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진짜 영재라고요?
부모라면 보통 한 번씩 해보게 되는 생각이 있다.
"어머, 얘 영재 아니야?"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울 때, 한두 번 들은 노래를 흥얼거릴 때, 가르치지도 않은 글자를 읽을 때...
대치동에 사는 부모라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에는 아이의 잠재된 영재성을 개발해준다는 영유아 대상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아예 '영재교육원' 등의 이름을 달고 영재성 테스트 후 그에 맞게 수업을 한다는 사교육 기관도 있다.
영어 유치원 중에는 영재성 테스트를 통과해야 입학(영어) 테스트를 볼 자격이 주어지는 곳도 있다.
대치동 아이들을 5-7세 사이에 영유에 입학하고 (놀이식 혹은 사고력) 수학 학원에 발을 들이게 된다.
고백하자면 우리 아이, 영재가 어릴 때 나도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영재는 돌이 좀 지나 문장을 말했고,
세 돌 무렵 시계를 보고 한글 간판을 읽었으며,
네 돌엔 파닉스 책을 보고 영어책을 읽더니,
네 돌 즈음 세 자리 덧셈을 했다.
이 모든 건 누가 가르친 적 없이 오롯이 영재가 호기심으로 스스로 익힌 결과였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이를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학창 시절부터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의 미덕을 배우지 않았던가?
게다가 영유아기에는 발달 영역 간의 속도차가 있을 수 있는데 큰 의미가 없다고 책에서 읽기도 했다.
그래서 베이비시터나 할머니, 친구 엄마가 영재가 남다르다고 얘기를 해도
정작 엄마인 나는 '우리 아이 영재설'을 경계하고 쿨하게 응수했다.
"원래 우리 애는 다 영재 아닌가요? 그저 이쪽 발달이 빠를 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쪽'이 조금 많긴 했다^^;;;;)
한 번은 만 5세 영재가 받아올림이 있는 계산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봐 알려줬더니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며 혼자 받아올림이 있는 덧셈 문제를 만들어 푸는 것이었다.
내심 깜짝 놀랐지만 난 애써 침착하게 "잘했다." 한 마디만 해주었다.
난 '우리 아이 영재설' 따위는 믿지 않는 겸손하고 쿨한 엄마였으니까...
그래서 난 영재를 그 흔한 영어 유치원(영유)에조차 보내지 않았다.
예민한 아이이기에 매시간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놀이학교조차 불안감을 키울 수 있다며 거의 종일 자유놀이를 하는 어린이집에 보냈고, 최대한 자유놀이를 많이 하는 일반 유치원(일유)에 보냈다.
영재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방과 후 영어반이 있었는데 처음 영어 수업을 들어본 영재가 내게 말했다.
"엄마, 나도 영어학원 보내줘. 우리 반에서 영어 제일 잘하는 xx이는 유치원 끝나고 영어학원 다닌대."
(대치동 애들 대부분은 영유에 다니고 일유에도 방과 후 영어반이 있고 아예 방과 후에 따로 영어학원을 다니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 아이 영재설을 경계하며 적기 교육이 중요하다 믿었던 엄마의 선택으로,
영재는 영어, 수학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마 다른 지역이었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영재가 사는 대치동이 어떤 곳인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영유를 졸업하고 7세 말부터 빅3니 빅5니 하는 영어학원 입학 테스트를 많게는 대여섯 번씩 보고 다니는 학원이 계급이 되는 곳이 아니던가?
초등 입학했으니 영어를 시켜보겠다고(적기 교육!) 학원을 알아봤더니 미국교과서(미교) 2~3학년 진도를 예습식으로 나가는 곳이 대부분이라 그나마 덜 부담스러워 보이는 1학년 교과서를 천천히 복습식으로 나가는 학원을 골랐다.
그런데 그런 학원은 대치동 엄마들의 요구에 맞지 않으니 학생수가 많지 않아 여러 학년이 섞이거나 반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다.
영재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정작 학교에서는 공부를 거의 안 시키니 뭘 잘할 기회조차 별로 없는데)
영어 학원 이름에서 애들에게 알게 모르게 무시를 당하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듯했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결국 영재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심리상담센터에 다녔는데,
거기서 해본 종합심리검사에서 아래와 같은 소견을 들었다.
"지능검사 상 98.8%의 발달을 보이는 영재입니다. 선행학습시키고 영재교육시켜야 하는 아이예요."
네??우리 아이 영재설은 대다수 엄마들의 호들갑 아니었어요?
대다수의 아이들에게는 적기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요.
아, 우리 영재는 대다수의 아이가 아니라 상위 1퍼센트 영재였다고요?
지금까지 제가 공부한 육아서들은 영재를 키우는 데 참고하면 안 되는 책이었나요?
그럼 전 이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지요?
밤새워 1단원 시험공부를 했는데 막상 2단원에서 출제된 시험지를 받은 듯 막막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