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어떤 오늘,우린 죽는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by rallalawoman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걸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클레이 하우스> 15p.


내게 닥친 불행을 마주했을 때, 나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신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질문했었다. 그 질문을 붙들고 불행의 터널 끝을 향해 달려갔다. 저 끝에 분명 이 불행의 끝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다. 불행이라 불리는 이 상황은 신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시는 과정이라 믿고 싶었다.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소설은 페루 리마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진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프란치스코회 주니퍼 수사는 참사의 피해자들을 추적하며 ‘왜 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그들의 죽기 전 삶을 들여다보는 소설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딸에게 집착하는 몬테마요르 후작부인, 쌍둥이 형제 마누엘을 잃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에스테반, 리마라는 도시의 유명한 여배우 카밀라를 키워 낸 피오아저씨와 그녀의 아들 하이메.

이 다섯 사람은 그날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다리를 건너기 직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과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딸에 대한 집착을 인정하고 더는 딸에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겠다 결심한 몬테마요르 후작부인, 형제를 잃은 상실감을 이겨내고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결심한 에스테반, 실패한 사랑을 대신해 새로운 사랑을 희망한 피오아저씨 그리고 그 새로운 사랑인 하이메.




‘신은 왜?‘라는 질문은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한다. 왜 하필 그때 죽였을까?
그런데 우연이건 의도건, 중요한 건 인간이 죽음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적절함과 정당함을 따지는 건 과학적으로도 무의미하고 신학적으로 불경한 것이다.(그러니 주니퍼 수사는 이중으로 틀렸다.)
이때 질문을 '인간 은 왜?'로 바꾼다는 건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은) 왜 살려고 결심한 직 후에 죽였을까?'가 아니라 '(인간은) 왜 죽기 직전에야 살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를 묻는 일이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p213 해제 신형철>


나는 그들이 '왜 죽기 직전에야 살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내 삶에 끝에 두고 상상해 본다.

죽기 직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하며 후회할 그 질문을 말이다.

죽음이 내 앞에 닥쳐와 있을 때 그때 가장 후회하게 될 것이 무엇일까?


변화하고 싶다고 갈망하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면서 한 발자국도 방향을 틀지 못했음을 후회할 것 같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살아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것들에 대해 나는 변화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부터 변화하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 죽음의 순간에 ‘왜 이제야 살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 한탄하며 가슴을 치며 스스로를 원망할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
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착하고 똑같이 재능 있고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상에 없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p86 에스테반 중에서>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이 진리 앞에서, 기꺼이 사랑 앞에 더 약자의 자리를 선택할 것이다. 에스테반이 발견한 이 비밀은 내게 사랑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사랑의 무게와 크기를 저울질하며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보단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고 그 사랑의 무게 중심을 고심하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한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만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시간이 무한대가 아님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나는 진리 앞에서 내 사랑의 무게를 재며 비교할 시간이 없다. 내 사랑이 얼마나 커질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일은 오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사랑 앞에서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존재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이 것만으로도 나는 우선, 이 비밀을 아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사랑을 해 본 사람과 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독한 오만이었다.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더 정확하게는 사랑의 고통을 느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사후에도 다시 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무의미한 웃음과 눈물과 잡답으로 채우다가 여전히 사랑스럽지만 허망한 모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종의 허수아비였다. 이런 구분을 위해, 그는 사랑에 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그것은 다른 어떤 정의와도 달랐고, 그의 특이한 삶에 내재된 모든 신랄함과 자부심이 집약된 것이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p159 피오아저씨 중에서>



진정한 삶은 사랑을 해 본 사람에게 있고, 사랑의 고통을 느끼는 자에게만 있다는 오만함이 내게도 있었다. 나는 피오 아저씨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을 내어주는 이에게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정의를 내렸다. 나는 피오 아저씨 그 자체였다.

내가 주는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하는 오만함이 내가 사랑 앞에 약자가 되겠노라 선언하게 된 이유였다.

죽음을 맞이한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죽기 전 삶을 바꾸기로 결심하였지만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을 주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기에 남겨진 이들보다 더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족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나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면 유족들 덕분이다.
유족들은 슬픈 마음의 일부분을 해방시키고 그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이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매한 행위로써의 사랑을 발명했다.
이것이 많은 유족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는 한 문장 안에 담긴 말 없는 말들이다. 나는 사랑은 창조 행위라는 말을 그들을 보면서 이해한다.
단, 유족의 말이 나를 숙연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유가족이 더는 없는 세상을 꿈꿔야만 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유한한 삶 속에 무한한 것은 오직 슬픔뿐인 것만 같은,
혼자서 겪어내고 혼자서 감당해야 할 괴로움이 너무 많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의 발명, 정혜윤, 녹스>


남겨진 이들로 인해 사랑이 발명되었다. 떠나간 이들이 살았어야 할 삶을 위해, 남겨진 이들은 기꺼이 사랑을 발명하였다. 떠나간 이들의 자리에 남은 자들은 ‘사랑의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가 굵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까지 긴 시간을 그 사랑을 돌보고 키운다. 그것이 유족들이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결국 사랑은 ' 주는 이'와 ' 받는 이'가 따로 있지 않음을 알았다. 떠난 이와 남겨진 이들은 고통이라는 시간에 사랑이라는 다리를 놓는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의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p 207 어쩌면 신의 의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일이다. 그것에는 '신의 어떠한 의도'는 없다.

만일, 우연히 죽는 일에 '신의 뜻'이 있다면 착한 이들의 죽음의 답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악인이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대해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신은 그저 지켜만 볼 수 있을 뿐 우리의 삶에 미약한 입김조차 미칠 수 없다. 인간이 말하는 불행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내린 정의일 뿐 애초에 그 일에 어떠한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내가 우연히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연히 죽는다.


수많은 우연 속에서 나는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죽기 직전에 사랑을 고백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순간, 용기 내어 사랑한다고 말하겠다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인간의 사랑은 왜 이런 식인가. 핵심은 용기다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122p) 아니, 그때만큼 더 용기가 필요한 때가 없다.
자신의 감정에 진실해질 그래서 타인에게 정확해질 용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이거나, 반대로 사랑한다는 말로 도망치지 않을 용기.
이런 용기는 적금처럼 만기가 돌아오면 찾아 쓰는 게 아니다.
오늘 당장 용기를 내지 않으면,
내일은 꼭 질실해지자고 다짐하는 평범한 어떤 오늘, 우린 죽는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p. 216 신형철 평론가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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