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Aug 21. 2023

구원과 파괴의 딜레마를 품은 지도자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주요 내용 포함)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난 뒤 5일이 지난 지금까지 기대했던 만큼(?) 머릿속이 복잡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 특유의 후유증이다. 부유하는 질문들을 꺼내 정리해 본다.


왜 오펜하이머였을까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의문과 생각이 끊이지 않고, 다시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는 꿈이나 시간, 차원과 우주 같은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고 비틀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거시적으로는 별을 탐구하고 미시적인 원자 세계를 주물렀으며, 영광과 나락을 철저하게 경험한 오펜하이머가 놀란 감독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법하다. 이 밖에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의 어떤 점을,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는지를 탐구해보고 싶다.


‘핵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린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는 자신이 개발한 원폭으로 수십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죄책감을 느꼈고 수소 폭탄 사용을 반대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로부터 배척당하고 매카시즘의 광기에 온갖 곤욕을 치렀다가 말년에 명예를 회복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평전으로 다뤄졌을 만큼 충분히 영화적인 인물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의 이름도 잘 알지 못했지만.



놀란 감독은 영화의 스토리와 구조를 동시에 기획하고, 구조가 잡히지 않으면 각본 쓰기를 시작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메멘토〉, 〈TENET〉 등 시간을 다룬  영화를 보면 의도적으로 사건을 뒤섞고 조금씩 보여줌으로써 자극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오펜하이머〉도 3개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학생 시절부터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기까지의 일대기가 중심이 된다. 여기에 좌파로 몰려 고초를 당하는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와 오펜하이머를 견제하는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시점이 흑백으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윤리적 선택과 책임 그리고 필요악

오펜하이머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죄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는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 비유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기에 그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온갖 악조건과 반목, 책임감을 짊어지고 세상이 파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그였다. 성공 이후에도 번뇌는 끝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의 삶을 따라가며 삶은 선택의 연속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그어지는 윤리의 기준선 위에서 그는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했고 소신에 따라 입장을 바꿨으며 과도한 짐을 졌다고 생각한다. 《죄와 벌》에서 악인을 죽인 라스콜니코프의 죄책감이 얼마나 깊고 어두웠는지 생각해 보면, 수십 만의 목숨을 좌우했고 더 많은 희생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현실을 그가 어떻게 감당했을까 싶다.



오펜하이머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미리 예측해서 핵무기 개발을 거부했다면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요리 도구로도 흉기로도 쓰이는 칼은? 통증 완화와 향락에 모두 쓰이는 마약은? 물물교환의 편의를 제공하지만 빈부 격차를 만들어내는 화폐는 없애는 게 맞을까?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고 해서 불을 처음 사용한 인류인 베이징 원인을 탓한들 의미도 없고 사용을 포기할 수도 없지 않나.


이렇게 양면성을 가진 사회적 요소들은 쓰임에 따라 유용하기도 하고 필요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진보는 변화의 가능성이기에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되며 책임은 사용자에게 더 크게 주어져야 한다. 또한 이기적인 집단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책임은 커녕 여전히 비열하게 작동하는 권력자들의 방식에 멀미를 느낀다. 윤리적 책임과 고통은 왜 늘 개인의 몫인가?


우리에게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가

명철하고 리더십과 포용력, 인내심까지 겸비했던 오펜하이머의 생애가 안타까워 허망함을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삶에서 허무보다 더 의미 있는 가치를 찾아야만 한다. 학문의 발전이 살상 무기가 되고 선의가 악행이 되며, 비열하고 무례하며 무책임한 자들이 힘을 가지는 세상.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있고 그러자면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하게 현명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완벽한 선택을 하거나 매번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게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가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항상 확신에 차 있는 자는 나로서는 믿을 수 없다. 반성도 없고 죄책감도 없는 사람보다는 딜레마를 품은 인물,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지도자를 지지하겠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이러니하게도 오펜하이머를 파멸시키려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스트로스를 몰락시켰고, 놀란 감독은 두 청문회를 병치하고 조명을 비추면서 사회적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묻는다. 놀란 감독은 이 영화가 한 인물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의 업적이 아니라 고뇌를 통해서 말이다.


 

별과 핵의 운명처럼

놀란 감독의 영화적 기법으로 인해 오펜하이머의 삶이 별과 핵의 운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과학자들이 로스 앨러모스에 모이는 광경이 핵융합처럼 느껴졌다. 오펜하이머의 내면은 우주 공간이나 입자와 파동, 불꽃 등으로 표현되었고 트리니티 실험 성공으로 명성이 치솟을 때와 청문회에서 압박을 당할 때, 똑같이 화이트아웃 현상을 겪기도 한다. 별이 응축할 때 중력의 힘이 너무 세서 모든 걸 집어키듯이.


작은 조각 하나가 결합하여 핵분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오해와 시기와 어긋남이 트리거가 되어 삶을 파괴하는 과정이 무서웠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그런 이들을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악수를 건넸다. 비슷한 일을 겪은 아인슈타인의 경험을 알고 있었고, 핵분열에는 ‘연쇄반응’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가능성이 존재함도 그는 알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별의 탄생과 소멸의 사이클을 이해하고 핵의 융합과 폭발을 주도해 본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Photo : 다음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