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라자크 구르나 소설 '낙원'을 읽고
정원은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어, 집의 전면 테라스에 가까운 넓은 출입구에서 떨어져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확연한 정원의 침묵과 서늘함은,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유수프를 매혹시켰다. 아저씨가 없을 때 그는 벽 너머에 발을 들여놓았고 정원이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앙에는 웅덩이가 있었고 네 방향으로 수로가 있었다. 사면에 나무들과 관목들이 심겨 있었고, 그중 일부는 라벤더, 헤나, 로즈메리, 알로에 꽃이 피어 있었다. 관목 덤불 사이 공터에는 클로버와 잔디가 있었고, 백합과 붓꽃이 이리저리 피어 있었다. 웅덩이 너머, 정원의 위쪽 끝으로는 지형이 높아지면서 양귀비꽃, 노란 장미, 재스민이 심긴 테라스로 이어졌다. 꽃들은 자생한 것처럼 흩어져 피어 있었다. 유수프는 밤에 향기가 허공으로 솟아올라 그를 어지럽게 만드는 꿈을 꾸었다. 그러한 황홀감에 젖어 있는 그의 귀에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았다. 63P
라벤더 재스민의 향기가 가득하고 백합과 붓꽃, 노란 장미, 붉은 양귀비꽃이 가득한 정원이 있다면, 그곳이 낙원처럼 느껴질 것이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에서 묘사하는 아지즈라는 상인의 정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유수프라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소년이다. 소년의 이름은 왜 유수프였을까? 그리고 그는 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소년으로 묘사가 되었을까?
유수프는 성경과 쿠란에 등장하는 요셉의 아랍식 이름 즉 요세프이다. 아랍에서 십 년을 산 내게는 영희, 철수처럼 아주 많이 들었던 이름 중 하나이다. 아랍문화에서 요세프는 고난을 극복한 지혜의 인간을 상징한다. 작가가 주인공에서 유수프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축복을 받기도 하지만 탐닉의 대상이 되기도 한 그의 삶에서 유수프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가 극복해야 했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12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빚을 탕감하기 위해 상인 아지즈에게 팔려온 삶일까? '너는 절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너는 볼모로 잡혀온 삶이야'라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자신이 새장에 갇힌 줄 모르는 삶일까? 아름다운 외모로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삶일까? 아니면, 식민지배가 시작된 시대일까?
무엇을 극복해야 하던 그것은 정확히 낙원과는 반대되는 삶임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이 이슬람문화의 아프리카 식민지배가 시작되던 시기라는 것이 나에게 많은 것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태어남과 동시에 이슬람 종교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회는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 종교개종은 사회에서의 죽음을 뜻한다. 유럽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던 시대의 아프리카는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는 억압과 착취의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부모의 경제적 채무로 인해 주인공은 버려진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주체적 사고의 싹이 피우기 어려운 토양이다. 나를 지켜줘야 했던 부모에게 버려지는 순간 유수프는 세상에 대해 무력감을 학습하였다. 상인 아지즈로 인해 이곳저곳 옮겨지는 삶을 살아야 했던 시간들 안에서도 단 한 번도 그러한 삶에 의문을 가지거나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는 이미 세상의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다. 그 정원을 바라보면 그가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꼈다. 안전한 새장이었다.
그런 새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던 이로 인해 낙원은 더 이상 아름다운 새장이 아님을 깨닫는다. 자신이 한 번도 자유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말없이 몇 분 동안 앉아 있었다. 유수프는 삶의 얼레가 자 신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레가 저항을 받지 않고 돌아가게 놔뒀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곳을 떠났다. 그는 부모에 대한 기억을 생생 하게 간직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가슴이 명해져 오랫동안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부모가 자신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지 아직도 살아 계신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그 답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이 상태에서 떠오르는 다른 기억들에 저항할 수 없었다. 버림받았을 때의 모습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그들 모두가 그가 스스로를 방치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삶은 사건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는 파편들 위로 고개를 들고 있으려 했고 더 가까운 지평선에 눈길을 주며 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해 부질없이 알려고 하기보다 무지를 택했다.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속박에서 그를 풀려 나게 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우선 그는 너의 아저씨가 아니야. 그는 칼릴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느끼는 우울함과 갑작스러운 자기 연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 그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칼릴처럼 신경질 적이고 호전적이고, 사방으로부터 포위되고, 의존적이고. 미지의 한복 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 그는 손님들과 주고받는 칼릴의 끝없는 농담과 불가능해 보이는 그의 쾌활함을 떠올리고 실제로는 그것이 숨겨진 상처를 감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향으로부터 어마 어마하게 떨어진 곳에 사는 칼라싱가처럼. 그리움에 애가 타고 잃어버린 완전함에 대한 생각에서 위로받으며, 악취 나는 이런저런 곳들에 갇혀 있는 그들 모두처럼. 229P
나 역시 낙원이라 착각하며 지난 십 년을 요르단에서 살았다. 중동의 스위스라는 별명을 가진 정치적 중립국이었다. 그래서 다른 아랍국가들보다 안전한 곳이라 생각했었다. 소설 속 정원처럼 온갖 좋은 이유들을 붙잡고 그곳에서 인내라는 허울 좋은 포장을 하고 안주하였다. 낙원이라는 환각 속에서 새장 밖으로 벗어나는 상상 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정원에서의 안락함에 빠져있었다.
삶을 혼란 속으로 빠지게 했던 아지즈의 아내와 같은 존재들이 내게도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 앞까지 독일군이 몰려오는 상황처럼 중동 전쟁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새장에서 나는 법을 잊은 채 퇴화하는 늙은 새가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오랜 세월 동안 네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았니?(303p)"
아니. 아무도 내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다. 그저 떠나고 싶다고 말만 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내가 가진 정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정원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을 찾으면 그때 떠나겠다는 비겁한 마음만 품었었다.
정원을 벗어나려면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나는 그것을 회피하면서 요르단을 원망했다.
스스로 벗어나려 애쓰지 않으면서, 스스로 식민지배를 선택했었다. 자유롭고 싶다고 하면서 자유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계산하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아름다운 정원, 달콤한 열매들 그리고 안락함.
이 삶을 벗어나야겠다 다짐한 순간. 유수프처럼 독일군을 향해 달려 나갔다.
천국이 있을지 지옥이 있을지 모르는 그곳으로.
유수프는 환경과 타인의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았지만 결국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그가 독일군을 향해 쫓아갈 때, 그곳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결국 그것이 단 한 번뿐인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였기에 그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나 역시 아름다운 정원을 벗어나 살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면서도 결국 떠나왔다.
새롭게 정착한 이곳에서 내가 요르단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환영인사를 건넸다.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전한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눈빛을 보고, 그들은 이곳이 정말로 천국이라고 믿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정원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수프가 칼릴과 함마니를 보고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던 것처럼,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내 과거의 모습을 깨달았다.
새장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낙원이 아님을 알았다. 어쩌면 세상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던 비겁함을 마주했을 때, 낙원은 산자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