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야베 코보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사방이 모래로 둘러싸인 사구에 위치한 마을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곤충채집을 하다 이곳에 이른 그 남자는 이곳에 갇히게 되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는 도시생활에서 일탈을 꿈꿨다. 그에게 모래는 현실의 답답함보다 신선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모래 속에 갇혔다.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매몰되는 삶 속에 처참히 갇혀버렸다.
그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끝없이 탈출을 감행한다.
「걸어 다니면 되잖아!」
「걸어 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버려!」
「걸어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 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남자는 허를 찔리고 말았다. 참으로 묘한 논리도 다 있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그도 받아칠 자신이 없다.
그렇다•·•··.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들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87p
자유(自由)는 외부의 구속이나 얽매임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소극적 자유(외부 간섭이 없는 상태)와 적극적 자유(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능력)로 나뉜다.
남자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외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를 갈망한다. 그는 그 자유의 실행으로 곤충채집을 선택한다. 이와는 다르게 모래의 여자는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원한다.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안전한 곳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원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품었던 남자는 모래의 여자를 통해 벗어나지 않아도 되는 또 다른 의미의 자유를 생각하게 만든다.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woo woo—
(이건 슬픈 편도표 블루스야·••..•)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불러. 실제로 편도표를 손에 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편도표밖에 갖고 있지 않은 인종들의 신발 뒷굽은 자갈만 밟아도 금이 갈 만큼 닳아빠져 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그들이 노래하고 싶은 것 은 왕복표 블루스다. 편도표란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활을 뜻한다. 그렇게 상처투성이 편도표를 손에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그렇기에 돌아오는 표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지 않도록, 죽어라 주식을 사고 생명보험에 들고 노동조합과 상사들에게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목욕탕의 하수구나 변기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절망에 차 도움을 구하는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을 듣지 않기 위해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고 열심히 편도표 블루스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156p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활’에 지친 모래의 여자의 절규가 선명해졌다.
안전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편도표만을 쥐고 있는 이들은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꿈꾼다. 그들은 외부의 간섭이 없는 상태나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겼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들 속에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안식처를 파괴당하고 내일을 꿈꿀 수 없는 오늘에 걷고 또 걷는다. 그들의 뒷굽은 금이 갈 만큼 닳아빠져 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상처투성이 편도표를 손에 쥐고 있다. 그들에게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모래의 집이라도 두 다리를 뻗을 수 있고 걷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자유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지구 반대편에서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매일 모래를 퍼내야 하는 삶에서 외부의 간섭이 없는 삶을 갈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 안주한다는 표현을 쓴다. 편도티켓만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에게는 사치와 같은 표현이다.
미래를 위해 생명보험을 들고 주식을 사는 우리는 자유를 노래하고,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왕복표를 손에 쥐고 있다. 여행이 의미 있는 것은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왕복표를 손에 쥐고 우리는 그 표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경쟁의 링 위에 올려놓는다.
그 바늘의 춤에는 지구의 중심을 느끼게 할 만큼 무게가 있었다. 반복은 현재를 채색하고, 그 감촉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남자도 질세라 단조로운 수작업에 열을 올렸다. 지붕에 쌓인 모래를 긁어내는 일이며 쌀을 체질하는 일, 빨래 등은 이미 남자의 주된 일과가 되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면 중에 덮는 소형 비닐 천막을 고안하는 일이며 불에 달군 모래 속에다 생선을 묻어 쪄 먹는 착안도 흘러가는 시간을 제법 보람 있게 해 주었다. 202
모래로부터 탈출을 실패한 남자는 모래에서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남자가 모래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다 어느 순간 순응하고 적응해 가는 모습이 비참하다 생각했다. 시시포스처럼 반복되는 과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나는 비극이라 읽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이 비극의 반복이라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어둠이 밀려왔다.
'어딘가 더 나은 곳이 있지 않을까?
나의 이러한 생각이 도피임을 인정하자 시시포스의 형벌이 누구의 입장에서 형벌이라 정의되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시시포스 자신도 스스로의 삶을 형벌이라 불렀을까? 어쩌면 그는 그 삶을 겸허히 수용하고 그것이 삶이라 정의하지 않았을까?
더 나은 곳을 찾으며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우리는 반대로 누군가가 꿈꾸는 일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래의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모래에 갇힌 남자는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 것을 아닐까?
모래의 여자의 삶이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삶이었다면 내가 바라본 비극은 그녀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한 것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한이 없다.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을 때 남자가 더 이상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막을 고안하고, 유수장치를 만든다. 그는 갇혀있던 삶을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자유로 전환한다. 그 스스로 의미를 정의한 것이다.
모래의 여자와 그의 삶에 대해 비극이라 읽은 나의 오만함을 들켜버렸다.
나의 오만함이 얼마나 많은 삶을 오해하고 내 삶에 수많은 생채기를 내어왔을까?
더 나은 곳을 꿈꿔왔던 과거의 시간을 마주하였다. 과거라는 거울이 도망칠 궁리만 하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227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야 하는 내 삶에도 분명 나만의 유수장치가 있다.
세상이 사망선고를 내린다 하여도, 내 세상에 스스로 사망선고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 삶은 지속된다.
세상의 편견에 매몰되는 것보다 내 세상을 지켜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남자는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라고 말한다.
나도 모르게 해방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