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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쇠네스보헨엔데 Mar 02. 2021

자율성의 시간 지키기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우리에겐 '나를 키우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삶 전체가 원하지 않는 시간들,

아무 재미도 없는 무의미하고 무료하고 피로한 시간들,

비극이자 코미디인 시간들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삶은 내가 원한 삶이었다고 말하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첫 번째 질문,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중


2월은 손에 쥔 모래 같았다.

분명 한 움큼이었는데 어느새 술술 흘러버렸다.


7년 만에 이사를 했고 그 정리를 돕기 위해 양가 어머니들이 한차례씩 다녀가셨다.

그 사이사이 눈이 와서, 기침을 해서, 졸업을 해서 아이는 등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면서

금요일에 오리엔테이션 겸 입학식을 약식으로 진행하고

첫날부터 정상 수업해준 유치원 측에 무한히 감사했다.  


입학식이다 뭐다 해서 오늘마저 얼렁뚱땅 흘러갔다면,

이미 인내심이 바닥나 거칠어진 내 정서는

아이를 향해 가시를 돋우었을 것이다.


분명 몸이 힘든 건 아니었다.


친정이고 시집이고 어머니들은 아직 내게 무언가를 얻어 잡수실 생각을 하실 연세는 아니다.

당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 더 맛깔나고 정결하다는 것을 잘 아시고

무엇보다 이런 기회에라도 자식들 거두어 먹이는 걸 기쁘게 여기신다.


이사한 집은 손님이 지내실만한 공간과

우리 세 식구가 씻고 자는 공간이 층으로 분리돼 있어서

새벽잠이 없으신 어머니들의 부스럭거림에 깰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피곤했다.


특히 시어머니가 가고 난 뒤엔 누가 나를 꼭꼭 쥐어짠 것 같았다.

맛있는 알맹이는 쪽 빠지고 푸석푸석한 찌꺼기만 남은 것 같았다.


그렇게 허무하고 피로한 채로 주말이 흘렀고 더는 이 상태를 견딜 수 없어

아수라장인 집을 나 몰라라 한 채 일단 책상 앞에 앉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2월에 읽고 쓰는 모임을 새로 꾸리게 되어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꺼내 읽었고

읽는 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이 탈진이

'아무 재미도 없는 무의미하고 무료하고 피로한 시간들'을 보낸 탓임을 깨달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문제의 이유를 알면 해결이 수월하니까.


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모와 생활이 분리되었다. 

그렇게 때론 홀로, 때론 오빠와, 그리고 결혼하여 남편과 살면서

부모와는 별개의 생활패턴을 만들어나간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문제는 그러다 가끔 부모와 공간이 겹쳐질 때,

이를테면 내가 부모님 댁을 방문한다거나 부모님이 내 집을 방문할 때

그 20년의 세월이 무색해진다는 데 있었다.


예컨대, 나는 교통방송 앱을 켜고 블루투스 오디오를 연결해

뉴스공장을 들으며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헌데 어머니들이 계실 때는 거의 보름간이나 공장장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먼저 친정어머니는 라디오란 모름지기

찬송가나 설교가 흘러나오는 극동방송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내가 극동방송을 듣지 않는 것은

내가 라디오를 듣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는 어머니가

우리 집에 최첨단 라디오 방송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뉴스공장이 끝난 이후 족히 열 시간은

온 집안에 찬송과 설교가 울려 퍼지게 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엔 그런 시스템이 없는 척하는 편을 택했다.


맞서는 것이 두려워 지레 피하고 본다.   

피하는 것이 습이 되다 못해 태도가 되고 만 것은

친정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내가 해결 못한 고질적 문제다.


시어머니 앞에선 정치성향이 걸렸다.


시부모님들은 지독히 극우적인 정치 경제관을 갖고 있다.

그분들이 읽는 신문과 보는 방송에서 공장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기에

시어머니가 계신 동안에는 아침에 음악이 나오는 방송을 틀었다.


원부모와의 관계에서 내면화된 도피 성향은

시부모와의 관계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일방적 침해가 아니라

관성에 굴복한 내가 먼저 물러난 것에 가까우니

굳이 탓할 사람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무관심하다 보면

사회나 타인이 나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저 자신은 희생자이자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동정에 숨거나 억울함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나를 키우는 시간'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 자기 자신에 어느 정도는 무관심한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렇게 내게 스며든 수수함, 무난함, 무던함은

내 어머니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닌 시어머니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주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읽고 모인 자리에서

내가 이 단락에 밑줄을 긋고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하자

한 분이 나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좀 걷어내고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해주었다.


내가 태어나고 첫돌 무렵 합가를 하면서 시작된 엄마의 시집살이는

구순을 채운 할머니가 돌아가신 2019년에야 종료되었다.

그래서 나는 덮어놓고 엄마에겐 자율성의 시간이

아예 없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 곰곰이 돌이켜보니

엄마가 '나를 키우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해둔 경로가 보였다.

바로 교회였다.


'주를 위한 일', '이웃을 위한 봉사'는

자기 시간이 없던 엄마에게

좋은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외출할 유일할 기회이자 당위를 제공했다.


엄마는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 오전, 오후 예배는 물론

권찰회, 여전도회, 중보기도회 등

교회에서 열리는 모임마다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시어머니도 엄마만큼 길게는 아니었지만 시집살이를 하셨다.

교회를 다니지않는 시어머니는 대신 학부모 모임에 투신하셨다.

큰애 보이스카웃, 작은애 걸스카웃, 무슨무슨 어머니회 등,

정작 아이들은 졸업을 하고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엄마들의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여지껏 매일이다시피 교회를 가는 엄마가,

신년 달력을 받으면 친목회 날짜부터 챙기는 시어머니가

유별나다고 생각하기만 했지

그 이유를 되짚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들을 나와의 관계에서 떼어내어

한 존재로 관망하자

교회를 가는 엄마와 계모임을 가는 시어머니의 실루엣에

집합 금지명령이 내려지자 줌으로라도 모임을 하는 내 모습이,

원고 한 편에 최대 5만 원이라는 웹진에 며칠 밤을 갈아 넣은 내 등짝이,

이사하고 첫 손님으로 글쓰기 동무들을 받은 내 열심이 겹쳐졌다.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것이나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나 모두

당장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에 마음을 열어보다가

자기를 만나는 경험입니다.     

 



책은 읽는 동안 뭔가 덧붙이게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겪은 일과 새로 읽은 것을 연결하게 합니다.

책은 책과 아직 책으로 쓰인 적이 없는 것들(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포함해서)을 연결하게 합니다.

여섯 번째 질문,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중     

 

이것이 이 책에서 읽은 것과 내가 겪은 것을 연결한 경험이다.  

책을 읽는 동안 무한히 반복되었을 현상이지만

의식하고 기록하자니 새삼스럽다.


익숙한 것을 새삼스레 표현하는 것은

또한 쓰기의 쓸모가 아닐는지.


그래서 우리 모임의 다음 책은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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