니 내가 만약 1권을 구판으로 읽었다면 그토록 애타게 2권을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장편이 여러 권으로 나눠졌을 경우 1권보다는 2권이, 2권보다는 3권이 덜 팔리기 마련인데 개정판은 1권을 본 사람이 2권을 안 볼 수 없도록 나눠났다는 점에서 편집자의 센스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목이 빠져라 기다려 2권을 받은 나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껴안고 아무도 없는 방으로 한 걸음에 달려간 카뮈의 심정으로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하지만 막상 초반 몇 챕터 이후부턴 급격하게 이야기가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빨아들이던 1권의 흡입력은 어디로 갔을까. 등장인물은 늘어났는데 마음 주고 좇아갈 인물이 나타나지 않아 허탈하게 페이지만 넘겼다.
1권의 이야기가 선자와 요셉, 고한수를 중심으로 쫀쫀하게 뭉쳐져 있었다면 2권은 늘어난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쫓아다니며 설명하느라 중구난방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이야기가 좀 늘어진다 싶으면 긴장감을 주려고 했는지 자극적인 성적 묘사가 등장했는데 그마저도 뒤로 갈수록 재탕이라 호기심이나 쾌감을 주긴커녕, 독자를 얕보고 얄팍한 수를 쓰는 것 같아 불쾌했다.
전쟁 와중에 배곯고 힘들었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익숙한 고생담을 답습하는데도 1권이 그토록 매혹적이었던 이유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곰곰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인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양진의 에피소드부터 그렇다. 집이 너무 가난해 절름발이 노총각에게 팔리듯 시집온 양진이 구박을 받고 고생만 했더라면 뻔한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절름발이 훈이는 예상치 못하게 자상하고 생활력도 있다. 연거푸 자식을 잃고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 선자를 부부는 사랑으로 키워낸다.
선자의 생애 또한 클리셰를 뒤집는다.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현지처가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남자를 떠나보낸다. 그러나 이제 박복해질 팔자밖에 남지 않았으리란 독자의 속단을 비웃듯 이삭이란 구원자가 나타나고 그 고결한 사랑을 베푼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망해가는 조국을 뒤로하고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난 주인공들은 처절이 일상이었고 위기가 환경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 개떡 같은 상황에서도 꽃처럼 고결한 인간들의 얼굴을 그려낸다. 꿋꿋한 선자, 숭고한 이삭, 다정한 경희, 묵묵한 요셉, 총명한 노아와 씩씩한 모자수까지. 궁핍할지언정 불행하지는 않다. 심지어 1편의 최대 빌런인 고한수마저 순진한 처녀를 농락한 악한만은 아니다. 일본인 야쿠자의 사위로 폭력과 환락에 찌들어 사는 그이지만 선자를 향한 마음만은 순정이었으니.
전반부에 해당하는 1세대의 장구한 이야기를 이처럼 매력적인 플롯으로 그려낸 작가는 2세대의 이야기인 후반부를 끌어갈 얼개를 고민했을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얼굴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새로운 방식은 독자를 강하게 끌어당기던 이야기의 악력을 해제시켜 버렸다.
1권의 드라마는 들풀 같은 인물들이 역사의 풍랑을 온몸으로 맞아내느라 꺾어지고 찢어지는 현장에서 발생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첫 문장이 인물 하나하나의 삶을 통해 고스란히 재현된 것이다.
하지만 2권의 중심인물인 노아와 모자수를 들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 삶에도 격동이 있지만 그들의 삶을 흔든 것을 과연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노아와 모자수, 그 외 여러 인물에게 닥친 시련은 독자가 마음을 포갤 여지를 주지 않고 우발적으로 벌어지고 번번이 고한수의 도움으로 해소된다. 그러니 2권을 관통하는 서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고한수가 우리를 구해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가 아닐지.
더불어 2편에선 자이니치와 일본인의 삶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인이 죄다 퇴행적인 존재로 그려져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파친코 사장인 고로, 모자수의 여자친구와 그 딸 하나, 고한수의 딸과 아내, 모자수의 친구인 하루키, 솔로몬의 직장상사 가즈아 등 주인공 주변의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돈만 많지 공허한 인물들이다. 특히 젊은 여성은 걸핏하면 유흥가를 전전하다가 터키탕에서 비참한 여생을 맞는다. 자이니치들은 파친코 판에서도 견실한 사업가로 성공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처럼 작위적인 설정이 거듭되자 역사 속 실재하던 인물로 생생하던 느껴졌던 주인공들이 2권 막바지엔 전래동화 속 주인공처럼 희미하게 그려졌다. 1권을 읽을 땐 선자와 마주 보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면 2권은 시끄러운 카페에 앉아 사방에서 와글대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달까.
긴 이야기에서 텐션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친코>는 훌륭한 독서 경험이었다. 이야기에 멱살 잡힌 채 끌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한동안은 그 쾌감을 반복하고 싶은 갈망에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후속 타자를 찾아다니는 것 같다. 좀처럼 책에 마음 주기 힘든 시절에 다시금 불씨를 지펴준 것만으로도 나는 <파친코>에게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