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이십 대 내내 함께 했던 그를 《1Q84》를 끝으로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작년 《일인칭 단수》를 통해서였는데, 이전 책들만큼 긴 여운은 남아있지 않다. 변한 것은 그였을까, 나였을까. 무엇이 그에게서 나를 떠밀었을까. 이십 대와 그 이후의 나는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 다시 그에게 목말라 있는 것일까.
대학에 막 입학한 열아홉 살, 당시에 만나던 남자친구가 형이 보는 책이라며 《양을 쫓는 모험》을 건넸다. 그때는 엄청난 차이 같았던 세 살 위의 형이 보는 책이라고 하니 수준이 높아 보였다. 난해한 판타지 소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노르웨이의 숲》, 그러니까 《상실의 시대》로 건너가기에는 충분했다.
그 이후로 《1973년의 핀볼》, 《렉싱턴의 유령》과 《TV 피플》, 《스푸트니크의 연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 감는 새》까지 쉴 틈 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는 내게 어떤 시절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깨발랄 여고생을 넘어서 어설픈 어른으로 넘어가려다가 넘어지곤 했던 시절.
그는 문학에 무지했던 나에게 체호프와 피츠제럴드를 소개해 주었다. 와타나베가 그랬던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를 여러 버전으로 읽고 또 읽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 삶의 허무라는 씁쓸한 맛을 보여 주었다. 위대하다고 불리는 문학작품들은 쉽사리 소화되지 않는 메스꺼움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음악 장르도 넓혀 주었다. 클래식과 올드팝과 재즈의 세계를 열어 주었고 비틀스와 빌 에반스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고 명령했다. 〈Yesterday〉 말고도 〈Penny lane〉과 〈When I’m sixty four〉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레오시 야나체크 같은 특정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곡을 귀 기울여 듣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는 내게 남성 패션의 중요성도 주지시켰다. 우아한 복장과 세련된 태도를 갖춘 댄디한 패션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색깔과 재질과 브랜드까지 일일이 패션을 설명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그는 독자를 실재하는 인간 앞에 데려다 놓곤 했다. 생각이 많지만 말수는 적고, 솔직하고 다정하며 책과 음악을 좋아하는 실제적 남성 앞으로.
또한 그는 성적 취향을 주제로 한 대화가 부끄럽거나 외설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관계가 정립된 사이에서 오가는 이런 대화는 유익하고 어떤 면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는 여성의 신체 부위 중에서도 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듯했다. 어쩌면 페티시적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성격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는 방식,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도 알려 주었다. 맥주와 위스키와 레코드의 매력에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현실에 지쳐 무너지지 않도록 관념의 세계를 일깨웠다. 그의 소설 속 남자들은 조금은 외롭지만 취향이 확고하며 소수의 사람에게 진심을 보이는 어른을 상징했고, 나도 모르게 그 인물들을 닮아갔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이십 대 이후 나의 정신세계를 먹여 살렸고, 업어 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등지게 된 건 문학과 음악의 세계에 막상 발을 들여 보니 서둘러 체험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소녀가 도시를 맛본 뒤 고향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시시하고 유치해진 느낌도 있었다. 하루키라는 광풍이 내 몸을 통과해서 지나갔고 너무 유행한 아이템은 다시 두르기 어려운 것처럼 나는 한동안 그를 찾지 않은 것이다.
멀어진 줄 알았던 그의 이야기는 내 깊은 서랍 속에 고여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다시 꺼내보니 그의 이야기는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 게 아니었다. 시간의 축을 빙글 돌아 다시 만난 하루키는 조금도 낡거나 녹슬지 않은 채, 젊음의 혼돈과 낭만을 머금은 채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하루키라는 시절을 이제야 다시 방문해보려고 한다. 그러면 뿌옇던 시절들이 뽀얗게 모습을 보일 것도 같다. 보잉 747기의 좌석에 앉아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와타나베처럼, 천천히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려고 한다. 쓰다 만 그의 서평을 이어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