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아이는 한국을 떠나며 그렇게 구슬프게 울었다.
차고에 차를 대 놓고 우두커니 한 동안 앉아 있었다. 차고에 켜져있던 오렌지색 백열등이 이내 꺼졌다. 어둠 속에서도 계기판을 응시하며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려서 저 문만 열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시차적응 중이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약간 아파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든 가고 싶었다. 다시 차고문을 열고 집 근처 H.E.B(텍사스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로 향했다. 차를 몰면서도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심란해서 간다는 곳이 고작 5분거리 H.E.B라니. 갈만한 곳이 슈퍼마켓 밖에 떠오르지 않는 현실이 좀 서글펐다. 멀리 가 봤자, 잔디밭과 공원정도가 다 였고 아니면 아무도 만날 이 없는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사 먹는 것 정도가 대안이었다. 나는 이 나라에 7년을 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래 이왕 마트에 간 김에, 꽃을 사자. 꽃을 사서 식탁 위의 꽃병에 꽂아두면 기분이 좀 나아질거야. '미국 학교에 가기 싫다'며 우는 유치원 나이의 아이에게 화를 내 가며 억지로 등교를 시키고 난 후였다.
"엄마, 나 12월까지 한국에 있으면 안돼?"
미국으로의 출국을 2주 정도 앞둔 날부터, 아이는 틈만 나면 '12월까지 한국에 있고 싶다'고 졸랐다. 안돼. 아빠도, 우리집 멍멍이도 미국에 있잖아. 그리고 너는 미국사람이잖아. 우리는 미국에 갈꺼야. 라고 무심히 답하며 짐을 열심히 꾸렸다. 코로나가 극성일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국은 매년 방문하고 있었다. 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부지런히 한국에 오가던 내 아이는, 이제 한국나이로 7살, 미국나이로 6살이 되어있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미국이지만, 집에서 엄마 아빠가 한국어만을 사용하고 철저히 한국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이는 한국을 편안해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한국은 놀러오는 곳이었고, 자기의 집은 미국이며 자기는 항상 꼭 미국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본인 자신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달랐다. 아이는 '미국이 싫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출국 당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이는 펑펑 울었다. 엄마 나 미국 가기 싫어, 한국에 있고 싶어. 나 한국에 살고싶어. 아이는 "한국에 살고싶다"고 몇 번을 말했다.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아이가 미국에서 좋아했던 것들을 읊어주었다. "우리, 같이 공원에 김밥 싸서 소풍가자. 그리고 ㅇㅇ이는 킥보드도 타고. 아 맞다. 우리 이번에 자전거 사기로 했잖아. 자전거도 연습하자. 그리고 근처 기차역에 가서 다운타운까지 기차도 타고 그러면 되겠다. 강가에서 카약을 탈까?" 아이는 싫어, 싫어 하면서 엉엉 울었다. 어찌나 울었는지, 나중에는 호흡이 가빠져서 숨쉬기가 힘들고 어지럽다고 할 정도였다. 우는 아이를 겨우 겨우 달래서 차에 태우고는 그렇게 우리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아이의 미국 생활은 꽤 순탄한 편이었다. 나의 임신과정도 평탄했으며, 아이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유난히 잠을 잘 자고 순하고 잘 먹었던 내 아이는 키도 몸무게도 상위권으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혼과 동시에 지원했던 영주권도, 대통령이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바뀌면서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아이가 돌이 되었을 무렵 별 문제없이 남편과 나 둘다 그린카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하.. 이거, 이 카드 하나 받으려고 내가 여태까지..." 남편은 카드를 손에들고는 반쯤은 허탈하고 반쯤은 감격한 말투로 말했다. 3살 때 미국에 처음와서, 한국과 왔다갔다 살며 대학과 대학원 졸업도, 취업도 미국에서 했다. 시민권자가 아니라 미국 생활을 위해서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비자가 있어야했기 때문에 때문에 조금은 불안해하던 남편이었다. 신분이 학생비자에서 취업비자소유자로 그리고 영주권자로 바뀌었으니 이제는 안정적으로 미국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결혼을 통해 큰 노력없이 영주권을 받은 나와는 달리 남편은 거의 30년 넘게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은근한 마음 고생을 했으니, 그린 카드는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취업 비자의 최대 기간은 6년이었고 이미 반 넘게 시간이 흐른 상태이기도 했다. 영주권이 리젝되면 골치가 아파지는 상황이었다. 영주권을 받았으니 이제 신분 때문에 불안해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는 텍사스의 오스틴 근교에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이제 이 집에서 아이가 크는 걸 바라보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아이도 미국공립유치원 (Kindergarten. 한국의 유치원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공립초등학교의 시작처럼 인식이 된다. 많은 주에서 킨더 과정부터 무상교육을 제공하고 있다)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어가 아직 서툴어 고생을 하긴 했지만, 담임선생님도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셨고 아이도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다음 날 수업이 기대된다 말하고는 했다. 나는 그렇게 아이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잘 자라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영어는 단 한마디도 말하려하지 않고, 스케치북에 태극기를 그리고 놀고, 대한민국이라고 써 놓고, 책상 위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비행기 장난감마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이라고 써 놓으며 놀긴 했지만, 그냥 그건 부모 둘다 한국인이고 이 아이도 한국인이기도 하니까 그렇겠지, 싶었다. 한국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자연에서의 삶을 누리게 해 주었고, 계절마다 제철과일과 채소들을 직접 따러 다녔다. 주말이면 함께 크고 작은 도시와 국립공원들로 여행을 갔다. 사진 속의 내 아이는 진심으로 즐거워보였다.
그런데, 아이가 미국에 가기 싫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울음을 겨우겨우 참아내려 노력하느라 얼굴이 찌푸려지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서글픈 우우우 소리가 입술사이로 새어나왔다. 잠시 심란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이랑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저러겠지 싶었는데 아이는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생각만 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입국심사장에서도 너무 울어서, 입국심사관이 '무슨 일이냐'라고 물어 볼 정도였다. 길게 설명하기가 난감해서 " 한국에 있는 할머니가 보고싶대요." 라고 얼버무렸더니 입국심사관은 측은한 얼굴로 Be a strong boy. 라고 아이를 격려해주었다. 환승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아이는 구슬프게 울었고, 집에 도착해서도 내내 오열하다가, 울다가 잠들었다. 미국이 싫어, 미국 학교 싫어.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난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한국에 빨리 가고 싶어.
시차적응이 어느정도 되었을 때 아이를 다시 킨더로 보냈다. 아이는 또 아침에 킨더에 가기 싫다, 재미없다, 한국에 있는 유치원에 갈거다 라고 떼를 쓰면서 울었다.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 않아, 결국에는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었다. 아이는 훌쩍이며 풀 죽은 모습으로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한국에 가기 전까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 투덜 거릴 지언정, 학교 자체는 굉장히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한국가고 싶다고 울면서 킨더에 안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착잡했다.
"너 한국에 너무 자주 오는 것 같아. 당분간 한국에 오지마, 아이도 미국에 적응해야지. 아무리 한국이 좋다고 해도 얘는 미국에 살아야 하잖아" 몇 주전 만났던 친구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래, 몇 년 미국에 주욱 지내면 해결될 문제일까?
" 초등학교 4학년. 그때 이후로 어디에 사는 지가, 아이가 평생 어디에서 살 지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출국 며칠 전 만났던 후배의 말이 또 떠올랐다. 후배 자신도 두 나라를 오가며 살아왔고, 결국은 한국에 자리를 잡은 터였다.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 어디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